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은 우연의 얼굴을 한 필연이다

필연과 우연, 그리고 인연이 엮어내는 서사

by MingDu

새벽. 창문으로 은은한 도시의 불빛이 번져든다. 고요한 공기에 잠기면, 늘 그렇듯 '필연'이라는 단어가 마음 한가운데를 건드린다.

만약 모든 것이 완벽한 계산이었다면 어땠을까? 우주의 탄생 이후 한 번도 삐끗하지 않고, 모든 것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 흘러왔다면. 내가 지금 이 문장을 쓰는 손끝마저 먼 과거에 예약된 움직이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상상은 허무보다 다정한 쓸쓸함을 데려온다.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겪는 갈등과 회한, 짧은 기쁨들을 더욱 반짝이게 해 주는 것 같다. 필연이라는 강물이 거세게 흐른다 한들, 그 물 위에서 손끝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내 것인 듯 느껴지니까.


결정론이 말하듯 모든 사건이 한 줄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단지 이미 적힌 악보를 연주하는 악사일까. 악보를 바꾸지 못한다는 깨달음은 처음엔 무력감을 불러오지만, 곧 이상한 평정을 건네준다. 연주자는 곡의 방향을 틀 수 없지만, 한 음을 어떻게 호흡하고 눌러낼지는 여전히 자신의 몫이다. 같은 선율이라도 연주자의 손끝이 바뀌면 온기가 달라진다. 필연 속에서도 저마다의 온도를 남기는 일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셈이다.


여기에 운명론이 던지는 그늘이 겹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같은 종착역이라면 애써 고민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지만 종착만으로는 인생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완만한 곡선을 타고, 누군가는 숨이 턱에 찰 만큼 가파른 비탈을 올라 같은 곳에 도착한다. 두 여정은 다른 기억과 다른 흉터를 남기고, 그 흔적이 또 다른 선택을 밀어낸다. 결국 운명론이 예상하는 단일한 마지막 장면조차, 수만 가지 우연이 모여 빚은 한 장면일지 모른다.


필연과 우연은 그렇게 서로를 보완한다. 물리 법칙이 빼곡히 짠 그물 속에서도, 작은 불확정성은 언제든 고리를 비틀어 새로운 실마리를 만든다.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균열은, 거대한 질서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여백 같다. 정교하게 계산된 궤도라도 먼지 한 입자, 맥박 한 번, 숨결 한 모금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곡선이 된다. 그 변주 덕분에 세계는 완전히 예측 가능한 기계음이 아니라, 끝까지 귀 기울이게 만드는 낯선 리듬을 품는다.


그 리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인연이다. 인연은 거창한 운명적 회오리라기보다, 예측 불가한 미세한 진동이 두 생을 나란히 흔드는 순간에 가깝다. 버스에서 우연히 맞은 옆자리, 퇴근길 신호등 앞에 멈춘 몇 초, 무심코 던진 농담 하나가 남의 마음을 비틀어 놓는 그 짧은 떨림. 뒤돌아보면 그 미묘한 갈지자 행보가 결국 내 삶의 결을 바꾸어 놓았다. 인연은 필연의 큰 흐름 위에서 우연이 만드는 작은 소용돌이이고, 그 소용돌이가 또 다른 필연의 물길을 열어 준다.


그래서 누군가와 얽힌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만남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의 시간에 길게 스며든다. 어떤 인연은 오래된 책갈피처럼 조용히 눌어붙어 있다가, 불쑥 다시 펼쳤을 때 향기를 터뜨린다. 또 어떤 인연은 기대지 않았던 방향으로 뜻밖의 문을 열어젖힌다. 그렇게 섬세한 실들이 겹겹이 쌓여,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의 토대를 만든다.


결국 결정론이든 운명론이든, 필연이든 우연이든, 우리는 매 순간 그 이름을 달리하며 같은 풍경을 지나간다. 완벽히 짜인 기계음 속에서도 사람의 호흡은 제각기 다르고, 예측 불가한 날숨들이 모여 합창을 이룬다. 종착역이 정해져 있어도, 그곳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갈라지고 다시 만난다. 우리의 몫은 그 갈래에서 머뭇거리고, 때로는 과감히 걸음을 내딛으며, 각자의 리듬을 끝까지 태우는 일이다.


언젠가 맨 마지막 장면이 찾아오면, 그것 역시 어딘가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장면을 향해 가는 동안 우리가 남긴 숨결, 흔들림, 그리고 서로의 삶에 남긴 작은 파장은 누구도 미리 써 두지 못한다. 정해진 악보를 연주하더라도, 음 하나하나를 가장 나다운 떨림으로 눌러낼 때, 그 곡은 더 이상 들려주기만 하는 음악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울리는 삶이 된다. 필연 속에서 우연을 발견하고, 우연 속에서 인연을 건져 올리는 일—그 고요한 수고가 우리를 끝까지 인간으로 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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