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밧조덴 병원에서.
출산이 나만의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다른 삶들을 공유할 수 없는 한 개인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맞다. 내게도 그런 특별한 경험이 있고 다행히도 출산과정의 육체적 진통을 제외하고는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즐거운 기억이 남아있다. 독일에서 나에게 출산을 즐거운 경험으로 만들어준 환경에 대해서, 임신 때부터 아기가 나올 때까지의 나의 경험을 천천히 공유해보려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1주일 후 독일로 돌아와서 나는 바로 이직 준비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한 회사에서 버틴 덕분에 경력직으로 여기저기 이직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게 중 한 군데 정말 마음에 드는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왔다.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 헤드헌터에게서 좋은 반응이 있다는 내용의 통화도 한 후였다.
BUT! 좋은 기분과 동시에 기분이 쎄 한 게 임신테스트기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설마 했지만 맞았다. 테스트기는 선명한 두 줄을 내게 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 기쁨보다는 "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남편과 나, 둘 다 "안 가지려고도 하지 말고, 가지려고 굳이 굳이 애써 노력하지도 말고, 우리 서로 사랑하며 지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기면 낳고, 안 생기면 그런 거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은연중에 우리는 아기는 1년 정도 기다려야 생길 것이라고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의사도 갑상선 저하증이면 임신을 원하는 경우에는 호르몬 수치 등 조절에 신경 써야 된다고 했었다. 요새는 임신이 힘들다고 하던데. 나는 몸이 건강한 편도 아닌데...
언젠가 뱃속에 생명이 자리 잡는 기대를 가지면서도 정작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나를 봤다. 남편은 임신테스트기를 보며 내게 웃어줬지만, 나는 이내 침대에 쓰러져 이제 내 인생을 끝났다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을 때는 이미 침대 시트는 눈물에 적셔졌다.
하지만 독일에서 임산부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임신을 했다고 유세를 떤 건 아니지만, 부른 배를 보이면 내 앞에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처럼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이 열리고, 내 배를 보며 웃어주는 사람들과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도 생기고 (그저 지방일 때는 아무도 안 그랬잖아), 무엇보다 좋은 것은 회사에서 중간중간 낮잠을 자도 되는 권리였다. 모든 회사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임산부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매우 불리한 독일법을 굉장히 잘 알고 있는 회사 입장에서는 나에게 말 한마디조차 신중히 했다.
갑상선 저하증인지, 그냥 몸이 피곤한 건지 평상시에도 오후 3시만 되면 정말 3일 밤을 새운 것처럼 몸이 꺼지는 시간을 버티는 게 괴로웠었는데, 임신하고 나서는 당당하게 "저 좀 자고 올게요."를 외치고 올라가서 한 숨 자고 나왔다. 자고 나오면 이미 오후 시간은 거의 지나 금방 퇴근시간이었고, 임산부를 걸어오게 할 수 없다는 남편이 항상 회사 빌딩 앞에 차를 대고 기다렸다. 게다가 추위를 잘 타는 내 몸은 아들 녀석이 내 몸속에 들어서면서부터 열녀가 되어 겨울이 꽤나 따듯했다.
산부인과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언제나 건강한 아이에게 감사하며 내 몸도 더욱 튼실하고 둥글게 변해갔다. 체중 계위에 올라가면 분명 네이버에서 검색한 체중 증가 치를 훨씬 초과한 몸무게인데도 간호사는 정상이라고 했다.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그 말에 위안이 되었는지 딱히 체중조절을 하지 않았다.
출산휴가는 출산예정일 전 6주, 후 8주로 꽤 길었고, 이미 임신을 한 상태부터 해고가 금지되어 을에서 동등한 입장, 드물게는 회사에게 갑의 입장으로 회사를 다니니 꽤나 편안했다. 출산 기간은 100%, 육아휴직기간에서는 정부에서 세후 60%의 월급이 지원 나와 생활면에서도 걱정 없고, 어쩌면 내 10여 년간 독일에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이렇게 보상되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집에서 손수 모빌이나 만들며 반갑게 아들을 만날 준비 중이었다.
친정엄마가 2주 전, 이미 독일 집으로 와 산후조리를 준비 중이었다. 혹시나 일찍 나올까 봐 2주를 잡았지만 아들은 아직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때를 기회삼아 엄마와 프랑크프루트 근교를 돌아다니며 남은 여유를 즐겼다.
할머니가 슬슬 지겨워할 때쯤 손주는 예정일을 이틀 넘기며 할머니와 밀당을 하다, 약간의 진통에 너무 심하게 반가워하는 엄마를 보고는 이제 그만 나가줘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4월 1일, 갑자기 맥도널드 버거가 먹고 싶던 그 날, 전과는 다르게 규칙적인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간격이 줄어들자 남편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 자궁 문도 3cm 열려있던 상태였겠다, 주변 친구들이 왠지 너는 아기 편하게 낳을 것 같다는 말에 이 정도 진통으로 아기를 낳는다면, 짧은 시간 안에 출산해볼 만하다며 남은 버거를 마저 먹어치우고는 오후 6시쯔음 힘차게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동네병원이지만 자연주의식으로 아이를 받는 꽤나 유명한 3대 병원 중에 하나인 밧조덴 병원 (Bad Soden Krankenhaus)에는 이미 출산 전에 등록을 해놓고 임신 관련 자료를 다 넘겨준 상태였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해서 조금 누워있으니 진진통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참기 힘든 아픔. 내가 느낀 진통은 진진통 직전의 가진통이었다. 진통 간격을 체크한 헤밤매(Hebamme, 산파: 독일은 의사들은 위급상황을 위해 대기 중이고 보통은 산파들이 아이를 받는다. 병원에 근무하며 아이를 받고 케어하는 산파와, 태어난 아이의 가정을 돌아다니며 주기적으로 케어해주는 산파로 나뉜다.)가 아직은 병원에 오기에는 이른 간격이라며, 집에서 조금 쉬다 3분 간격이 되면 그때 다시 오는 것이 어떠냐며 물어봤지만 집에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대신 산책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는 산파의 권유에 병원 근처를 산책했다.
산책을 하며 남편과 같이 호흡법을 상기하며 진통이 올 때마다 "후흡 파아- 후픕 파아-" 하며 우리는 너무 잘하고 있다고 웃을 때가 저녁 9시, 예상과 다르게 그때가 진통의 시작이었다. 진통이 산파들의 예상보다 길어지자 병실 하나를 내어주고 병실에서 호흡하며 기다리기를 권유했다. 호흡법은 무너지고 남편이 도와주겠다며 옆에서 호흡하는 소리조차 아팠다. 서 있지도, 눕지도 못하는 고통에 산파들이 있는 곳으로 느낌은 빠르지만 실제로는 아주 느리게 이동했다.
산파들은 따듯한 욕실에 물을 받아주었다. 약간은 밀실? 같이 보이는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의 욕조가 있는 방 안에서 진통은 점점 세졌다. 산파들이 중간중간 들어와 상태를 체크했지만 자궁문은 4cm에서 많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낳으면 안 되냐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뱉어보는 임산부의 헛소리에도 다정히 안된다며 대답해주고는 돌아갔다.
진통이 길어지자 산파들이 이대로는 나중에 정작 밀어내는 힘을 줘야 할 때 지쳐서 출산이 힘들 수도 있으니, 지금은 마취제를 놓고 좀 자고 일어나는 것이 어떻냐며 권유했다. 최대한 자연적으로 출산을 하고 싶었기에 그 고통 속에서도 약간은 망설여졌지만,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불확실함이 날 약하게 만들었다. 남편도 밤을 꼴딱 새웠고, 친정엄마도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로 불안해할 것을 생각해 마취제를 놓고 조금 쉬기로 했다.
마취과 의사가 들어와 마취제에 대한 설명 등 진행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움직이면 안 되니 진통이 지나간 후에 바로 척추에 바늘을 주입하겠다고 했다. 등에 주사부위를 소독하고 바늘을 꽂으려는 순간 진통이 다시 왔다. HALT!! WARTE!! WARTE!!(의역: 잠깐! 기달! 기달!)라고 외치고 일어나서 남편 손을 꽉 잡은 채 진통을 보내고 주삿바늘을 주입하고 마취제를 놓았다. 마취제가 몸에 흡수되면서 나보다 1년 전에 이 병원에서 마취제를 바로 쓰고 아기를 낳은 언니가 "애 낳을만하던데?" 라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낳을만하겠네.... 라며 잠이 들었다.
배에서 근육들이 꾸욱 꾸욱 힘을 주며 움직이는 느낌, 천천히 다시 밀려오는 고통에 잠이 깨었다. 남편은 잠도 안 자고 샤워만 하고는 다시 내 옆에 와 있었다. 마취제가 안 드는 사람이 있고, 잘 듣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아예 안 듣는 건 아니지만 잘 안 먹히는 사람이 있다. 투여한 양에 비해 효과가 금방금방 떨어져 총 3번 정도를 추가적으로 더 투여했는데 의사가 미리 설명한 것처럼 3번 이상은 투여하는 것을 꺼려했다. 너무 아파하는 내 모습에 산파가 소량을 더 투여해줬다. 쥐어짜는 고통은 그래도 지금 기억하기에 참을만했다.
최악의 고통은 밀어내는 고통이었다. 4월 2일 오후 3시경 밀어내는 고통이 시작되었다. 산파를 급하게 불러댔다. 곧 나올 것 같다며 전날 입원할 때 나를 안내해주고 3교대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출근해 내게 인사를 하는 산파에게 나의 다급함을 어필했으나, 경험 많은 산파는 기다리라며 잔인하게 데스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다시 호출을 하여 마취제를 더 놓아달라 했으나, 밀어낼 때는 아기와 합을 맞춰 같이 힘을 주는 느낌을 알아야 한다며 마취제도 어디상 내게 남은 옵션이 아니었다. 남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출산할 때 남편에게 욕을 한다던가, 남편이 밉다던가 그런 감정은 없었으나, 이때만큼은 남편이 큰 힘이 되지 않은 것은 맞다. 어쩔 줄 몰라하며 옆에서 호흡을 하라는 남편에게 입으로 대답할 힘은 없고 속으로 "오빠가 이 고통을 몰라서 호흡하라는 소리를 하는 거야, 호흡하면 죽을 거 같아!!"라고 숨을 안 쉬어 벌게진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그 고통의 시간이 정신없이 1시간가량을 지나 이제 산파들이 내 다리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언가 나오려고 하는 느낌에 같이 힘을 주어야 하는데 산도로 들어갈 때 꽤나 힘들었는지 머리가 잘 보이지 않자, 이 자세 저자세를 취해보라며 쪼그리고 앉아있는 자세를 권했는데 나는 그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 자세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누워서 내장이 터질 듯이 힘을 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독일에서는 관장을 굳이 시키지 않는데, 그래서 임신기간에는 힘을 주다가 다른 것이 나올까 봐 걱정이 되었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걱정도 현재의 고통 앞에서는 "뭐라도 나와라"로 바뀌었다. 다른 무엇이 나왔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남편은 아직도 함구 중이다.
긴긴 쥐어짜던 진통보다는 오히려 그 고통 속에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나 못하겠어"와 "내가 책임질 테니 뚫어뻥으로 아이 머리부터 좀 꺼내 줘" 등등 산파들에게 생떼를 부렸다. 그런 독일어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입에서 나왔는지가 신기한 정도다. 그나마도 옆을 돌아보니 오히려 표정은 자기가 출산하는 것 같은 남편이 서 있었다. 그때 그를 달래준다고 하는 소리가 "개 빡세"였다. 웃어 보이며 이런저런 몇 마디 하고 힘도 여러 번 주고 나니 아이 머리가 보인다고 했다. 무언가 내 산도에 꽉 낀 그 느낌, 빨리 빼버리고 싶었다. 힘을 주면 똥을 싸는 느낌처럼 뾱 하고 나오면서 시원할 줄 알았더니, 머리가 나오고 나자 더 크게 아팠다. "아,, 몸이 다 빠져야 안 아프구나"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몇 차례 힘을 줬다.
병원으로 가기 전에 조바심은 나지만 몸은 이 곳에 함께 하지 못하는 친정아빠가 혹시 딸내미 치아 상할까, 힘을 너무 주는 것 같으면 손수건을 가지고 갔다가 입에 물려주라며 서방에게 당부를 했었는데 남편은 정말로 손수건을 들고 있다가 입에 물려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내 산파들에게 제지당했다. 산파들은 소리를 마음껏 지르게 하라며 오히려 산통을 겪는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무언가 따듯한 것이 배에 흐르면서 내 가슴으로 다가왔다. 좁은 산도를 얼굴로 통과하며 퉁퉁 부은 눈으로 힘겹게 눈을 떠 엄마를 확인하는 아기였다. 내 배에 흐른 것은 욘석의 태변이었다. 녀석 내 배에 똥 먼저 싸고 엄마한테 인사하러 왔구나. 나오느라고 참 고생 많았네.
"안녕?"
태어난 시각 18시 01분. 흐- 드디어 끝났다. 병원 온 지 약 24시간 만에 출산 완료. 산파는 캥거루 케어를 위해 아기를 나의 품에 안겨주고는 한 시간 정도 아이를 안고 쉬라며 방을 어둡고 해 주고는 나갔다. 문이 열리자 어떻게 찾아왔는지 엄마가 들어오셨다. 나중에 들었지만, 내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 조용할 때마다 잘못된 게 아닌지 밖에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런 내색 없이 밝은 모습으로 수고했다며 엄마의 존재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엄마, 나 아기 낳았다. 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