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함과 순수함의 차이?
어릴 때 언니가 나한테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동생아. 난 니가 앞으로 어른이 되어서 더 이상 순진하지 않게 되더라도 순수함은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난 그때 그 얘기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순진한 것과 순수한 것의 차이를 잘 몰랐던 어린 시절에도 언니가 하는 그 얘기가 뭔가 의미 있는 말이었다는 것은 기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변하지 않기를 원하는구나... 근데 지금이 좋다는 건가??? 무슨 얘기지...? 싶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누구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사회 초년생 시절은 사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내가 시작한 사회생활, 소위 서비스업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인더스트리의 환경에서는 사과부터 하고 시작하는 것이 무슨 습관처럼 배기 시작했다. 특히나 고객 앞 최전선에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고객의 심경과 그분들의 기분까지 맞춰드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도 부지기수였기 때문에 (그때는 그랬다. 손님은 왕이라는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갑질이란 말도 생성되기 이전의 갑/을 문화는 겪어본 사람들만 안다), 어떤 고객이 진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를 낮추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기도 했다.
https://www.seoul.co.kr/news/editOpinion/weft-column/2018/04/17/20180417031015
"전화 늦게 받아서 죄송합니다...xxx팀 xxx입니다" (3번 울리고 받았음)
"아침 일찍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출근시간 이후임)
"바쁘신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바쁜지 어찌 암?)
뭐... 이런 종류의 죄송합니다가 공손한 인사말처럼 사용되다 보니 혹시라도 뭔가 고객의 기분을 그르칠 것 같은 상황이 있거나 혹은 진짜 불편함이 초래되기라도 하면 마치 대역죄인인양 진심을 담아서 영혼 없이 하는 사과가 일상이 되기도 했다.
매직워드 SORRY
예전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sorry라고 얘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매직워드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과하던 상황의 대부분은 사람의 잘못은 거의 없었고 그 조직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또는 그 상황이 상대방의 기분을 불편하게 한 경우가 많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통해 상대의 양해를 이끌어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어차피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으니 그게 가능하다고 학습해 왔던 것 같다.
사실, 많은 경우에 잘못한 당사자인지 아닌지 여부와 상관없이 사과하는 사람에게 계속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십수 년 동안 나는 그런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그 학습과 나의 적시의 사과가 어쩌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은 동일 직종임에도 일하는 업무가 바뀌는 이직을 하고 나서부터다.
같은 업계로 이직을 했고 업무가 고객을 대면하는 경우가 확연히 줄어든 포지션에 놓이고 보니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지어 본인이 잘못한 경우에도, 본인이 당사자라고 해도 사과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사자가 아닌 경우 사과는 더더욱 볼 수 없다. 그냥 그저 그 일이 발생된 연유를 아주 건조하게 또는 마치 제삼자의 언어처럼 설명할 뿐이다. 상대방도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다. 물론 속으로는 화가 날지라도 대놓고 화를 쏟아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는 사과로 인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아마도 사과를 하는 순간 그 잘못이 나에게 있다고 인정하며 책임소재와 연결되기 때문인 것 같다.
상대방이 고객이 아니니 소위 갑질을 당할 가능성이 적고 내부 직원들끼리 잘못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이제 습관적 사과는 하지 않는다. 인사말처럼 하던 "죄송합니다만..."은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끔 자동으로 "죄송한데요"가 튀어나올 때가 있지만 보통의 일상에서 나는 점점 사과가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사과가 줄어든 나는 순진함은 줄었지만 순수함은 유지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