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3(수)
오늘 내가 하고 싶은 것들 ─
집안 청소하기, 옷장 정리하기, 영하 10도에 알맞은 스타일링 정해보기, 주말에 손빨래했던 화이트 티셔츠들 스팀 하기, 요가하기, 앞머리 셀프 매직하기, 새로 산 OLD PARK 조그 팬츠 허리 내가 줄여보기 …
그리고 새로이 읽기를 적어보기.
오늘은 수요일.
나는 어젯밤 9시가 넘어서 연차 사용을 신청했다.
덕분에 생경스러운 일과를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에 즐거운 계획을 떠올리며, 한가한 오후에 여기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보고 있다.
밤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다.
이제는 11시, 자정까지 사무실에서 뭔가 하는 것도 낯설지도 않다.
그런데 어제부터 일이 집중이 안된다.
해야 하는 건 태산인데, 마음이 없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말지’ 라며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잔소리를 했건만, 몇 명 되지도 않는 팀원들은 여전히 ‘같이’ 사용하는 작업대를 어지러 놓았다.
이대로는 내일도 무기력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냥 연차를 올려버렸다.
부대표님에게 메시지를 했다.
저 내일은 좀 쉴게요. 연차 신청 올려뒀어요.
‘엄지 척’의 이모티콘으로 그가 반응했다.
나는 작업대를 치우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어딘가의 조직에서는 ‘막내’가 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이 자리에서, 이 시간에, 내가 궂은일을 자처하며 치우고 정리했다.
기프트 패키지 샘플 박스 디자인을 한다고 널브러져 있던 싸바리 박스들,
리본과 테이프,
제품 샘플들,
라벨들, 등등
수납함마다 라벨링을 하여, 그 통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도록 적어두었고, 의미 없이 널브러져 있던 출력한 종이들은 싹 다 버렸다.
그리고 이내 내 책상과 주변도 아주 깨끗이 정리했다.
내일도, 모레도 이 자리에 없을 사람처럼.
나아가고자 하는 성취의 과정에서 수반될 수 있는 2가지의 불편한 마음이 있다.
바로 불안과 권태이다.
불안은 건강하게 불편한 감정이다.
잘하고 싶고, 잘하고 있지만,
‘혹시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게 왜 안되지’라는 불확실함 속에서 비롯되는 깊은 고민을 수반한 상황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되지’라는 무수히 많은 방법들을 알아내기 위해 짱구를 굴려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게 뭐 어쩐다는 거지?’ 라며 결과에 도달했을 때를 상상하며, 과연 이 짓거리가 의미 있는 것인지 되짚어보기도 한다.
생각이 꽉 차버리면, 몸이 이어서 반응한다.
속이 뒤집히고,
술을 퍼마시고, 정신줄을 놓기도 한다.
권태는 무기력이다. 의욕을 상실한 상태다.
그냥 아무 생각도 아무 행동도 ‘하고 싶지 않다’ 라며 의지를 놓아버린 것이다.
이걸 ‘번아웃’이라고도 하지.
비슷한가 싶으면서도 그 깊은 속내는 이렇게 엄연히 다르다.
불안 속에서 작은 성취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루다 보면, 좋은 감정이 뒷따른다.
문제는, 불안이 가중되면, 권태가 짓눌러 버린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위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어제, 그 시간에.
잠깐 떨어져 있지 않으면, 수렁에 빠지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그곳에서, 그들로부터 잠시 물러나 혼자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처음에는 ‘새로이 일기’라는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일기’는 개인적이라는 폐쇄성과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성찰입니다.
‘읽기’는 ‘열린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하루를 다시 읽어 보는 과정을 통해 단정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하자로 생각이 모아지면서, ‘읽기’라는 제목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불편한 순간을 마주합니다.
저는 어디에 가서, 무언가를, 누구와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말해서도 안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쓰기를 합니다.
제가 거창하게도 작가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내가 여기서 글을 쓰는 까닭임을 소개를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려고 하지 않는 구석이 좋습니다.
저도 누군가를 굳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쓸 줄 안다는 것,
그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그 글을 누군가는 (내가 시작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놓치지 않고 읽어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백의 다수의 독자를 가진 작가들 부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입니다.
쓸 줄 아는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여기까지 읽고 있는 당신들에게.
어쩌면, 나에게 글을 쓴다는 건 해방이자 탈출입니다.
이로서 엉켜있던 마음과 감정을 정돈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경험하고 배워 알게 된 패션의 실용적 아름다움을 지식과 지혜로 나누는 것이 좋았습니다.
당신들이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정보로,
나의 사건 사고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끔은 끝없이 파고들던 나의 사유의 방식으로.
저는 ‘패션’이라는 속성으로 영글어진 사람입니다.
운이 좋게도 ‘촉’이 좋았습니다. 식스센스 급으로.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좋은 선택, 나쁜 선택 모두 ‘실‘보단 ‘득’로 제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새털 같은 경험과 배움이 의미 있게 기록되고 나눠지길 바랐나 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의 일과는 너무나 치열합니다.
연재를 걸어두고서도,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작가가 되기 일쑤지요.
언제나 내 폰의 메모장에,
손글씨로 쓰고 싶은 날엔, 늘 가방에 넣어 다니는 작은 수첩에 ‘뭔가’를 적습니다.
아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재료들입니다.
글자와 문장들이 수두룩하지만 선뜻 그걸 꺼낼 여유가 없는 건, 지금의 제 위치와 상황이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를 업로드하기 위해서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꽤 공을 들입니다.
이건 철저한 나에 대한 내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라며 현타가 오기도 합니다.
삶과 일, 그리고 취미 까지도, 그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해보니, 그랬습니다.
뭐 하나 허투루 하는 사람은 ‘다른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더라’ 라는 저의 고정관념을 깨부순 동료나 직원은 지금까지는 없었습니다.
오늘의 [새로이 읽기]는 주객이 전도된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즐거운 하루의 계획으로 시작한 것이 제목에 대한 각주로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전하고 싶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근사한 연재들 속에 계속 날짜를 놓치며, 저 스스로 갖는 죄책감 따위의 불편한 마음을 항변할 수 있는 페이지가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솔직한 자기 고백 같은 정의와 설명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길어졌습니다.
[새로이 읽기]는 연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목에 꺽쇠로 표기하여, 지금껏 설명한 글의 성격에 충실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지금의 우리 회사, 우리 브랜드들, 우리 대표와 부대표를 정말 사랑하는데요, 그들과 나누며 실천하는 십계명(?) 같은 것들 중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나를 하나의 ‘조형’으로 바라볼 줄 알고, 예술적으로 삶의 태도를 디자인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