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는 도시를 번영시킨다
도시의 수요, 잉여가치, 혁신의 역사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예술 및 과학의 발전을 이끈 것은 바로 늘어난 "수요"였다. 번성한 가톨릭 교회 및 상업으로 부를 이룬 상인(e.g. 메디치 가문)들은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화가들의 주요 고객이었다. 늘어난 주문으로 형성된 시장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와 혁신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대량생산까지는 아니었지만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당시의 작업은 많은 인력을 고용하여 공장과 유사한 분업 시스템을 보여주었다.
유럽에서 후추를 찾아 인도까지 가기 위한 항해기술 및 이를 위한 금융 시스템(보험, 대부업, 투자 등)이 발전한 이유도 후추 한 봉지를 집 한 채와 바꿀 정도의 높은 수요 덕분이었다. 이를 통해 은행, 무역회사, 민간 군사기업 등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수요는 혁신과 새로운 산업을 가져왔다.
잉여가치가 생겨나면 도시화는 진행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한 세트로 일어나는 이유도 산업화로 인해 늘어난 생산량은 잉여가치를 만들고 이는 도시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8-19세기에 영국,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유럽의 제국들이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소비할 시장이 식민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세기 서구 열강들은 동아시아에도 무력으로 개항을 요구해왔었다.
지리적으로 도시 내에서 잉여가치가 특히 집중되는 동네는 부촌이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런던의 부촌은 산업 잉여가치의 대부분을 흡수하는 자본가(젠트리(gentry)라 불림)들이 거주하는 동네였다. 하지만 자본가들뿐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도시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발생한 잉여가치의 도시 내 이동은 1964년에 Ruth Glass에 의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정의되었다. 한국의 도시들에서는 이러한 생산과 소비를 통한 잉여가치의 발생과 이동이 아파트 재개발을 통해 주로 일어나고 있다.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잉여가치가 발생해야 하는데 서비스업 및 금융업에 주로 기반하는 서구의 도시들과는 달리 한국의 도시들은 제조업이 아닌 경우에는 재개발에 상당수 의존한다. 이런 이유(잉여가치의 이동)로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아파트 재개발을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정의하고 있다.
70년대 이후에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소비시장은 세계 패권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5년 미국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화의 가치를 올리면서까지 일본의 고도성장 독주를 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자동차를 포함한 일본 제품들의 소비시장이 미국에 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에서 현재 미국이 중국에 맞서 고전하는 이유는 그만큼 달러를 소비하는 시장이 줄어들고 있고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정책의 파급력도 동시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에 주로 수출하는 한국을 예전처럼 컨트롤 하기가 더 어려워졌음을 의미한다. 우리로서는 경제면에서는 미국에 대한 협상력이 높아졌다고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보여지듯, 도시가 성장하거나 유지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잉여가치가 발생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생산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소비가 일어날 시장(수요)이다. 글로벌 생산시스템에서도 시장의 변화에 따라 세계 패권의 양상이 바뀌기도 한다. 요즘 미국이 대만에 특히 공을 들이는 이유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의 58% 점유율을 가지는 TSMC의 존재(삼성은 14%) 때문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현대의 도시재생사업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에 하나도 비교적 생산계획은 분명하게 세울 수 있어도 이를 소비할 수요의 대상이 불분명하거나 수요의 정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도시재생에 비교적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업을 유치하여 생산과 소비를 기업에 맡겨 잉여가치 발생을 민간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산업적 역량이 떨어지는 지역은 주거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수요 예측이 쉬운 관광객에 맞추어져 (지역주민들과의 마찰이 예상됨에도) 관광형 소비공간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