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텅장 이모, 지금은 쏘고 싶은 이모
대학을 졸업한 뒤 어학연수를 위해 캐나다로 떠난 뒤 몇 달 후 내 인생 첫 조카가 태어났다. 1년여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했을 때 옹알이를 하고 있는 생후 8개월의 조카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직업란에 쓸 수 있는 단어가 없는 무직상태였다. 그때만 해도 취준생이란 말이 나오기 전이었으니 그냥 백수라고 시집이나 가란 주변 으른들의 잔소리가 흔했고 실제로 "취집"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한국에 돌아왔다는 기쁨은 잠시, 시간이 갈수록 빨리 취직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어디든 이력서를 넣어댔고 수십 군데 이력서를 내고 나서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면접이 잡히곤 했다.
주 5일 근무,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의 회사, 그리고 월급이 밀리지 않는 곳
아마도 이 세 가지가 내가 첫 직장을 구할 때 생각했던 조건이었던 것 같다. 지방출신에 SKY가 아닌 대학을 나와 남들보다 졸업도 늦었는데 졸업 후 영어공부한다고 어학연수도 다녀왔으니 나이도 많다. 그러니 나 스스로도 마음이 급해지고 어디든 받아주는 곳이 있다면 일해야겠단 생각이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가게 된 곳은 그래도 20년이 더 지났음에도 존재하는 어느 외국계회사였다. 본사가 나름 영국에 있는 외국계라고 강남의 어떤 빌딩에 있었는데, 세금을 제하고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에 비해 강남 물가가 너무 비싸서 점심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야 했던 기억이 난다.
취직을 했음에도 옷을 살 엄두도 나지 않아 학교 다닐 때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회사를 다녔다. 품위유지는 무슨... 교통비, 밥값 같은 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거의 남는 돈이 없었다.
내 삶의 비타민 같았던 나의 조카는 회사생활이 힘들면 언제든 달려가 물고 빨고 하면서 사랑했던 기억이 난다. 언니가 근처에 가까운 곳에 살았던 덕에 퇴근 후에도 가끔 조카얼굴 보고 나면 눈물 날 것 같은 회사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1년 정도 그렇게 강남에 있는 회사를 다니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겠다 싶어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그 이후 완전히 다른 영역의 회사에 얻어걸려 면접을 본 다음 그렇게 그 회사를 십수 년을 다녔다. 그러는 사이 내 사랑 첫 조카는 무럭무럭 자랐고 언니는 조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무렵에 외국행을 택했다.
시간이 흘러 남동생이 결혼을 했고 너무너무 감사하게도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두 명이나 태어났다. 사랑둥이 조카들은 서울하늘 아래 살고 있기도 하고 이모가 없어서, 조카들에게 고모는 반가운 사람이다. 고모가 되었을 때 나는 해외에 있어 그동안 첫 조카에게 못했던 것들을 마구마구 해주고 싶었다. 코로나 시국애 택배가 집에 도착하면 당연히 고모가 보낸 걸로 알았던 걸 보면ㅎㅎ
어느 순간 첫 조카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힘들 때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에너지와 기쁨을 주었던 사랑하는 내 첫 조카에게 그때는 내 주머니사정이 좋지 않아서 뭘 해주지 못했다. 내 입에 풀칠도 하기 버거웠던 시절이라서...
지금 그 조카는 이미 건장한 성인이 되어 군대를 갈 나이인데, 다 큰 성인을 내가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스럽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곧 조카가 한국에 온다고 한다. 리치이모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이번에 한국에 오면 리치이모가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