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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사 이명지 Dec 20. 2019

당신은 안 그래요?

그녀의 봄

노래방 사장의 호출을 받고 배정된 방에는 이미 흥이 오를 대로 올라 흥청대고 있었다. 여기저기 나뒹굴어진 맥주캔이며 먹다 남긴 음료수 깡통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다섯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뒤엉켜 어우러진 판은 퇴폐적이고 탁한 기운의 혼곤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사장의 안내를 받아 내가 들어섰을 때 머리가 반쯤 벗어지고 눈이 유난히 작은 중년의 남자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역정을 내며 말했다.


“이봐 주인장! 두 사람 더 불러 달랬잖아!”
“손님, 요즘 사람이 달려서요.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꼭 채워 드리겠습니다.”

대머리는 작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순식간에 나를 훑어보고는 약간 누그러진 어투로 사장을 돌려보냈다.

“좋아, 그럼 당신이 두 사람 몫을 하는 거야. 어이! 홍 사장, 김 사장, 이 여자분이 당신들 짝이야. 그러면 트리플이 되는 거지. 좋아 좋아!"

대머리가 흡족하다는 듯 두 남자의 손을 이끌어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내 양쪽 옆에다 세웠다. 앉아있던 다른 일행들이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깔깔대며 박수를 쳐댔다. 이미 나보다 먼저 배당된 여자 셋이 남자들과 패거리를 지어 있었다. 긴 파마머리에 입술을 붉게 칠한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 그보다는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두 여자 중 하나는 분홍색 스팽글이 잔뜩 치장된 화려한 정장 웃옷을 입고 있었고, 또 한 여자는 수수하고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왠지 눈빛이 서늘해 보였다. 그녀들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아름다움을 꽤 지킨 쪽이었다. 아니 오히려 농익은 여인만이 품어낼 수 있는 짙은 사향 내로 말초신경만 발달한 덩치 큰 동물들 쯤은 단박에 뇌쇄시킬 강력한 무기를 지닌 듯이 보였다.

그녀들의 도발적인 당당함에 나는 순간적으로 혼란을 느꼈다. 어디서 전작이 거나했는지 대머리 일행들의 취기는 보통이 넘어 보였다. 대머리가 다짜고짜 마이크를 내게 들이밀며 노래를 하라고 했다. 이 상황을 위해 단단히 연습을 해 둔 터였지만 실전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선수처럼 보여야 했기에 나는 거침없이 노래기기의 번호판을 눌렀다. 디스코 메들리라는 글자가 반라의 여인이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화면 위에 떠오름과 동시에 천장의 현란한 조명이 빙글빙글 돌았고 신명 나는 전자음이 좁은 실내를 터질 듯이 채워 나갔다. 대머리는 나의 선곡이 몹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던 일행들을 모두 앞으로 이끌어냈다. 광란의 한판이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한사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는 노래방 사장의 의혹을 따돌리고 드디어 호출을 받아 현장에 잠입하러 가던 나는 설레기까지 하였다. 최근 노래방이나 유흥가로 흡수되고 있는 가정주부들의 탈선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뛰어들기로 작정하고 노래방을 찾아갔을 때 사장은 순순히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왠지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며 자기의 영업장에는 사람을 쓰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만만치 않았다. 작전에 돌입한 나는 삼류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이렇게라도 벌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다.”고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장이 내 연기를 믿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연락처를 남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방의 주류 판매나 접대행위는 엄연한 불법행위였으므로 사람을 쓰는 데도 신중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언 땅이 풀리며 지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무렵이라 사람들의 흥도 봄을 맞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이때를 대비해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원피스까지 차려 입고 달려가는 내 마음은 마치 엄마 몰래 나쁜 짓을 하러 가는 어린아이 모양 두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낯선 세계에의 야릇한 호기심, 새로운 배역에 대한 짓궂은 장난기, 낯익은 것들로부터의 짜릿한 일탈, 분장한 피에로가 자기 얼굴에 책임질 필요가 없을 때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익명성조차 갖추고 내가 선택한 배역에 따라 나의 도화를 신나게 풀어내면 되었다. 뿐인가. 훔쳐보기의 즐거움이란 이미 신화시대의 신들마저도 즐긴, 그 역사의 전통도 유구한 최상(?)의 오락이 아닌가. 취재라는 명분으로 가장한 내 배역은 내 가슴 밑바닥에 은밀하게 들끓고 있던 그 무엇들과 빠르게 야합하며 묘한 쾌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나의 디스코 메들리가 끝나갈 무렵 실내는 거의 광란의 도가니를 방불케 했다.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인 남자들이 여자들과 어깨에 어깨를 걸고 실내를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제 신명에 겨워 육신을 비틀며 해괴한 모양으로 춤을 추기도 했다. 흥이 무르익은 육체와 육체들이 거침없이 밀착되고 남자들의 손이 끊임없이 짓궂은 장난질을 쳐댔다. 여자들은 율동을 가장해 요리저리 잘도 도망질을 쳤다. 마치 애랑이가 베비장의 이빨을 하나씩 뽑아내며 애간장을 태우듯이….

그렇게 두어 시간, 현란한 조명이 꺼지고 떠나갈 듯 쿵쾅대던 전자음이 가라앉은 실내엔 나와 두 명의 여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파마머리가 그들을 따라 속칭 2차를 나갔다. 조명과 음악이 꺼진 백열등 아래의 여자들은 생각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광기마저 보이던 아까의 모습들은 간 데 없고 그녀들은 늙고 초췌하고 공허해 보였다.

“저 제가 오늘 처음인데요. 신고식 한번 하면 안 될까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 여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흘낏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 같지 않던데?”

분홍색 스팽글이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아 예, 제가 원래 노는 것을 좀 좋아해서….”


그동안의 연습량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나, 제 풀에 놀라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순순히 내 제의에 따라 유흥가 골목길에 있는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동료애를 느끼고 있는 사이 같았다. 포장마차 안에는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앉을자리가 없었다. 서성이고 있던 우리들 앞에서 마침 한 무리의 일행들이 자리를 파하고 일어섰다.

“아저씨 여기 소주하고 안주 좀 주세요.”

서늘한 눈빛이 거침없이 소주를 시켰다. 다소 의외였다. 나는 왠지 그녀에게 흥미 었다.

내가 잔에 소주를 채워주기가 무섭게 잔을 비웠다. 거푸 세 잔,

“미친년, 굳이 2차를 갈게 뭐람….”

2차를 따라간 동료가 못마땅한 듯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은 뭐가 아쉬워서 나왔어?”

심기가 불편한 그녀의 화살이 돌연 내게로 와 꽂혔다. 거역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예? 아 예, 세상이 궁금해서요

얼떨결에 대답해 놓고 나도 내 대답이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이 궁금하다. 또 사연 하나 추가하는구먼.”

그녀는 또다시 소주잔을 훌쩍 비웠다. 그녀의 주량은 상당한 듯 보였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어떤 년은 아이 과외비 벌러 나오고, 어떤 년은 식당 일보다 수월해서 나오고, 어떤 년은 궁금해서 나왔다? 웃기지 마 결국 모두 다 제 끼를 못 이겨 나온 것들이….”

누구에라기보다 마치 자학하듯 혼자 중얼거린 그녀의 말귀를 알아차렸을 때 나는 마치 예리한 칼날로 가슴이 씀벅 베이는 것 같은 뜨끔함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주는 충격은 컸다. 그녀의 그 한마디는 유흥가 주변을 얼씬거리는 여자들의 속내를 단칼에 찌르는 비수 같았다. 명분이 필요한 그녀들이었다. 조금 전 2차를 따라나선 여자는 아이 하나 딸린 이혼녀였는데 식당에서 일하다 힘드는 것에 비해 보수가 박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분홍색 스팽글은 공부 잘하는 두 아들 과외비라도 보탠다는 명분을 달았다. 그러나 정작 괴로운 것은 그녀 자신인 듯했다. 그녀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이곳으로 나왔다고 했다. 공부 못해 한 번도 속 썩인 적 없는 명문대 대학생 아들, 안정된 중소기업의 사장인 남편, 누가 봐도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사모님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없었다고 했다. 가족 중 누구도 지금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자기 것이라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껍데기뿐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전부라고 믿고 살았던 그들은 지금 그녀가 석 달 이상이나 이 일을 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고 관심조차도 없다는데 더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확연해지는 건 가족들에게 자신의 존재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반항심에서 자학의 심정으로 시작한 이 일에서 차츰 흥미를 느껴가고 있는 자신 또한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했다. 결국 그녀 자신도 가슴 깊숙이 꾹꾹 눌러 두었던 도화를 풀어놓기 위해 또 다른 명분을 찾아 나선 욕정의 화신일 뿐이란 생각이 괴롭다고 했다. 겉으론 윤리와 도덕으로 잘 포장된 이 도시에서 인간의 가장 원형질인 아담과 이브의 모습으로 해소하고 발산해 나가는 일에 매력을 느껴가고 있는 자신의 본능이, 아니 그 본능에 던져질 무수한 돌팔매가, 주홍글씨가 또한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가슴 떨리는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에도 질투를 느끼는, 그런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에도 봄이 오기를, 꽃이 피기를 기다려보고 싶다고...

그 순간 그녀는 눈물이 그렁한, 서늘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당신은 안 그래요?”


ㅡ페르소나, 나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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