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는 고됐지만,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혹시 회사에서 사고 쳤대니?"
사표를 썼다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말씀을 전했더니 언니를 통해서 들려온 부모님의 반응이었다. 공무원으로 삶을 살아오신 성실함으로 무장한 부모님은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회사에서 잘렸다는 의미로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취업난이 너무 심각해서 그 시절 인기 시트콤에 "청년실업이 80만에 육박하는 이 시국에..."로 시작하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였으니 나의 사표는 이렇게 직장 잡기가 어려운 시절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남에 있었던 회사로 오전 8시 이전에 문을 열고 들어가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아침 6시 반에는 만원 버스에 올라야 했고 거의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퇴근을 하면 집에 가서는 기절하고 잠이 드는 게 나의 삶의 전부였다.
[영어@영어@영어]

영어시험을 1시간이나 보고 들어간 회사였고 영어실력만 보고 뽑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실상 나의 영어실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고 영어 때문에 취업이 어려웠던 나였다. 그리고 설령 언어가 되더라도 업무를 모르면 일이 되지 않는다.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는 업무도 모르는데 영어도 안되니까 외국에서 온 이메일 하나를 읽으려면 사전을 찾아가며 영어 뜻을 파악하고 그 한국어가 업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파악해야 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폰포비아]

내 직통번호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걸어오는 대표전화를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받아서 처리하는 것은 폰포비아를 만들어냈다. 사장님 전화나 혹은 다른 분들 전화는 "자리에 안 계시는데요"나 "잠시만요, 바꿔드릴게요"등으로 처리할 수 있는데 어쩌다 걸려오는 대표전화 중에서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남자직원 바꿔"라고 반말을 하는 등의 지금의 시각에서는 다소 충격적인 일이 다반사였다.
[막내업무의 정의: 어디까지 인가요?]

나의 JD 에는 내 업무의 영역이 영문으로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그와 상관없이 시키는 일은 그냥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장님 이메일 수발(앞의 글 참고) 및 오전/오후 차 대접부터 시작해서 사무실의 정수기 물통을 교체하는 것까지 윗분들이 하지 않는 모든 일이 나의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체구도 작고 힘도 제일 없는 나에게 덩치 좋고 힘 좋은 남/여 분들이 그 무거운 정수기통 바꾸는 일까지 나한테 시킨 건 좀 심했다 싶다.)
그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두어달 때쯤 지났을 때 분리되어 있던 관계사에 흡수돼서 들어가게 된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 때문에 나는 길 건너 모기업에 흡수되기 위해 회사의 이삿짐을 싸는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영어책 한 권 그리고 사장님의 이메일 수발
영어 자판만 겨우 익혀놓은 상태였던 나는 당연히 영어로 이메일을 어떻게 쓰는지 몰랐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영어로 편지도 써본 적이 없었고 회사에서 어떻게 영어를 쓰는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서점에서 내 수준에 맞는 Business English 책 한 권을 사서 끼고 살았다. 사장님은 컴퓨터는 못하셔도 영어는 잘하는 분이었다. 사장님의 알아보기 어려운 손글씨 영어답변을 타이핑하면서 나도 모르게 지속적으로 영어로 된 이메일을 읽고 쓰고 어떻게 답변하는지를 터득하게 했다. 한두 달 지나고 나니 사장님의 손글씨를 알아보는 능력치도 오르고 영어 타자속도도 빨라졌다.
전화 울리면 받는 거지 뭐
뭐든 막내에게 몰아주시는 살뜰한 조직환경으로 인해서 나는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다짜고짜 전화해서 "남자 바꿔"하는 사람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현재 남자분들은 외근 가셔서 사무실에는 여자직원들밖에 없는데요, 대리님 바꿔드릴까요?"라고 친절하게 답변하는 전화상담원이 되어있었다.
사무실 이사로 인한 변화들
사무실 이사를 위해서는 누구도 관리하지 않았던 창고정리부터 쌓여있는 모든 서류정리까지 완료해야만 했다.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업무를 알아야 분류가 가능하다. 처음엔 보이지 않고 외계어처럼 보이던 것들이 보고 또 보다 보니 눈에 익기 시작했고 정리와 분류는 전임자가 쌓아놓았던 서류뭉치 박스들부터 시작해서 내 컴퓨터의 폴더정리까지 이르게 되었다. 관계사(모기업)로 흡수되는 과정은 이사를 한 뒤에도 몇 달이 더 걸렸지만 한 사무실 안에서 사장님은 더 이상 사장님이 아닌 부서장 같은 역할이 되면서 모기업의 눈치가 보여 아침/점심 차대접 같은 일부터 없어졌다. 정수기 물통은... 모기업에 흡수된 이후에 물통이 없는 정수기였다.
비밀은 오래가지 않는다
사무실을 이사한 다음 가장 큰 변화는 사장님을 포함해서 모든 윗분들이 모기업분들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컴퓨터를 못하시는 것이 모기에는 비밀이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장님 책상에 쓰지도 않는 노트북을 올려놓았다. 여전히 이메일 수발은 계속되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티 안 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메일 수발이 계속되는 한 나의 출근시간은 남들보다 여전히 1시간 이상 빨랐는데 막내만 1시간씩 일찍 출근하고 나머지 모든 직원이 9시에 겨우 출근하는 것이 모기업 직원들에겐 다소 이상했던 모양이다.
모기업의 직원들은 높은 분들이 일찍 출근하고 나 같은 주니어들은 9시에 출근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일찍 나와도 항상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 막내가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차기 대표라고 알려졌던 이사님이 아침마다 이미 나와서 일하고 있는 나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님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사장님과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이 영어 전혀 못하는 것. 내 업무영역과 무관한 수많은 업무를 막내 한 사람이 오롯이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모기업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빨리 알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 본사에서 공지가 내려왔다. 영국 본사에서 내부 규정을 바꿔 기존의 한국 내에서 한국어로 보고서를 만들고 사장님 결제로 통과되던 절차를 영문보고서로 써서 본사에 승인을 받도록 절차를 강화했다. 그동안 보고서를 한글로 써오던 모든 분들이 나만 바라봤다.
"한글로 쓰면 니가 영어로 바꿔줘."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장님과 면담을 신청했고 이 상황을 말씀드렸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회사에 정직원뿐 아니라 전문직으로 계약건수에 따라서 보수를 받는 분들도 계셨는데 사장님은 내가 번역을 하면 그 전문직들에게 번역비를 청구해서 받으시겠다 했다. 월급 120만 원 남짓 받고 하루 12시간씩 일하는데 이제는 남들의 보고서를 영문화하는 일까지 해서 회사에 수익을 올리는 일까지 하라는 말씀이셨다.
딱 1년만 버티겠다고 마음먹고 1년이 다되어가는 시점에 어쩌면 이렇게 사표를 쓸 수밖에 없게 하시는지... 나는 그렇게 1년만 버티고 관두는 자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회사에는 몸이 힘들어 그만둔다고 그만두고 좀 쉴 예정이라고 다 죽어가는 얼굴로 최대한 불쌍하게 포장해서 얘기했다. 그때서야 공무원시험을 볼 거라고 퇴사사유를 밝혔던 나의 전임자가 왜 몇 달 뒤에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았다.
퇴사의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후임자가 와서 완벽하게 업무를 하기 전까지는 못 그만둔다고 으름장을 놓길래 해외로 간다고 비행기 일정을 잡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제야 부랴부랴 후임자를 뽑았고 인수인계가 부족하면 안 된다고 해서 토요일에도 출근해서 인수인계를 했다.
마지막 근무일에 6시에 정퇴 하려는 나를 보며 후임자가 이메일하나만 써주고 가면 안 되냐는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아 휘리릭 영어로 이메일을 써주고 나왔다.
나는 그렇게 1년 동안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