독일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매 경험이 색달랐고, 외국인의 입장으로 경험하는 독일은 문화 깊숙이까지 침투하여 이해하기 힘들기에 나의 모든 경험은 항상 한국인이 알아가는 독일의 다른 모습들이었다. 조금 안다 싶으면 다른 면모를 겪고, 조금 익숙해지려 하면 배워야 할 것들이 생겼다. 출산 또한 그러했고, 출산 이 후도 그랬다. 한국 가족들에게서, 친구들에게서 얻은 정보와는 달랐던 독일에서의 출산 이후 몇 가지 모습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산후조리
운이 좋아 밧조덴 산부인과의 2인실을 통째로 우리 가족이 독차지하며 태어난 아들을 환영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1시간 뒤 의사에게 가보라고 하였다. 아직은 밑이 허벅지까지 퉁퉁 부어 화장실가기도 겁이 나는데 또 한 번 그곳을 혹사를 시켜야 하는 느낌이었다. 내 몸에 꽂아놓은 두꺼운 바늘 두 개도 이제 막 겨우 뺐는데 (진통 초반에는 진통보다 손등에 쑤셔 넣은 두꺼운 바늘이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척주에 꽂은 바늘은 느낌은 없지만 매우 불편하였고..) 또다시 육체적 고통을 느껴야 한다니! 하지만 내면의 반항심과 달리 순순히 시간에 맞춰 의사를 만나러 갔다.
독일 산부인과는 검사를 위해 치마라던지 수치심을 위한 그 어떤 배려도 없다. 그냥 하체를 자유롭게 하고 나오라는 말뿐. 수치심을 모른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이들에게는 사람의 몸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독일에 살다 보면 겉보기의 꺼려지는 그 무언가의 속 뜻은 의외로 굉장히 따스한 내용이 많다. 어찌하였든, 바지를 벗고 덜렁덜렁 검사 대위로 앉았다. 다행으로 모든 것이 정상.
"집에 너를 돌봐줄 누군가는 있지? 너의 엄마라던가?"
동양인이라서 내게만 묻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의례 알고 있는 것처럼 "해외에서는 산후조리가 없다더라,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를 한 손으로 들 수 있고 샤워를 하고 콜라를 마시며 조깅 간다더라"는 다 뻥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독일인들은 아니었다. 산후조리 기간이 있으나, 한국과 비교하여 굉장히 짧을 뿐이다. 출산 전에도 바퀴 달린 아기침대에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 의사에게 가는 여자도 봤다. 출산 직후 샤워를 하고 아이를 한 손에 들고 콜라를 마시는 이미지는 그저 출산 후에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서양인들을 보고 키워진 환상일 뿐. 의사는 내게 당분간은 쇼핑 가서 무거운 짐을 든다던지, 너무 무리해서 집안일을 하지 않을 것을 권유했다. 물론 나도 아이를 낳자마자 여기저기 묻은 피를 닦아내려 샤워도 하고 병원에서 나온 빵도 우걱우걱 먹었지만.
엄마 교육
독일 병원에서는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고는 출산 후 3일까지 병원에 무료로 있게 되는데, 입원실에 침대가 남아서 예를 들어 남편이 그 침대를 쓰고자 하는 경우 얼마를 지불하고 (하루 50유로가량) 3일 동안 같이 지낼 수 있다. 그리고 그 3일 동안은 산파들이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호출에 불려 다니며 이제 갓 엄마가 된 여성들을 도와준다. 그중에 제일 기억나던 한 가지는 젖을 물리는 방법이었다.
나의 젖가슴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임신 후기 때부터 모유가 몇 방울씩 흘렀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나에게는 많은 모유가 생성될 것이라 믿었지만, 아기를 막상 낳고 나니 아기는 젖을 빨고도 계속 울었다. 산파들이 바늘이 뽑힌 주사기 플라스틱 부분만 가지고 와서는 내 젖을 꾹 짜며 흐르는 몇 방울의 누런 모유를 주사 통으로 계속 빨아들였다. 우유인지 물인지, 그냥 누런색 물 같던 액체는 주사기를 통해 아들의 입으로 주입되었다. 그마저도 몇 방울 흐르지 않게 하려고 산파들이 갖은 애를 썼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몇몇 아기들은 젖을 빠는 법을 가르쳐줘야 잘 빤다며, 처음 아기를 낳은 어미에게는 너무 아이를 막 다루는 느낌으로 아기의 입을 벌려 젖가슴을 계속 물리고 유두 끝으로 입을 계속 자극했다. 내 가슴은 흡사 실리콘 브래지어처럼 이 산파 저 산파에게 마구 주물럭을 당했다나..
아들은 젖을 빨고, 울고, 빨고 또 울고를 반복했다. 울다 지쳐 잠에 들다가도 젖을 다시 빨고 울고. 그때까지는 내 젖이 몇 방울밖에 안 나오는지 몰랐다. 이틀째 되던 날 울음소리가 너무 심해져서 산파를 부르니, 전동 유축기를 들고 와서 3시간마다 유축을 하라고 했다. 유축기 펌프가 젖을 빨아 당겼다. 유두에서 초유가 한 4방울 떨어졌을까..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내 아들은 여태껏 굶고 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산파들은 여유로웠다. 아직은 괜찮다며 계속 젖을 물리려고 노력하라고만 했다.
다음 날이 되어 아들은 점점 더 심하게 울기 시작했고, 한국인의 정서를 장착한 우리 친정엄마는 아기를 굶겨 죽이려는 생각이냐며 날 타박했다. 남편은 나름의 힘든 육체노동에 심신이 지쳐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기는 울어대고 다 큰 성인 둘이 날 압박하는 상황에서 내 감정도 터져버리고 말았다. 산파실로 달려가서 엉엉 울면서 분유를 달라고 했다. 산파 한 명이 나와서 그 정도로 힘드냐며 내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의사를 불러 설명을 하고 분유를 먹여야 한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으나, 가지 않고앞에서 너무 서럽게 우는 산모에게 지고 말았다. 아직 오려면 한참 걸릴 의사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여 분유를 먼저 산모 동의하에 먹이고 나중에 설명을 듣는 것으로 해주었다.
내 입에서 그 더러운 손을 치워랏!
아들은 100ml도 안 되는 분유를 허겁지겁 먹고는 깊이 잠들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밧조덴 병원에서는 자연주의 육아 정신을 잊지 않았다. 분유병에 실리콘 젖꼭지로 분유를 주지 않고, 사람의 살을 느끼도록 손가락에 얇은 호스를 고정시키고, 손가락을 아기의 입에 물려서 호스 끝에 달린 주사 통으로 천천히 분유를 수유하도록 했다. 남편은 본인도 수유를 할 수 있는 분유를 선호했다. 모유수유를 하면 본인은 제외되는 느낌이라나...
남편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굵은 남편의 손가락이 아기의 입으로 들어갈 때면 걱정이 되기는 했다.
친한 언니들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2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 수유를 해야 해서 힘들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다행히 분유 수유를 했던 아들은 7시간씩 잠에 드는 효성을 발휘했다. 반전으로 이 효성은 신생아 때뿐이다라고 알려줬으면 마음에 준비라도 할 것을.. 어쨌든 내 눈에는 너무 순하기만 했던 아들은 아직 피를 닦지 않은 상태였다. 산파들은 이틀째 되던 날 아기를 체크하러 오라고 했다. 시력, 청력, 몸무게 등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머리와 얼굴에 묻은 피를 그제야 씻겨주었다.
친청엄마는 왜 애를 안 씻기냐며 조바심을 냈지만 사실 나는 독일식 육아를 조금 더 신뢰, 내지는 선호했기에, 병원 측 말을 더 잘 들었다. (엄마 미안.) 그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타지에서 미역국을 해다 나르는 엄마와 다투기도 했다. 아기의 온도조절부터 시작해서 옷 입히는 방법, 먹이는 방법 모든 것이 한국식과 독일식으로 나뉘어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나는 아기의 엄마의 권한이라고 생각했고, 친정엄마는 경험 있는 할머니의 권한을 내세웠다. 아기를 제외한 주변 가족 또는 사람과의 갈등 부분 또한 출산 직전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육아의 일면이다.
3일째 되던 날, 아기를 카시트에 태워 퇴원을 하던 날 집으로 방문하는 산파에게 연락을 했다. 왜 낳고 나서 바로 연락하지 않았냐며 아기의 엄마와 아빠는 꾸중을 듣긴 했다만, 키 180에 튼실한 체격의 산파는 아기에게는 오히려 엄마보다 따듯한 품이 되기도 했다. 내 품에서는 등을 30대는 맞아야 트림을 하는 아기는 능숙한 솜씨의 산파 품에서는 토닥토닥 10번 이내에 곧 용트림을 했다.
산파는 매번 페리칸이 아기를 선물 줄 때 가지고 오는 천같이 생긴 낡은 천으로 만들어진 저울계로 우리 아들을 벌겨벗겨놓고 몸무게를 재었다. 산파는 아기를 안는 방법부터 씻기는 방법, 수유하는 자세, 수유 횟수, 수유 양 등을 체크해줬다. 가끔 분유를 타올 때, 물 온도가 안 맞으면 혼도 냈다. 당신은 밥을 찬 밥으로 먹고 싶냐며 어미보다도 더 철저히 아기의 편이 돼주었다.
2주째 되던 날은 내 하부의 실밥이 다 빠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와 남편을 밖으로 내보내고 남은 실밥을 빼주었다. 마취도 없이 빼는 실밥 뽑기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실밥을 뽑고 나서는 소파에 던져져 있는 회음부 방석을 보더니, 절대 금기시켰다.
"Wieso???!" 왜 안되냐는 나의 질문에 친절히 설명을 해준 산파는, 회음부 방석을 쓰면 살들이 밑으로 빠져 더 늘어나기 때문에 회복기간이 길다고 설명해주었다. 대신 오히려 딱딱한 백과사전 등을 방석으로 쓰라고 추천해줬다. 참 듣기 싫은 권유였지만 빠른 회복을 위해 종종 들어주었다. 사실 병원에서도 회음부 방석은 치우라고 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산파는 또 2주 차쯤 산책을 나갈 것을 권유했다. "너의 정신에도 좋고, 아기도 처음 나가 보는 세상을 신기해할 거야. 아기가 신기해서 보는 모습을 보면 너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고 말하는 산파의 얼굴이 사실 더 신나 보였다. 정말 아기가 신나 하는 그 모습을 눈에 그리며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사실 산파는 더 일찍 산책을 권유했지만, 동양인들의 산후조리를 미리 숙지하고, 너무 일찍 나가는 것은 마음이 불편할 테니 조금 더 있다가 밖으로 나가지만, 한 달 동안 집에서만 있는 것은 너무 건강하지 않다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 친정엄마에게도 나의 통역을 통해 의사를 전달했다.
소아과 의사의 처방
친정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언젠가 한 번은 가족 모두가 감기에 걸렸다. 남편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제일 먼저 여름 감기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였고 이내 내가 옮았다. 남편은 혹시나 신생아에게 옮을까 엄마인 내가 보기에도 엄청 유난을 떨며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항시 끼고 다녔다. 하지만 별 수 있으랴, 하루 종일 엄마나 아빠에게 붙어있어야 하는 아기에게도 감기가 옮은 듯하였다. 별 일 아니겠지만, 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사람과는 많이 다르니 혹시나 싶어 소아과를 방문했다.
의사가 아기를 눕혀놓고 여기저기 살펴보려다가 유난스레 마스크를 끼고 입장한 남편에게 "마스크 벗어, 이미 옮았는데"라고 했다. 신생아가 감기에 걸리면 어떻다, 오래가면 폐렴까지 간다 등등 네이버에서 이것저것 찾아봤던 우리는 이제 어쩌냐며 어서 약 처방을 기다리고 있는데 소아과 의사는 감기 진단을 내릴 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며칠 갈 거야 아마, 더 심해지면 다시 방문해"라고 말하고는 다른 아기를 진찰하러 갔다. 사실 나 자체도 자연주의 의식이 강한 데다 뉴질랜드와 독일, 자연을 극히 생각하는 나라에서 인생의 반을 보냈던 나에게는 약 처방보다는 버티라는 처방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