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회색 도시

붉은 실의 정원. 제2장

by MingDu


비는 언제나 그랬듯, 배려 없이 시작됐다.

강도현은 카페 유리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이미 충분히 젖어 있었다. 회색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빗방울은 마치 결론이 정해진 문장처럼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 안 가져왔어?”


등 뒤에서 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감정이 잘 절제된 목소리였다. 도현은 그 톤을 알고 있었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대화를 마무리 할 때, 더 말해봤자 의미 없다고 판단했을 때 수아가 내는 소리였다.


“응”


짧게 대답했다. 우산이 없다는 사실보다, 그 질문 자체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 비 맞고 가야겠네.”


수아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있던 컵을 정리했다. 도현은 무심코 그 장면을 지켜봤다. 컵의 손잡이를 컵받침과 정확히 맞추는 습관. 종이 냅킨을 반으로 접어 컵 아래에 다시 깔아두는 행동.


사소했다.
그래서 더 잘 기억났다.

카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따뜻한 공기와 커피 냄새가 한순간에 차단됐다. 빗물이 코트 위로 떨어지며 어깨를 적셨다. 천이 물을 머금는 감각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생각했다.
역시 비 오는 날은 싫다.

신발 바닥이 물웅덩이를 밟으며 미끄러졌다. 그는 속도를 줄였다. 급할 이유가 없었다. 수아와의 관계는 이미 종료됐다. 정확히 말하면, 종료되었다고 합의했다. 큰 소리도 없었고, 눈물도 없었다. 그저 ‘잘 안 맞는다’는 결론만 남았다.


잘 안 맞는다.

참 편리한 말이었다.
그 말 하나면, 그동안의 시간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 노력도 전부 무효 처리할 수 있었다.

도현은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잠금 화면에 아직 수아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읽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읽고 지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굳이 지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별 직후에 흔히들 하는 행동들이 있었다.
사진을 지운다거나, 연락처를 삭제한다거나, 의미 없는 결단들을 내리는 것.

도현은 그런 것들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은 파일이 아니라서, 지운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신호등 앞에 섰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빨간 불이 번져 보였다. 그는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수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린 너무 다르잖아.’


다르다.
맞는 말이었다. 수아는 의미를 찾았고, 도현은 구조를 찾았다. 수아는 우연을 이야기했고, 도현은 확률을 계산했다. 그 차이를 ‘운명’이라는 말로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운명이라니.

같은 동선, 비슷한 취향, 적당한 외로움.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그걸 특별하다고 믿고 싶었던 건, 아마도 자신이었을 것이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사람들은 각자 휴대폰을 보거나, 바닥을 내려다보거나, 비를 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그게 정상처럼 느껴졌다.

비가 옷깃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물기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랑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오다 멈췄다.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사랑은 호르몬이고, 타이밍이고, 착각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설계 도면을 마감하듯, 깔끔하게.


버스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체온과 습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도현은 맨 뒤로 올라탔다. 창가 쪽 빈자리에 앉으며, 젖은 코트를 정리했다.


비 오는 날은 싫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더.

버스는 정류장을 벗어나자마자 느릿하게 속도를 올렸다. 와이퍼가 앞유리를 긁듯 오가며 빗물을 밀어냈다. 일정한 리듬. 도현은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예측 가능했고, 변수가 없었다.


차 안은 조용하지 않았다. 휴대폰 통화 소리, 이어폰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젖은 옷에서 풍기는 눅눅한 냄새들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소음은 배경에 불과했다. 도현은 언제나 그랬듯,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내는 데 익숙했다.


창밖으로 회색 건물들이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같은 간격, 같은 높이, 비슷한 색. 그는 무의식적으로 건물의 외벽과 창문의 비율을 훑어보았다. 습관이었다. 설계는 이렇게 반복 속에서 완성되는 거였다.

수아는 이런 버릇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일 생각 좀 안 하면 안 돼?’


비 오는 날, 버스 안에서 했던 말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 화면을 껐지만, 생각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누군가는 구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다를 뿐이었다.

버스가 급하게 차선을 바꾸며 잠시 흔들렸다. 몇몇 승객들이 동시에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도현은 몸을 고정한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흔들림은 예상 범위 안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 사이도 이 정도면 괜찮을 텐데.

너무 급하게 방향을 틀지 않고, 미리 신호를 주고, 감당 가능한 속도로만 움직인다면. 하지만 현실의 관계는 늘 갑작스러웠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멈추거나, 아무렇지 않게 꺾어버렸다.

도현은 코트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가렸다. 시계 위로 빗물이 튀었다. 수아가 선물해 준 시계였다. 정확하고, 심플하고, 쓸모 있는 물건. 그는 시계를 빼지 않았다. 특별한 의미를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직 쓸 만했을 뿐이다.


버스 안 전광판에 다음 정류장이 표시됐다. 그는 무심코 확인했다. 내려야 할 곳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도현은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흔히 이별 직후를 ‘텅 빈 상태’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도현은 다르게 느꼈다. 비어 있다기보다는, 정리된 상태에 가까웠다. 불필요한 가구를 치운 방처럼. 썰렁하지만, 최소한 발에 걸리는 건 없었다.


그는 이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덜 아팠고, 덜 복잡했다.

버스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도현은 눈을 떴다. 차 안의 풍경은 여전히 비슷했고, 창밖의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직 몰랐다.
이 버스 안에서,
자신이 그렇게 정리했다고 믿었던 감정들이
곧 엉뚱한 방식으로 다시 흩어질 거라는 것을.






하늘정원은 늘 고요했다.
구름 위에 놓인 정원은 계절도, 날씨도 없었다. 다만 오래된 나무와 낮은 돌담, 그리고 그 아래 앉아 있는 할머니와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

아이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 사람, 방금 결론 내린 거죠?”

할머니는 대답 대신 실타래를 굴렸다. 느릿느릿, 엉키지 않게.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응. 저 사람은 늘 빨리 정리한단다.”

“틀릴 수도 있는데요?”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는 실을 한 번 끊고, 새로 매듭을 지었다.

“틀려도 상관없어.”

“왜?”

할머니는 그제야 아래를 흘끗 내려다봤다. 비를 맞으며 버스에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다시 묶을 거거든.”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아까 그 비 오는 날 버스는요?”

할머니는 피식 웃었다.

“첫 번째였지.”

“이번은요?”

“두 번째.”

“그럼 다음은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실타래를 아이 손에 쥐여주었다.

“그건 네가 보면 안 되는 장면이야.”

하늘정원 위로 바람이 스쳤다. 실이 잠시 흔들렸지만,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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