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 소외된 경험
"이제 OO이랑 게임 안 할래."
아들이 핸드폰을 돌려주며 한마디 툭 던졌다.
"왜?"
"ㅇㅇ이가 나 배신했어."
요 며칠, 아들이 밤마다 내 핸드폰을 빌려갔다.
“엄마 폰으로 게임 좀 할게. 내 폰은 너무 느려서 답답해.”
어차피 그 시간, 노트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 그러라고 했다.
아들은 친구와 통화를 연결해 게임을 했다.
화면 효과음보다 목소리가 더 요란한 게임 시간...
“ㅇㅇ아~ 거기 아니야!”
"ㅇㅇ이는 나한테 안 되쥬~~내가 더 쎄 쥬~~"
"ㅇㅇ아, 그걸 왜 나한테 써?"
"ㅇㅇ아, 진짜 너 왜 이렇게 웃기냐."
"ㅇㅇ아, 너 왜 이렇게 못하냐?"
"ㅇㅇ님,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서로의 이름을 수십 번, 아니 족히 수백 번은 불러가며 실수도 놀림도 그들만의 코드로 소화하던 아이들...
저리도 재밌을까?
그런데 어제는 좀 달랐다.
내 폰을 빌려갔고 게임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냥 통화는 안 하고 게임만 하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ㅇㅇ이가 ㅁㅁ이랑 통화한다고 나랑은 전화하다 끊었어."
그 친구는 얼마 전 여자친구가 생겼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인 녀석들이 연애라니... 풉... 우습군...ㅋㅋ)
그 여자친구도 다 같은 학교 친구이기에 셋이서 함께 게임을 했는데 아들은 쏙 빼고 둘이서만 통화를 하면서 했다는 거다.
아마도 ㅇㅇ이는 연애 초기 '꽁냥꽁냥'을 하고 싶었나 보다.
(옛 어른들이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알겠다...ㅋㅋㅋ)
같이 게임했는데 나 혼자 하는 거 같았어.
아이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라 '관계에서 소외된 경험'이었다.
아마도 그 안에는 서운함, 외로움, 혹은 조금의 짜증과 속상함까지 여러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모르는 그 복합적인 감정들을 '배신'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지금 낯선 감정을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감정코칭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아이가 느낀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감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삶 속에서 직접 부딪히며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기에...
그 감정을 말로 끄집어낼 수 있도록, 나는 옆에서 조용히 있어주기로 했다.
"혼자 있는 기분이었구나."
아이의 말을 그대로 되짚었다.
그러자 아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ㅇㅇ 이한테 섭섭했어. 내 베프인데..."
아이가 느낀 감정은 '섭섭함'이었다.
감정은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엄마인 나라도 함부로 해석하거나 넘겨짚을 수 없는 게 마음의 결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느낀 감정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대신 함께 앉아 그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그 곁에 조용히 머물러주기로 했다.
"섭섭했구나. 그럴 수 있지. 엄마라도 그랬을 거야."
나의 말 한마디에 아이의 어깨가 살짝 내려앉는 게 보였다.
마음이란 참 그렇다.
해결보다 공감이 먼저고, 조언보다 "맞아, 그럴 수 있어"가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많다.
섭섭함이 다 사라진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엄마가 내 편이라는 확신은 생겼겠지.
그렇게 아들은 마음 한편에 작은 감정을 배웠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근데 생각할수록 ㅇㅇ이 나쁘네... 안 되겠다. 아들, 너도 빨리 여자친구 만들어서 복수해 버려~"
섭섭했다는 아들을 장난스럽게 위로했다.
"나는 여자친구 안 만드는 거거든..."
"진짜? 왜?"
"예쁜 애들이 없어. 난 엄마처럼 예쁜 여자하고만 연애할 거야."
푸하하...
이 귀여운 녀석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
"엄마가 내 눈을 너무 높여놨어. 책임져!"
아들... 이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연인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애틋함이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도,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도,
상대방에게는 깊은 위로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애틋함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어느 날, 아이는 나를 밀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손길이 어색해지고, 대화는 짧아지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나를 단절시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은 이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이 몹시도 아깝고 소중하다.
아들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뽀뽀를 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데 이 녀석이 요즘은 가끔 생색도 낸다.
"초등학교 6학년 중에 엄마랑 아직도 뽀뽀하는 애가 있는 줄 알아?"
그러면서도 늘 먼저 다가와 뽀뽀를 건넨다.
요즘은 나랑 눈높이도 제법 비슷해졌다.
내 품에 쏙 안기던 아이가, 어느새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서 있다.
머지않아 나보다 훌쩍 커져서, 나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건네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언젠가 이 다정한 시간을 그리워하겠지...
아직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는 이 아이를
더 자주 안아주고, 더 자주 눈을 마주치고,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다.
*부모 마음 처방전*
1. 아이가 관계에서 느끼는 서운함은 그만큼 마음을 쏟았다는 증거입니다.
"별일 아니야"라는 말보다 "그랬구나"라는 한마디가 아이의 마음을 더 오래 다독여 줄 수 있습니다.
2.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게 다가옵니다.
그 감정을 혼자 감당하게 두면 자기감정을 억누르거나 왜곡하게 돼요.
느낌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큰 안정감을 줍니다.
이렇게 말해보세요.
"그 감정은 잘못된 게 아니야.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면 기분 나쁠 수 있어.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