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니 배울 게 참 많네요.
숙소 청소를 해주는 날이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아이들 등교 후 노트북 가방을 들고 단골 카페로 향했다. 오늘이 벌써 5번째 방문이니 단골 가게라 칭할 만하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오늘의 첫 번째 스승을 만났다. 건물 구석 벤치에 앉아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페 직원이었다.
카페 직원은 고양이와 나란히 앉아 아주 부드러운 어투로 이야기했다. 아주 작고 귀여운 고양이라 다가가고 싶었지만, 괜히 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지 않았다. 카페 직원과 고양이는 샘이 날 만큼 끈끈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와 매번 앉던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 너머 고양이와 직원의 표정을 몰래 지켜보았다. 그냥 둘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늑해졌다. 창 너머 직원의 표정으로 내 마음대로 소설 한 구절을 쓰기 시작했다. 사이판 배경의 하이틴 소설.
“조이야.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오늘은 어떤 간식 줄까? 연어? 닭고기? 언니가 오늘은 일을 빨리 끝내고 데이트를 가야 해. 가라판 카페에서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내 얼굴 어때? 그런데 남자친구가 요즘 나한테 관심이 좀 없는 거 같아서 걱정이야. 내가 먼저 뻥 차버리고 다른 남자 만나볼까? ”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듯한 직원의 눈빛, 강아지처럼 그녀 곁에 바짝 엎드린 새끼 고양이.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도 고양이는 늘 있다. 날 보면 뒷걸음질 치며 경계하는 녀석들. 내가 마음을 열지 않았고 소중한 생명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탓이다. 누구와도 친구가 되는 사이판 사람들. 배울 게 참 많다.
카페에 앉아 몇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다양한 손님들이 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카페에는 유난히 한국인 엄마들이 많다. 한국인 사장님, 책장에 꽂힌 한국 책들, 한국식 카페 인테리어가 이유인 듯하다.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선 사이판의 이야기가 오간다. 오늘 내 옆 테이블엔 한국인 엄마와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원어민) “아이들 학교에 잘 갔나요?”
(한국 엄마) “네 아이들 보내고 설거지 좀 하고 나왔어요.”
(원어민) “어제는 뭘 했어요?”
(한국 엄마) “마트에 가서 장을 좀 보고, 아이들과 맥도널드 갔어요.”
전화영어 시간에 주로 나누었던 대화체다. 한국인 엄마는 더듬더듬 대답했고, 교사는 테이블에 몸을 가까이해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의 카페 영어 공부, 생소하지만 너무 멋지지 않은가.
보통은 아이들의 영어 회화와 미국 문화 체험을 목적으로 사이판 한 달 살기를 계획한다. 나도 그랬다. 엄마는 그저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보호자 역할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고정관념이었다. 엄마도 영어권에 온 김에 함께 배우면 좋지.
같은 영화를 50번은 넘게 본 거 같은데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지 않았다.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주입이라서 그랬을까. 나도 원어민과 대화하면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아는 단어를 조합해서 결국 답을 하고야 마는 한국 엄마가 크고 대단해 보였다. 도전하고, 노력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밝은 빛이 난다.
“오늘은 오후에 뭐 할 계획인가요?”
“아이들 수영이 끝나면, 같이 영어 공부 좀 하려고요.”
같이 노력하는 엄마, 곳곳에 스승이 너무 많다.
오늘은 사이판의 슬픈 밤이다. 큰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내일 새벽에 먼저 출국하기 때문이다. 3주 동안 한 교실에서 정이 많이 들었는지, 아이들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주야, 안녕? 수민이야. 네 편지 읽고 너무 감동받아서 울었어. 나랑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는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 편지를 준 친구가 없었는데…… 예쁜 편지지보다는 마음이 훨씬 중요하니까 편지지는 괜찮아. 사이판에 있으면서 네가 있었기에 잘 생활할 수 있었어. 한국에 잘 돌아가 있을게! 남은 여행 잘 마치고 한국 오면 또 만나자.>
아이들은 단기간에 불꽃처럼 친해졌다. 그리고 이별조차 눈물겹게 따스하다.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작별 인사를 끝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멋지고 건강하게 손을 흔들었다.
사이판의 마지막 스승 수민이. 한국에서 또 보자.
*소소한 TIP
한국에서 예쁜 엽서 몇 장을 준비해 주세요. 반 친구들, 선생님 등 마음을 전해야 할 순간들이 종종 있답니다. 한국의 엽서가 그들에겐 특별한 기념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