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미 Apr 09. 2020

우리 아들 걷어 차인 날

ㅂㄷㅂㄷ

어제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는 길에 주변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놀았다.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애 둘과 그 동생들로 보이는 남자아이들 둘, 넷이서 놀이터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나름 또래라고 신이 났는지 3살 된 나의 아들은 그 들과 놀라고 같이 뛰어다녔으나 언어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능력이 아직 미달인 내 아들이 귀찮게 느껴지는 듯했다. 심지어 아들이 놀려고 시소 쪽으로 가면 달려와서 자리를 낚아채고는 자기 동생을 앉히고 놀아주고, 그 어떤 것을 하려고 해도 "쟤 왜 저기 있어"라며 새치기를 하며 아들을 밀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같이 놀자며 아들이 누나들에게 다가가면 도망가기 일 쑤였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그 또래 애들이 집단의 개념을 익혀가면서 이방인에 대한 경계 또는 적대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배우는 기간이려니, 그저 사회성을 길러가는 부분 중 하나인가 보다 하고 애써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게 우리 그럼 다른 데 가서 놀자~라며 방향을 틀어주었다. 그네로 달려가는 아들, 그리고 어느샌가 쏜살같이 튀어와서 그네를 낚아채고 자기가 먼저 올라타서 타기 시작하는 여자 아이.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이성의 마지막 순간이고, 그네를 높이 띄운 다음, 옆에 걸리적거리는 내 아들을 치우기 위해선지, 굳이 옆에 선 아들의 등짝을 그네의 스윙과 함께 발을 뻗어 걷어차는 모습을 보고는 이성의 끈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아들은 몸이 한번 뒤틀린 채로 펑펑 울면서 내게 달려왔고 여자아이의 엄마가 달려와서 내 아들의 손을 잡으며 이모가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내가 제삼자였다면, "놀이터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도 애 엄마가 개념 있게 와서 사과도 하고, 애한테 사과도 시키고 그랬네." 하고 말았을 일이지만, 등짝을 까이고 서럽게 울고 있는 아들과 이전부터 계속 내 아들을 밀어내던 못되게 생긴 그 여자아이를 보니, 특히나 그네 앞에 있던 것도 아니고 옆에 뺏긴 채로 멍하니 있던 아들을 걷어차던 순간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이성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그나마 "참아, 아직 애들이야"라고 흐릿하게 한지만큼 얇은 이성에 남은 글씨가 내 성대를 절제시키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애써 침착한 척 "누나가 미안하데, 우리 그냥 다른 데 가서 놀자"하며 차에 태워 이동 중이었지만 내 눈은 이미 백 년 묵은 구미호가 피 눈물 흘리는 듯한 공포스런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실은, 속으로는, 까이는 순간 그 여자아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줄 만큼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주고 싶었다. 애 엄마가 없었다면 아마 쥐 잡듯이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아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아이의 행동을 고이고이 시한폭탄처럼 접어서 마음 한구석에 몰아넣어주었던 이성이 발길질 한 번으로 사라지고 말자 쌓여있던 폭탄이 다이너마이트처럼 연달아 폭파했다. 알만큼 알만한 녀석이 그것도 반항 한 번안하고 다 뺏기고 가만히 있는 약자의 등짝마저 걷어찼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아들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 아이 엄마는 아이를 혼내기도 했지만 일단 "너 이리 와!" 하며 저 멀리로 나에게서 먼저 보호를 한 셈이다. 화를 뿜어낼 상대가 사라지니 그 화가 나를 감쌌다.




안 그래도 최근들어 계속 당하기만 하던 아들이었다. 우리 아들도 돌이 되기 전에 다른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거나, 때린다거나 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저 사회에서 미움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고쳐주었다. 애기 때부터 또래들, 사람들을 좋아하고 적극적이었고 오히려 그 적극성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괴로웠다. 오히려 아들이 다가가서 놀자면 아직 어린 아기들이 엄마를 찾아 도망가는 바람에 바람맞은 아들의 뒷모습이 더 짠했었다. 그래도 타인이 불편할까 해서 그 마음조차 접으라고 교육을 시켰었다.


"친구는 지금 같이 놀기 싫데~ 우리가 다른 데로 가줄까?"

"친구 머리는 아이 이쁘다 하고 쓰다듬어 주는 거야"

"그렇게 세게 잡으면 싫어하니까 살살~"

"어어, 같이 놀아야지 뺏고 그러면 안돼!"


아들의 장난감이더라도 원하는 아기가 떼를 쓰면 양보하라고 가르쳤다. 너무 양보만 가르쳤을까, 요새는 오히려 말도 없이 손에 쥐고 있는 아들의 장난감을 뺏어가는 녀석들이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버리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괜히 교육을 시켰나 하는 후회까지 밀려온다. 때리면 안 된다는 교육이 너무 철저했는지 아들은 맞고 억울해서 펑펑 울기만 한다. 때리고 오는 입장, 맞고 오는 입장을 둘 다 겪어보고 나니 차라리 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 혼자 교육시킬 거였으면 너네 새끼들이 차라리 맞게 내 새끼 교육 안 시켰지!! 2차 폭파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게 무식하게 키우는 엄마들을 혐오했었는데, 그리고 내 아들이 어디 나가서 때리면 때리고 왔지 맞고 오지는 않았다는 누구의 말에 그게 자랑거리냐며 속으로 비웃었던 나였지만 내 자식이 당하는 순간 야마가 돌았다.



눈이 이글이글해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데, 기어를 잡고 있던 오른손으로 고사리 손이 사뿐히 내려앉더니 내 손을 쥐고 흔들흔들하며 내 얼굴을 보고 아들이 씩 하며 웃어줬다. 눈으로 분명히 말했다. "에이~ 이제 그만 화 풀어."라며 자기는 이제 기분 좋다며 출발하자는 아들이었다. 단 한 번도 차에서 내 손을 먼저 잡은 적이 없었는데, 순간 남편이 빙의한 줄 알았다. 그 행동에 이제 그만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맞다. 다시 이성이 돌아왔다.

크면서 다들 배우는 과정이다.


어쩔 때는 순했다가, 어쩔 때는 과격했다가,

착했다가, 못됐다가,

잘 나가다가, 부서졌다가,

그렇게 죽을 때까지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위로, 아래로,

삶의 굴곡을 지나가는데,


문제는 지구 상의 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동기화되어 있지 않기에 내가 내려갈 때 누구는 올라가고, 누구는 뒤따라 내려오고, 누구는 다음 커브를 타고 있고 이렇게 다 다르게 다른 곡선을 타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애기 엄마인 나도, 자라나는 아들도, 중년을 향해 달려가는 남편도, 우리 주위 모두가 방향도, 굵기도, 속도도 다 다르게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타인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잘한다고 당장 잘못하고 있는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다. 나도 그 위치에 갈 수도 있으며 그 위치에서 나는 더할 수도 있기에.


애들끼리 있는 일에 끼어서 화를 내는 여느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나로서는 이해 못한다는 제스처를 취한 과거의 많은 날들이 무색해진 그날,



그렇게 잃어버린 관용을 내가 낳은 통통한 고사리 손을 가진 하룻강아지 아들 덕에 다시 찾은 어제였다.



#육아일기 끝

#네가나보다낫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돼지 멱따는 소리로 화를 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