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미 Feb 17. 2020

조기유학 생각하세요?

내 자녀를 떠나보낼 때 알아야 할 것

저는 2003년,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채 마치치 않고 중퇴 후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어요. 이상하게 초등학교 때부터인가 한국문화와는 거리가 느껴지더라고요. 1년도 채 차이 나지 않는 또래에게 존대를 써야 하는 것부터, 어른이 말하면 토를 달지 말아야 하고, 대답을 하면 말대답이 되고 어찌 보면 유교사상과 맞지 않았나 싶어요.


중학교 때는 사춘기라 더 심하잖아요. 기존 사상에 대한 반항이라던가, 사실 그 당시 유학이 열풍처럼 불었었어요, 주변의 많은 친구들도 이미 유학을 떠나거나, 적어도 Summer School을 하고 왔었고, 영미권에 대한 환상도 높았어요. 그에 비해 한국은 너무 고리타분하고 지겨웠기에 부모님을 계속해서 설득했어요. 나 유학 가고 싶다고.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 싶다고.


부모님은 저의 말을 그래도 잘 들어주는 편이셨는데, 이때 제가 너무 강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의 소원도 이루어주고 싶으셨나 봐요. 그리고 한국에서 수능을 치른다고 고생할 딸이 안쓰러웠나 봐요.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기회를 금방 만들어주셨고, 저는 유학을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주일 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유학행 비행기표도 샀어요.

공항만 가면 눈물바다였던 고등학교 유학시절 엄마아빠

저 그전까지 눈물이 없기로 유명했었어요. 억울해야 울지, 아프거나 슬프다고 눈물이 나는 게 정말 이상했거든요. 근데 아마 그게 아프거나 슬픈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슬프다고 해도 부모님의 쏟아붓는 사랑 속에서 그렇게까지 슬플 일이 없었어요. 


나의 결정으로 인해 부모님과 이별하게 되는 그 순간 저는 세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울었어요. 겨우 뜬 눈에 비췬 건 난생처음 아빠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었어요. 엄마는 이미 내가 눈물을 흘릴 때부터 울기 시작해서 얼굴이 촉촉해지셨고요. 가는 내내 뒤를 돌아본다고 아예 뒷걸음으로 갔어요.


저는 그렇게 울면서 뉴질랜드로 날아가고 가서도 일주일 동안 그치지 않고 울었답니다. 부모랑 이별하는 것은 이론과 다르게 많이 슬프더라고요. 그래도 18세 미만이라 가디언이 있어야 했고, 홈스테이를 하는 집에서 지냈는데 그 공허함은 사실 말할 수가 없어요. 펑펑 우는 시기가 지나고도 한동안은 전화만 오면 눈물이 그치지를 않았어요. 같이 왔던 20세 오빠는 그다지 슬픈 기색은 없었지만 저는 아마 더 어려서 그랬나 봐요. 방학때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만나는 또래 유학생들은 다같이 통곡을 했던 기억이 나요.


적응은 잘해나갔어요. 비록 모든 게 낯설었지만 금세 적응하기 마련이었고, 적응을 너무 잘해서 한국에는 가기 싫었어요. 부모님은 보고 싶지만 한국은 많이 그립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무언가 그 공허한 느낌을 채우기는 힘들었어요. 그래서 유학 간 친구들은 이성친구를 잘 사귀어요. 사귀면서 꽤나 심적으로 상대방을 많이 의지하고 그로 인해 쉽게 무너지고 하더라고요. 저도 한국에서는 끄떡도 없던 말들과 관계에서 너무 쉽게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더라고요. 

이런 사진은 부모에게는 안보내겠죠?

그때는 그렇게 그렇게 지나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의 부재가 그런 거 아닐까 싶어요. 나의 버팀목. 나의 백그라운드. 뿌리 없이 흔들리니 더 거차게 흔들리는 부분이 많아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겉으로 보면 티는 안 나요. 잘하고 있어요. 공부도 잘하고 있고 친구들도 있고, 잘 먹고 포동포동해져서 돌아오기도 하고 그래요. 근데 그 포동포동도 심적 허함을 먹는 것으로 자꾸 찾아먹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전 계속 먹어댔어요. 공항에서 부모님이 못 알아보실 정도로. 


가끔 주변에서 자녀의 조기유학을 생각하는 친구들이 내게 물어오더라고요. 어떻냐고. 초등학교 때 보내는 조기유학도 있고, 저는 비록 그나마 늦게 간다고 고등학교 때 떠났지만, 세상을 사실 혼자 맞서기에는 고등학교도 어린 나이더라고요. 아빠는 사실 반대했었어요,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부모 밑에서 있다가 가도 되지 않냐. 그때는 그러면 늦는다며 당장 가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빠의 말에 전적 동의해요. 


그리고 사실, 대학교 때 유학을 떠나는 것도 자의가 확실하고 떠나는 길과 그저 뚜렷한 목표 없이 떠나는 길은 천지차이예요. 저는 주변에 역마살을 끼고 태어난 아이들이 희한하게도 많은데, 뉴질랜드, 호주,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등 다 비슷해요. 이민이 아닌 이상, 유학생들은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야 해요. 내가 떠나겠다고 용감하게 나섰다고 해도 그 외로움은 지독해요.


싸워서 당연히 이기고, 그렇게 혼자 사는 법을 익히지만요. 자의로 싸워 이기겠다 해서 가서 버티는 것과 내가 내 자녀를 내몰아서 그런 홀로서기를 시키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거예요. 다들 그러더라고요, 아니 우리 손녀는 부모가 말도 안 했는데 가겠다고 그러더라고 애가 아주 똑 부러진다고. 네. 아직 몰라서 그래요. 가서 겪을 일들을 아무도 애의 눈앞에서 시물레이션 돌려주지 않았잖아요. 그저 해외에 나가면 좋을 거라는 기대에 의한 것일 수도 있어요. 


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 사는 것 꽤나 고단해요. 겪어가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독해지지만 지금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꼭 그렇게 이겨내고 살아야 하나. 어차피 살면서 단단해질 인생인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해외 한번 안나가 보고도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도 많고, 한국에서도 넓은 세상을 잘 바라보고 오히려 한국문화와 서양문화를 잘 배합해서 더 잘살고 있는 친구들도 많더라고요. 


한 가지 더, 저의 경우이긴 하지만, 독일로 옮기고 나서는 사실 너무 오랜 기간 부모님을 못 보고 통장으로 보내주시는 생활비로 그저 내 생활만 하다 보니 부모님하고 소원해지더라고요. 한번 한국에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어색한 적이 있었어요. 부모님은 나를 믿고 잘할 거라며 열심히 일해서 지원해주시느라, 그리고 시차며 이런저런 일로 바쁠까 연락을 많이 못 한 것뿐인데 어느새 저는 그저 돈을 받는 출처로 생각하고만 있었나 봐요. 부모가 어색해질 정도가 되면 사실 외롭지는 않아요. 그만큼 적응을 했고 그 삶이 만족스러운 것이거든요. 2008년에 한 번 그랬네요. 그러고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방학마다 나가려고 애썼어요. 내가 너무 사랑했던 사람들이 내 마음에서 나갈까 봐 겁이 조금 났었나 봐요.


가서 얻는 부분도 많지만, 기회비용으로 잃는 것 또한 많을 수도 있어요. 유학을 생각하는 어느 성인에게 말을 한다면, 저는 나가서 더 넓은 세상을 겪어보라고, 한국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어요. 부모를 떠나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추천할 거예요. 유학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기에 나가라고 할 거예요. 


하지만 내 자녀의 유학을 자녀가 아닌 내가 고려하고 있는 부모에게 말하라면 그런 생각은 후에, 자녀가 성인이 되어 내가 어쩔 수 없이 힘들걸 알아도 세상으로 나아가게 독립시킬 시기가 되면 그때 의논하시라고 추천드릴 거예요. 아이가 정 원한다면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자녀가 어떤 삶을 살지는 미리 알고 보내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이는 생각이 없는데 나 혼자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글쎄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물론 현실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시도해보는 것이 좋아요. 하지만 간다고 다 좋은 거는 아니고, 특히나 아직 어린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내보내기에 많이 슬플 수 있다는 점. 아들이 생기고 나니, 우리 엄마 아빠 마음이 어땟을지, 눈 오는 2020년 2월에 분위기 타서 알려드리고 싶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러고 보니 한국의 좋은 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