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되어가려는 찰나
“준혁아, 프런트 가서 새 수건으로 바꿔 올래? 그리고 쓰레기통에 끼울 비닐도 한 장만 가져다줘.”
이젠 심부름을 즐기는 아이들. 식은 죽 먹기라는 아이의 표정에 주말 아침이 편안해진다. 아이는 위풍당당하게 다 쓴 수건을 끌어안고 프런트로 향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프런트에 아무도 없어요.”
당장 쓸 수건이 없어 아이를 데리고 프런트로 내려갔다. 직원은 마침 외부 일을 마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는 수북한 수건 더미를 프런트에 올려놓고는 교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새 수건을 가져온 직원에게 휴지통에 쓸 비닐도 한 장 부탁했다. 직원은 작은 미소와 함께 비닐을 꺼내주었다.
“Your English is very good.”
직원의 칭찬 한마디에 아이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이런 칭찬을 받기 위해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심부름은 내가 하겠다.”며 실랑이를 벌이곤 한다. 이런 다툼이라면 엄마도 백번 천 번 눈감아줄 수 있다. 사이판에 온 초기에는 쭈뼛쭈뼛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서로 영어로 말해보겠다며 옥신각신이다.
아침 9시에도 뜨거운 햇볕은 사이판 공기를 달구었다. 주말이라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30여 분을 달려 만세 절벽에 도착했다. 별을 보러 왔던 곳이 낮에는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한국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이유, 그 슬픈 장소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day 4 참조)
제일 먼저 한국인 위령 평화탑 앞에 주차했다. 아이들은 시키지 않아도 탑 앞에 서서 묵념을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안타까운 영혼에 예를 다하는 것이다.
“엄마 저 탑 꼭대기에 있는 비둘기는 우리나라를 보고 있대요.”
회색의 비둘기는 북서쪽의 대한민국을 향해 날갯짓하고 있었다.
만세 절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놀이터가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고요한 놀이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청년이 마이크에 대고 필리핀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분위기나 멜로디로 보아 이별 노래인 듯했다. 필리핀 청년의 애타는 사랑 노래를 들으며 아이들은 타이어 위를 오가며 놀았다. 사이판은 온통 신나는 장소지만, 아이들은 유독 놀이터에 들어서면 얼굴이 더 환해진다.
아직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사이판에서의 두 번째 영화, ‘웡카’를 보러 영화관으로 향했다.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공장장으로 나오는 웡카 이야기다. 영화 티켓은 아이들 것만 두 장 끊었다. 이 재미있는 영화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 쓸쓸하게 집을 지킨 남편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건 거짓이고, 자막 없는 영화가 좀 부담스러웠다.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2시간 정도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들의 입에서 흥겨운 후기가 쏟아져 나왔다.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영화관에 방문하더니 이젠 티켓을 끊는 일, 팝콘을 사서 상영관을 찾아가는 일들을 척척 해냈다.
저녁을 먹으러 남편과 방문한 적 있는 태국음식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두 번째 하는 것들이 유독 많다. 지난번에 앉았던 자리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시켰다. 겪어본 일들이라 긴장감이 덜하고,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라 마음이 편안한 모양새다.
두 번 방문한 만세 절벽, 사이판에서의 두 편의 영화, 그리고 소고기 쌀국수를 두 번이나 먹은 숙소 근처 태국음식점.
많은 것들이 단 한 번이 아닌 것이 될 즈음 사이판 한 달 살기는 막바지를 향해간다. 아이들은 기억할까? 우리가 두 번이나 갔던 이 장소는 첫인상이 어땠는지, 두 번째 만남엔 어떤 모습이었는지. 익숙해질 만하니 이별이 성큼성큼 다가와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어떤 마트에 뭐가 파는지도 금세 떠올린다. 길치 엄마도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가는 장소가 몇 생겼다. 여러 날을 보낸 사이판의 일상이 점차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익숙해진 만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사이판에서 보낸 날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마지막이었을 공간들이 벌써 그리워진다.
#Tanapag Playground
*소소한 TIP
영화관 팝콘과 콜라가 좀 비싸요. 전자레인지용 팝콘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료를 미리 준비해 가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