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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mlico May 17. 2022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던지는 울림

왜 사랑이 아닌 추앙인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카카오 40%라면 '나의 해방일지'80% 정도 되는 진한 다크함이 부담스럽다. 작가는 전작과 동일하게 대립되는 공간과 감정 사이를 매개하는 행위들에 집중한다. 나의 아저씨가 내력(자신)과 외력(주변인) 사이의 균형이었다면 나의 해방일지는 사회적 억압에서의 해방과 관계에서의 채움을 이야기한다.

나의 아저씨는 서울 도심의 업무공간에서 쇠퇴한 교외 동네를 대립시키며 지하철로 두 공간의 간극을 표현했다. 동훈과 지안이 내력과 외력의 무너질듯한 긴장 속에서 "통근"과 "식사"라는 행위로 서로의 간극을 줄여나가며 균형을 강화했듯이, 나의 해방일지는 서울 도심과 경기도 농촌지역이라는 대립적 시공간의 거리감을 통해 주류사회가 주는 편견 및 억압과 주변 공간에서 느끼는 정서적 소외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현대인 모두는 도시의 주류공간에서 고통받는 이방인들이다.


현대사회에서 해방은 현실의 인정에서 비롯된다. 서울과 지방,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용주와 직원, 임대임과 임차인, 부자와 가난한 자 등 세상은 대립되는 이원적 구조 안에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중간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해방은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억압과 밑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비롯되는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 현재의 나를 인정하고 "덜 고통받는 삶"(보통 우리는 행복이라 표현한다)을 사는 것이다.


결국 이 고민은 "나는 언제 해방되었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사논문에 구속되었을 때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속박은 또 다른 해방을 의미한다. 혼자가 되고 고독해졌을 때 내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굴레에 얽매이게 되면 이전의 굴레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의미가 궁금해졌을 때 나는 나를 바로 바라보게 된다. 내 주위의 세속적인 것들을 걷어내고 그 안에 나로서 존재하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내 안에 고통을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내가 느낀 해방이다. 그리고 해방은 또 다른 속박을 낳는다. 해방과 속박은 상대적인 관점의 얽힘이며 관계의 경계다.


물질은 빠르게 욕망을 채우지만 그만큼 빠르게 공허함의 깊은 웅덩이를 남기며 사라진다. 반면, 사람 간의 관계는 아주 느리게 애태우며 감정을 채우지만 마치 문신처럼 마음에 추억으로 남아 평생 각인된다. 물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이지만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고립이자 고통이다. 행복한 척하지 말고, 불행한 척도 하지 말자. 그저 정직하고 담담하게 부딪치자. 삶의 정답 말고 해방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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