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 농장 체험
초반에 체력을 몰아 쓰는 느낌이지만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을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어제 베이커리 견학을 함께 한 엄마의 권유로 근처 농장 체험을 예약한 것이다. 내가 익숙한 장소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채 살아가는 게 편하다. 하지만 낯선 이국에서는 누군가 유용한 정보를 공유했으면 싶다. 진짜 이기적인 여자다.
타포차우 산 자락에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과일 농장이 있다. 농장 곳곳에는 갖가지 열대 과일이 열린다. 농장 주인과 함께 걷고, 신기한 과일을 따 먹기도 하며 타포차우산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농장 주인분께 산 입구에서 픽업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타국에서의 운전은 더 조심해야 한다.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오를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인상 좋은 농장 아저씨의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사이판은 처음이세요?”
“네.”
“정말 좋죠? 근데 사이판에 네 번은 오지 마세요.”
“왜요?”
“네 번 오면 눌러살고 싶어 지니까.”
사람 좋은 아저씨 미소에는 사이판에 대한 애정이 흠뻑 묻어났다. 몇 번의 여행 끝에 사이판 이민을 결정하셨다고 한다. 뭐든 좀 부족해야 올 수 있다고 했다. 돈을 다 모으고, 영어가 완벽하며, 아이들을 다 키웠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라고. 아저씨는 사이판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농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부부는 농장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매일 한국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농장엔 아담과 이브라고 불리는 커플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한국인 이브와 외국인 아담은 농장 부부의 일을 도우며 자연치유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체험 내내 아담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가 타잔처럼 나무를 잘 탔기 때문이다. 아담은 맨발로 나무 꼭대기에 올라 탐스러운 열매를 따 먹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무 제일 꼭대기에 가장 달콤한 열매가 열려요. 그건 나랑 하늘 위의 새만 먹을 수 있어요.”
아담은 한국에서 태어나 19년을 한국에서 살았다고 했다. 금발 머리 타잔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술술 흘러나오자 아이들도 신기해했다. 아담은 농장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해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잘 익은 과일을 따다 주었다.
농장 투어는 아주머니가 동행해 주셨다. 아주머니는 손때 묻은 긴 칼을 들고 무리에 앞장서 길을 안내해 주셨다. 아주머니는 후숙이 꼭 필요한 과일 외에는 직접 따먹어도 좋다고 하셨다. 노니, 스타프루트, 잭푸르트, 칼라만시, 라임, 청귤, 바나나 정도 생각이 난다. 농약을 치는 일이 없어서 옷에 쓱 닦아 먹어도 된단다. 과일은 대체로 신맛이 났다. 막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과일은 인간에게 달콤한 맛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맛이 괜찮았다. 신맛은 신맛대로, 떫은 건 또 떫은 대로 싱싱했기 때문에 따 먹는 재미가 있었다.
숲 속에 과일나무만 있으면 좀 섭섭할 뻔했다. 우리 뒤를 졸졸 따르는 새끼 고양이와 커다란 개가 투어의 흥미를 더해주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새끼 고양이들은 요새 농장 사람들과 야생 훈련을 시작했다고 했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보기도 하고, 쥐를 잡아보기도 하는 생존 훈련 같은 거였다. 녀석들은 아이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코코넛 열매에서 뿌리 나오는 거 보이죠? 이게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면 또 다른 코코넛 나무가 자라는 거예요.”
열매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고양이는 자연스럽게 새와 쥐를 잡아먹는 정글. 너무 당연한 것들을 우리는 마치 박물관에서 도슨트의 해설에 경청하는 자세로 들었다. 자연의 생태를 공부해야 하는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농장이 마냥 신기한 듯 청귤을 따고, 바나나잎으로 부채를 부치며 즐거워했다.
아담은 선물로 코코넛 열매를 따 주었다. 예쁘게 구멍을 낸 코코넛에 빨대를 꽂아 과즙을 쭉 들이켰다.
“연한 우유 같아요.”
“김 빠진 사이다 같아요.”
과즙을 먹고 난 코코넛은 바깥쪽부터 굳어 고소한 과육이 된다. 아담이 칼로 잘라낸 과육에서 고소한 견과류 맛이 났다. 그리고 그 안에 코코넛빵이라 부르는 부드러운 과육도 숨어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단한 코코넛 열매의 껍질은 연료로 쓴단다. 불을 피워 놓으면 벌레를 쫓을 수 있어 아주 유용하다고 했다. 버릴 거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코코넛 과육을 잘라 말린 것을 주로 먹었다. 오늘 진짜 코코넛을 만나고 나니 사이판 지천의 코코넛 나무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과일로 배를 가득 채우고 산에서 내려왔다.
“사이판에 사는 원주민들은 대부분 먹고 놀아요.”
“돈을 안 벌어요?”
“뭐 하러요. 미국 본토에서 원주민들한테 지원금을 많이 주거든요. 군사요충지로 굳히고, 완전한 미국으로 만들려고 회유하는 거지요. 원주민 혜택이 많아서 일을 해서 수입이 생기면 오히려 지원을 못 받을걸? 그래서 얘네는 만날 파티하고 수영하고 놀아요. 근데 나중이 문제야. 진짜 미국 사람들하고 똑같은 환경에서 살게 되면 경쟁력이 없는 거지. 배운 게 없으니 그땐 뭐 일을 하려야 할 수나 있겠어요?”
차를 타며 지나오는 원주민의 저택을 보며 아주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다. 농장에서 본 신기한 열대과일만큼 생생한 원주민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운전이 무서워 주인 부부의 차를 얻어 탈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오늘은 모처럼 행운처럼 여겨졌다.
#사이판 OK농장
*소소한 TIP
농장 투어를 하며 잘 익은 과일은 봉지에 담아 가도 됩니다. 농산품은 국내 반입이 안 되지만 가공품은 가능해요. 사이판 농장의 청귤을 따다가 청귤청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