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걸음 Apr 07. 2021

#4 나만 멈춘 듯한 스무 살

당일치기 졸업여행, 강화도

나만 멈춘 듯한 스무 살


갑자기 친구가 뮤지컬을 하고 싶고,

시도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열변하는 목소리에

기분 좋은 기운이 가득 어렸고, 함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소한 감정이 어른거렸습니다.



빨간색 시외버스를 타고 학창시절 내내 가장 친했던 친구와 함께 졸업여행을 떠났습니다. 지도를 펼쳐 가장 가까운 바다처럼 보이는 강화도로 행선지를 정했지만, 정작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그마치 50개나 넘는 정류장이 이어졌고, 버스로만 3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사라졌고, 낯선 논과 밭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 좁은 좌석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엉덩이도 아파왔지만, 멀리 떠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점점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가방도 무거운 문제집 하나 없이 홀가분했습니다. 간혹 비포장 도로라도 만날 때면 차체가 심하게 덜컹거렸습니다. 도로의 모양에 따라 함께 몸도 좌우로 흔들리다 보면 지칠 법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보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개는중학교 때 집을 걸어오며 컵 떡볶이를 사 먹다가 옷에 홀라당 쏟은 기억, 얼마 전 집 앞에 만든 커다란 눈사람에 모자를 씌워줄 걸 했다는 실없는 소리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뮤지컬을 하고 싶고,
시도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긴 시간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에 화들짝 놀라 입이 떡 벌어졌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전공을 고르기 위해 취미부터 관심사,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할 때조차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친구는 불과 며칠 후 법학과로 진학할 예정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친구는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지었고,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아직 부모님께도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오래 전부터 꼭 해보고 싶은 꿈이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확신이 들지도 않고, 그 분야로 가기에 아직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다른 과로 진학하지만, 뮤지컬 관련 업계에서 아르바이트나 동아리를 먼저 해보며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요. 그 말을 하는 친구의 두 눈이 반짝였습니다. 때마침 오후를 향해 가는 햇살이 창가를 따스하게 비췄고, 친구 얼굴에 점점 환한 빛이 들었습니다.  밝아지는 표정을 보니 덩달아 가슴이 설렜습니다. 뮤지컬을 좋아하게 된 계기와 하고 싶은 이유들을 이야기를 하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뻤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때 꿈을 적어 내 듯 순수함 가득한 말들이 몽글몽글 퍼져 나왔습니다.


학창시절 내내 같은 동네에 살고, 중학교 입학식부터 고등학교 졸업식까지 같이한 친구였습니다. 매일같이 만났고,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집에 갈 때면 아무도 없는 대로변에서 무서움을 쫓기 위해 목청껏 같이 노래 부르고는 했습니다. 좋은 성적이 나와 세상 다 가진 듯이 기쁠 때도, 뒤늦은 사춘기로 괴로워할 때도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친구의 행복은 당연히 우리의 행복이었습니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열변하는 목소리에 기분 좋은 기운이 가득 어렸고, 함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소한 감정이 어른거렸습니다.


익숙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낯선 미래를 찾은 것 같습니다. 신나서 이야기하는 친구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가 생소했고, 모르는 분야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조금씩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그제야 실감났습니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 조금씩 달라질 겁니다. 창 밖에 펼쳐지는 낯선 풍경만큼 경험하지 못했던 미래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었습니다.


먼 길을 달리고 달려, 빨간 버스에서 내리자 새파란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끼룩끼룩 거리는 갈매기에게 과자를 던져 주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달려드는 새 때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배를 기다리다 파도에 신발이 몽땅 젖자 비명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왔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편의점에 들어가 따뜻한 두유를 손에 쥐고, 행복하게 먹구름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둘이라고 믿을 수 없이 시끄럽게 섬 방방곳곳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간혹 눈에 띄는 문화 유적 앞에서 따끈따끈한 수능 지식들로 괜히 아는 척 해보고, 서로 놀리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시험 끝난 날 함께 놀러간 자유로운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해가 지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던 귀갓길. 친구는 희미한 미소를 띄고 창가에 기대 잠들었습니다. 보기만해도 흐뭇한 표정인 친구 옆에서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고, 웃기게 나온 사진을 정리하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고개를 돌려 깜깜해진 창 밖을 보자 막막한 생각이 물밀 듯 들어왔습니다. 친구와 달리 하고 싶거나 해보고 싶은 일이 없었습니다. 당장 생각해도 떠오르는 일 하나 없었고, 아무리 고민해도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똑같이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또 아픈 시간을 보냈는데 혼자 만 준비되지 않은기분에 답답했습니다. 누군가 설레는 미래를 준비하며 앞을 볼 때, 그대로 멈춰서 땅만 보고 있었나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버스는 어두운 밤에도 좌우로 흔들렸고, 괜스레 멀미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 더욱더 다채로운 꿈들과 모양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말씨부터 시작해 나이, 관심사, 하고 싶은 것 모두 천차만별이었고,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타났습니다.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 응급실까지 다녀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UN에서 일하는 게 목표라며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동기도 있었습니다. 밴드를 하거나 연애에 푹 빠져 지내는 친구들, 토론 대회를 나간다며 준비하는 선배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일상을 채워 나가며, 본인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보는 것 만으로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한 편으로 부러웠습니다.


친구들과 새로운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고, 한강에서 돗자 리를 펴고 치킨을 시켜 먹으면서, 중간고사에 치이고 벚꽃 구경을 하면서 즐거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습니다. 무엇을 마주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좀처럼 가슴 설레거나 푹 빠질 일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삶을 만끽할 때 혼자만 여전히 과거 고민에 멈춰 있는 듯 했습니다. 결국 매일 같이 학교를 가고, 학원 아르바이트를 다니는 뻔한 일상이었습니다. 굳이 색으로 비유하자면 까만 색 같았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색깔이 생기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멈춘 시간을 보내는 법을 몰랐습니다.


*** 브런치 독자분들을 위한 글

- 1년도 넘게 적은 글들을 매주 한차례씩 전달드립니다.

 - 한 주를 또 치열하게 살아냈을 매주 토요일 밤, 지나온 발자취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

 - 여러분의 삶에 자그마한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의 이전글 #3 왜 살아야하는 걸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