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서늘한 냉기. 분명 아까와 똑같은 온도였지만, 더 이상 그 차가움이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지는 못했다.
창밖의 풍경은 여전했다. 회색 구름은 여전히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빗줄기는 세상을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달라져 있었다. 아까는 저 비가 나를 덮치려는 거대한 해일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그저 수억 개의 물방울들이 제각기 땅을 향해 달리는 거대한 마라톤처럼 보였다.
'그래, 쏟아질 거면 쏟아져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내가 막을 수 없는 비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두 가지뿐이다. 비를 맞으며 걷거나, 아니면 잠시 처마 밑에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빗소리를 감상하거나.
지금까지 나는 멍청하게도 제3의 선택지를 찾고 있었다. 맨몸으로 비에 맞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거나, 비가 내리는 하늘 자체를 원망하며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 그것이 나를 갉아먹던 고통의 근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내 몫의 성실한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뿐이다.'
그 단순한 진리를 인정하자, 놀랍게도 어깨를 짓누르던 천근만근의 무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숨통이 트인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폐부 깊숙한 곳까지 막혀 있던 공기가 시원하게 순환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내 날숨에 섞여 묵은 불안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내 귓가에 속삭이던 불청객, ‘죄책감’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녀석은 내가 내면의 질서를 되찾은 순간 발붙일 곳을 잃고 증발해 버린 듯했다. 텅 빈 의자에는 녀석이 남긴 눅눅한 습기 대신, 평온한 공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달그락."
그때, 맑은 파열음이 정적을 깼다. 창가 쪽의 노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냅킴으로 입가를 가볍게 훔치고, 코트의 단추를 하나씩, 아주 천천히 잠갔다. 비가 온다고 서두르거나, 날씨를 탓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이 비와의 짧은 데이트를 만족스럽게 끝낸 사람처럼.
그가 짐을 챙겨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엉겹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냅킨 감사합니다. 덕분에 옷을 버리지 않았군요.”
그는 아까 내가 건넨 냅킨을 기억하고,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유유히 카페 출입구로 향했다. 나는 홀린 듯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유리문을 밀고 나간 그는, 카페 처마 밑에서 잠시 멈춰 섰다. 밖은 여전히 재난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도망치듯 뛸 타이밍이었다.
'촤악-'
하지만 그는 우아하게 검은 우산을 펼쳐 들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야 할 적군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길동무로 여기는 듯했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그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