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는 원래 1년짜리였습니다.
남들보다 늦은 졸업, 그리고 졸업 후 다녀온 1년간의 어학연수로 나는 군대를 다녀온 남자 동기들이 졸업할 무렵에야 겨우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미 좁아질 때로 좁아져버린 취업문은 졸업예정자나 금년 2월 졸업자가 아니면 이력서 자체를 넣을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어쩌다 이력서를 넣더라도 서류에서 광탈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쩌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오는 곳들 중에는 주 6일 근무는 물론이고 아르바이트하는 것보다 적은 연봉은 기본값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어떤 소규모의 외국계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와서 갔더니 사장님과 면접을 하고 두꺼운 종이사전 하나 던져주시며 영어번역시험과 영작시험을 1시간 넘게 보게 되었다. 면접만으로도 진 빠지는 일이었지만 그 후 영어번역, 영작시험은 당혹스러웠다. 다행히도 온 힘을 다해 작성해서 낸 결과가 합격했으니 출근하란 연락을 받았다.
영어시험만 1시간을 넘게 보고 들어간 곳이니 그 회사는 다 영어를 잘할 줄 알았다. 모든 직원이 이렇게 시험을 보고 뽑을 테니.
아.니.었.다.
말은 영국계라고 하면서 사장님을 제외하고는 전 직원이 영어를 쓰지 않았다. 1시간에 걸쳐 영어시험을 본 이유는 영어와 관련된 모든 업무는 그 자리에 올 사람이 해야 되니까~ 였다.
입사하고 나서 보니 그 자리는 그 작은 회사의 막내자리라 회사의 대표전화와 사장님 전화까지 받아야 하는 일종의 비서 겸 막내역할이 포함된 자리였다. 물론 원래 모집공고에 나와있던 본사와의 Communication일은 당연히 본래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출근 후 본래 내 업무 외 해야 할 일은 아래와 같았다.
1. 사장님은 아침에 조간을 5개를 보시고 오후 석간을 챙겨보신다. => (할 일: 아침에 일찍 출근하여 조간 5개를 사장님 출근하시기 전에 책상 위에 가지런히 배열해 놓습니다. 오후에 석간이 오면 그것도 사장님이 찾으시기 전에 바로 조용히 전달해 드리세요.)
2. 사장님은 아침에 홍삼차를 드시고 오후에 녹차를 드신다. => (할 일: 아침에 사장님 출근하시면 따끈하게 홍삼차를 타드리고, 오후에는 사장님께 따뜻하게 녹차를 내려 드립니다. 둘 다 티백 아니고 홍삼차와 녹차의 잔은 각기 달라요.)
3. 사장님은 눈이 아프시니 이메일을 지원해 드린다.=> (할 일: 사장님은 컴맹이심. 1) 사장님이 어제 퇴근하신 뒤부터 아침출근까지 쌓여있는 사장님 계정의 모든 이메일을 출력하고 2) 각 이메일을 순서대로 문서번호를 매기고 3) 책상 위에 순서대로 배열해 놓습니다. 4) 사장님이 출력된 이메일을 읽고 답장하실 건이라면 답장을 노트에 연필로 써서 주심 5) 그 노트의 손글씨를 컴퓨터에 타이핑한 다음 6) 출력해 오면 사장님이 그 메일을 다시 읽고 고치심 7) 이메일의 사안에 따라 읽고 고치고 타이핑하고 출력하고 다시 읽고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여(마음에 들 때까지) 이메일을 보내도록 합니다. 8) 물론 사장님께 출력해 드렸던 문서번호를 매겼던 이메일들은 모두 파일링해둡니다. 이것은 하루 종일 퇴근 전까지입니다.)
4. 본인전화, 회사의 대표번호전화를 모두 관리합니다. => (할 일: 본인전화, 회사 대표번호전화 모두 받고 나머지 분들의 전화도 부재중이거나 혹은 통화 중이면 모두 받아야 합니다. 물론 자리에 계시지만 전화 안 받으시면 눈치껏 다 받아요. 적당히 부재중이라고 둘러대는 센스도 필요합니다.)
5. 영어지원업무를 합니다.=> (할 일: 영어로 된 것은 누구의 일이든 무슨 일이든 다 하면 됩니다. 사장님 빼고는 영어 하시는 분 아무도 없어요.)
그 외에도 JD에는 절대 없는 정의되지 않는, 혹은 정의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막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배정되어 있었다. 1~3.3) 번까지 아침에 사장님 출근이전에 완료해 놓고 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출근시간은 남들보다 1시간 이상 빨라도 모든 준비를 하기에 빠듯할 수밖에 없었고 사장님의 이메일 수발(?)을 하루 종일 들다 보면 정작 나의 본 업무(원래 영국 본사와 하는 내 업무가 있었다)는 저녁때 몰아서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회사에서 거의 매일 12시간 이상 있다 보니 문 열고 들어와 문 닫고 나가는 것까지 내 일의 시작과 끝이었다.
입사한 지 1주일 되었을 때 그 회사의 넘버 2였던 이사님이 저녁에 본사에서 하는 전화회의가 있다고 남으라고 하셔서 남아있었다. 전화회의가 시작되고 본사에서 어떤 사람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 이사님이
"자. 이제 뭐라고 하는지 지금부터 통역해."
사회생활이 처음이었지만 그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1 주일 된 신입직원에게 내용도 전혀 모르는 회의에 갑자기 남으라고 해서 남았더니 통역을 하라니... 전문 통역사도 내용을 모르면 통역하기가 어려운데 도대체 여긴 뭐지?
그래도 난 그만둘 수 없었다. 여길 나가고 나면 이 나이에 나를 받아줄 곳이 정말 더 없을 것 같았다. 딱 1년만 버티자... 버텨보자... 이런 마음으로 견뎌냈다. 웃프게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야근으로 인해 주말은 집에서 잠만 자고 그러다 보니 그 쥐꼬리만 한 월급(세금 떼고 120만 원이 조금 안되었던 것 같다)이 그냥 쌓이게 되더라. ㅎㅎ
지금은 파파고만 돌려도 영어번역은 어느 정도 되기도 하고 챗GPT를 이용하면 한글 이메일을 영문으로 써주는 것쯤은 바로 되지만 그 시절엔 나의 영어능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부족하기도 했고 모르는 단어나 문장은 단어사전 하나하나 찾아가며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막내라는 이유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라는 이유로 모든 허드렛일부터 영어와 관련된 모든 일까지 다 하라고 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딱 1년을 채우고 사표를 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표를 내고 나면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사람들이 하기 시작한다. 그 지긋지긋했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만둘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당신이 그만둬~"라고 만류하는 분
"내가 먼저 그만두려고 했는데 왜 네가 먼저 선수치고 그래"라고 짜증 내는 어떤 분
"사실 당신이 있던 자리 1년마다 그만두는 게 8번째야"라고 실토한 분
뭐...뭐라고요?? 8번째요?? 그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그때서야 알았다. 다들 나처럼 그렇게 버티다가 1년만 채우고 그만두는 자리가 있다는 걸.... 그렇게 한 사람에게 빨대를 꽂고 일을 다 몰아버리니 누가 버틸 수 있었을까?
어쩌면 호구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서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
(왜 아니오인지는 다음글에서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