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실의 정원, 1장
세상의 모든 시작이 움트는 곳, 시간조차 느릿하게 하품하며 쉬어가는 구름 너머의 정원. 그곳에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복숭아꽃 향기와 은은한 쑥 내음이 안개처럼 감돌았다. 이곳의 주인인 삼신(三神) 할머니는 오늘도 쭈글쭈글하지만 기운 넘치는 손으로 갓 피어난 생명을 점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할머니가 앉은 평상 곁에는 뽀얀 얼굴을 한 어린 아이 하나가 턱을 괴고 엎드려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할머니의 손놀림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마법처럼 비쳤다. 할머니가 허공에서 손을 크게 휘저을 때마다, 눈부시게 하얀 생명의 빛무리와 함께 가느다란 붉은 실타래가 끝도 없이 술술 풀려나왔기 때문이다.
정원 바닥은 이미 수천, 수만 개의 붉은 실들이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어떤 실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긴장감이 감돌았고, 어떤 실은 봄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처럼 느슨하게 풀려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으아, 정말 많다."
아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발치에 흘러가는 붉은 실 한 가닥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실은 아주 얇았지만, 손끝에 닿자마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콩닥콩닥하는 미세한 맥박이 느껴졌다.
"할머니, 이 붉은 실들은 도대체 다 뭐예요? 그냥 아기들한테 생명만 훅 불어넣어 주시면 되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엉키기 쉬운 실들을 일일이 묶으시는 거예요?"
할머니는 돋보기 너머로 아이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갓 태어날 아기의 운명을 엮고 있었다.
"이건 그냥 실이 아니란다. 사람의 인연(因緣)이지. 그것도 아주 질기고 붉은 마음의 끈이란다."
"인연이요? 친구 같은 거요?"
"친구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지만... 이건 그보다 더 깊은 약속이야. 사람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새끼손가락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 붉은 실을 묶어 둔단다. 그리고 그 실의 반대편 끝은, 그 아이가 평생을 걸쳐 찾아헤매고, 사랑하고, 결국엔 아껴주어야 할 또 다른 누군가의 손가락에 단단히 연결해 두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밑으로 끝없이 펼쳐진 실타래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구름 밑 인간 세상은 여기서 보기엔 점처럼 작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넓고 복잡한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오가고, 수천 갈래의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아이의 눈에는 이 실들이 금방이라도 엉켜버려 엉망진창이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
아이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세상은 너무 넓잖아요. 사람도 엄청 많고요. 만약 실이 묶인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나서 좋아해 버리면 어떡해요? 가다가 길이 엇갈려서, 지구 반대편 같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면요? 이 실이 너무 얇아서 가다가 툭 끊어지거나, 꼬여서 못 풀게 되면 어떡하죠?"
아이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감긴 실이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봐 두려운 듯, 보이지 않는 실을 만지작거렸다.
할머니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아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칠지만 따뜻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세상의 이치를 담은 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말거라, 아가. 네가 보는 그 실은 약해 보여도 세상 그 어떤 칼날보다 강하단다."
할머니는 바닥에 흐르는 붉은 실 하나를 검지로 살짝 들어 올렸다. 실은 아주 길게 늘어났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탄력 있게 빛났다.
"이 붉은 실은 가위로도 자를 수 없고, 모진 세월의 칼날로도 끊을 수 없단다. 때로는 사람이 어리석어서 엉뚱한 길로 들어서 헤매기도 하겠지. 자기 짝이 아닌 사람에게 마음을 다 주며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할 게다. 실이 너무 길어서 서로가 연결된 줄도 까맣게 모르고, 아주 먼 길을 빙빙 돌아가기도 하겠지."
할머니의 시선이 저 아래 까마득한 지상, 이제 막 태어나 힘차게 울음을 터뜨리는 한 아기와, 그보다 훨씬 먼 곳에서 자라고 있는 또 다른 아이를 번갈아 향했다. 두 아이의 새끼손가락에서는 가느다란 붉은 빛이 뻗어 나와 허공에서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할머니가 붉은 실의 양 끝을 살짝 당기자, 팽팽해진 실이 기분 좋은 진동을 울리며 맑은 퉁소 소리를 냈다.
"이 실은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며 그들을 이끈단다. 서로 멀어지면 당겨주고, 너무 가까워지면 잠시 늦춰주면서 말이야. 그러니 아무리 먼 길을 돌아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결국은 다 만나게 되어 있단다."
아이는 그제야 안심한 듯 배시시 웃었다.
"정말요? 길을 완전히 잃어버려도요?"
"그럼. 실이 조금 늘어날 순 있어도, 그 끝은 반드시 제 주인을 찾아가는 법이야. 그게 내가 정한 운명이고, 하늘이 내린 약속이니까."
할머니는 다시 흥겨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로운 매듭을 묶었다. 단단하고 야무진 붉은 매듭 하나가 유성처럼 꼬리를 그리며 지상으로 내려갔다.
먼 훗날, 서로를 알아보게 될 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두근거리는 소리가 이곳 정원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붉은 실은 절대 엉키는 법이 없었다. 다만, 가장 완벽하고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