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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Dec 13. 2019

행복에 이어 멘붕

2010년, 늪의 시작

2009년 2월, 어학과정이 끝나고, 독일 대학 입학시기인 10월까지 대략 6개월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매월 나가는 생활비도 아깝고,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의 추억을 위해 한국에서 6개월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부설기관에서의 어학코스가 종료되고는 어학생들은 10월 입학일전까지 TEST DAF에서 모든 과목의 평균 4 이상을 받아야 했다. 놀면서 언어를 배우는 게 익숙한 나는 항상 모의고사를 칠 때면 Listening, Speaking에서는 우세했지만 Reading (집중력의 부재)과 Writing(문법에 약한 자)에서 항상 벽에 부딪히고는 했었다. 하지만 어학 기간이 끝날 때에는 모든 과목에서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더랬다. TEST DAF 시험은 한국에서도 칠 수 있으니, 편하게 마음먹고 일단 한국행 비행기를 샀다.  


한국에 가기로 하고 돌아보니 어쩐지 나의 삶은 돌아보니 너무 수동적이었다. 딱히 자기주장을 못 펴고 남이 하라는 대로 하며 살지도 않았는데, 그냥 항상 일상이었다. 그래서 해보고 싶은걸 다 해보기로 했다. 수영도 배우고 싶었고, 몸매 관리도 하고,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지금 와서 보니 수동, 능동을 떠나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었나 보다. 사실 이 기간이 마음이 제일 편한 기간이었다. 불안하지 않게 미래는 짜여 있었고 (어학만 합격하면 미리 입학되어 있는 스투트가르트 대학), 한국에서의 삶은 부모의 둥지 안에 보장되었었다(유학시절처럼 돈을 다 써버리면 먹고살 궁리를 안 해도 되고, 오늘 반찬은 무엇으로 때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빨래도 빨래 바구니에 넣기만 하면 어느새 내 서랍 속으로 들어와 있는 마법이 존재하는 그곳). 지금 와서 사진을 올리려 찾아보니 부모님이 파산 직전의 가계를 맞이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지라 부모님의 얼굴에는 드리워진 그림자가 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다. 눈 앞에 보면서도 모르고 혼자 신난 9년 전의 나 자신이란... 


철들지 못했던 나는 한국에서 정말 좋기만 했다. 유학생들은 보통 방학 1달만 들어오게 되는데, 그 기간에는 사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보려면 너무 바쁘다. 하지만 이번 6개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여유롭게 만날 수 있었고, 가족과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면서 내가 하고 싶던 일들을 하나씩 다 실천해 갔던 기간이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수영강습, 강남역 카페거리에서 아르바이트 (카페 알바는 왜 그렇게 하고 싶은지 지금도 하고 싶다.), 힘차게 다이어트도 성공하고 그 짧은 기간 안에 연애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먹고, 보고, 떠들고. 또 부수적으로 과외와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며 반 아이가 만든 사탕목걸이도 받아보고,  그저 행복한 기억들로 채웠던 6개월이었다. 


독일로 돌아가기 직전에 터키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유럽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덕분에 EU Zone은 저렴한 비행기가 많고, 특히 독일 항공사에서 가끔 프로모션으로 매월 싸게 판매하는 비행기가 있었는데 터키 비행기표가 꽤나 괜찮은 가격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여행을 끝으로 나는 앞으로 2년간 독일에서 지독한 멘붕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내적 혼돈을 겪게 한 스투트가르트 공대 강의실, 출처: https://congress.stuttgart-tourist.de/en/university-region

독일로 돌아와 스투트가르트 대학 수학과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가장 큰 기억은, 아래위로 움직이는 칠판, 분필 자국을 분필 지우개가 아닌 물 젖은 스펀지로 글씨를 지우고 물이 채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분필로 글을 써서 물이 마를 즈음에야 글씨가 보인다는 것,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TEST DAF의 수준은 훨씬 높아야 한다. 대학교수의 말을 다 알아듣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수준이다." 그리고 "수학이 이렇게 쉬웠던가?"


꽤나 상반되는 생각이지만 첫 기억을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대학교수가 앞에서 말하는 말은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칠판에 쓰는 글을 읽을 수 있는데, 처음 시작이 1+1=2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기억 속에는 나를 제외한 독일 학우들도 조금은 어벙 벙한 모습이었다. 

Prüfungsordnung에 나와있는 수학과 모듈

수업내용을 이해를 한 듯 안 한 듯하면서도  "뭐 이쯤이야"라는 생각으로 부전공까지 생각하며 3년간의 계획을 짰다. 독일은 원래 Diplom제도의 5년 정도의 대학과정이 일반적이었는데 내가 입학할 때 즈음에는 미국식 Bachelor, Master개념이 많이 도입되고 있던 시기인지라 Bachelor 3년 과정, 또는 Diplom과정을 선택할 수 있거나 또는 아예 Bachelor, Master로 대체되고 있는 대학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학사과정의 학점은 총 180학점이고 3년을 기준으로 하며 3번째 한 과목에서 낙제하는 경우, 평생 그 과목을 독일 내에서는 공부할 수 없다. 또한 시험을 무조건 봐야 하는데, 시험은 임의로 미루거나 취소할 수 없고 아프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연장 또는 연기된다. 그래서 시험기간에는 꾀병으로 독일의 착한 의사들을 이용하는 학생들이 꽤나 많다.  


시험은 둘째치고 부족한 독일어는 수업을 이해 못하게 한 것뿐 아니라, 개념과 내용 파악을 하려 산 책들도 더디 읽게 만들었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0대 언어를 쓰는 독일 친구들에게 질문을 할 자신감 마저 앗아가 버렸다. 경영을 부전공으로 설정하며 크게 꾼 꿈은 온데간데없고, 나는 첫 수업의 자만심과는 정반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수업을 받고 있었다. 증명은 내가 접한 너무나도 새로운 방식의 공부였다. 답만 구하던 나에게 답을 증명하라니. 내가 잘하던 것은 산수였고 계산이었지, 수학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학과라고 할 때 암산 문제를 내는 사람들이 점점 싫어지기 시작했다. 수학을 알지도 못하면서...







배경 사진 출처: Kraufmann, von Stuttgarter Zeit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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