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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핏이 안 살아

고르고, 망설이고, 결국 스스로 자라는 시간

by 커리어포유

"나 신발 하나 사야 하는데.... 우리 쇼핑이나 갈까?"

어제 아침 남편이 말했다.

시험 기간인 딸은 공부하느라 집에 남기로 했고 아들에게 슬쩍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나도 예쁜 반팔 티셔츠 하나 살래!"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셋이서 나들이에 나섰다.


기분 좋은 햇살이 가득한 봄날...

쇼핑하기(=돈쓰기) 딱 좋은 날씨였다.

햇살은 창문을 타고 들어와 조용히 무릎을 데웠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홍빛이던 거리가 온통 초록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작 30분 거리에 있는 아웃렛에 가는 길이었지만

꼭 어디 여행을 가는 것 마냥 기분이 살짝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가는 길에 아들이 좋아하는 햄버거 가게에 들렀다.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환히 웃는 아들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평범하지만 소중한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햄버거로 배도 채웠고 이제 본격적으로 쇼핑을 해 볼까나?


아들 옷과 운동화를 먼저 사기로 했다.

아들은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꼭 마음에 드는 거 살 거야!"

한참을 둘러보던 녀석이 네이비색 티셔츠 하나를 가리켰다.

"나 이거 입어볼래."

디자인이 나쁜 것 같지 않아 평소 입던 옷 사이즈를 골라줬더니

신나서 혼자 피팅룸에 들어가서 입고 나온 아들...

하지만 거울 앞에 선 아이는 입술이 삐죽 나왔다.

"핏이 안 살아... 나 너무 말라 보여."

얇은 천 너머로 드러나는 앙상한 어깨뼈, 가느다란 팔...

입고 싶은 옷인데, 그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들은 또래들과 키는 비슷하지만 마른 체형이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자주 말했다.

살이 좀 쪘으면 좋겠다고,
운동을 해서 근육이 붙었으면 좋겠다고...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엄마, 왜 뚱뚱한 사람한테는 뚱뚱하다고 말하면 상처가 되는 줄 알면서,
마른 사람한테 말랐다고 하는 건 상처가 되는 줄 모를까?

아들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서운함과 속상함이 배어 있었다.

친구들이, 어른들이 무심코 던진 "너 왜 이렇게 말랐어"라는 말이

아들에게는 생각보다 큰 상처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거울 앞에 선 아들의 어깨가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옷 소재가 그런 거야. 다른 옷 한번 입어볼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자꾸만 그 티셔츠에 눈이 가는 모양이었다.

"엄마, 흰색은 좀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건 좀 커서 더 말라 보이는 것 같아."

아들은 같은 디자인의 한 사이즈 작은 흰색 티셔츠를 들고 다시 피팅룸에 들어갔다.


그때 옆에선 아들 또래의 제법(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통통한 아이가 아들이 골랐던 티셔츠와 똑같은 걸 몸에 대보고 있었다.

"야, 이 옷은 재질이 달라붙어서 니 배가 그대로 나온다. 안 되겠다야~."

아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 그대로 웃픈 장면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거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기 몸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구나.

아들의 말라 보이는 몸도, 옆 아이의 통통한 배도,
각자의 자리에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들...

"엄마, 그래도 이건 좀 낫지 않아?"

미안하지만 전혀 낫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 섞인 눈으로 묻는 아들의 눈빛을 보며,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옷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솔직히 내 마음은 조금 더 넉넉한 사이즈의 다른 소재 옷을 골라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꾹 눌렀다.

"응, 흰색은 좀 덜 말라 보이네. 괜찮은 것 같아."

입고 싶은 옷을 선택하고, 입고 싶은 방식대로 입고 싶은 아들의 마음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마음에 들어서인지,

아니면 괜찮아 보인다는 엄마 말이 위로가 된 건지 모르지만 아들은 금세 기분이 풀린 듯 보였다.


그렇게 새 티셔츠를 품에 안고, 이제는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찾을 차례였다.

나는 눈길이 닿는 대로 여기저기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이건 어때?"

"이것도 괜찮은데?"

나는 주로 가격이 착하고 때가 덜 탈 만한 검은색 운동화들을 추천했다.

하지만 아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들이 하얀 운동화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난 이게 맘에 들어."

가격표를 확인한 나는 속으로 잠깐 숨을 삼켰다.

비쌌다.
게다가 새하얀 운동화는 때도 쉽게 타는데...

나는 검은색 운동화를 다시 한번 권했다.

"흰색은 금방 때 탈 텐데... 이거 이쁘지 않아? 엄마가 볼 땐 이게 더 괜찮은 것 같은데?"

하지만 아들은 여전히 하얀 운동화 앞을 떠나지 못했다.

"난 이거 신고 싶은데..."

나는 다시 갈등했다.

운동화만큼은 내 취향을 고집하고 싶었다.

조금 더 실용적이고,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을 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옆에서 남편이 툭 한마디 던졌다.

"신을 사람 마음에 들어야지. 아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그 말에 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결국, 다시 아들의 취향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쇼핑백을 보며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라고 말하는 아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 고민과 선택의 시간이 아이를 조금은 자라게 했을 거라고...

아이를 키운다는 건
완벽한 선택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서툴고 어설픈 선택이라도 스스로 해 볼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일이라는 걸...


그리고 오늘 아침 새 운동화를 신고 신나서 학교에 가는 아들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앞으로 이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끝까지, 묵묵히,

이 아이를 지지하고 응원하겠다고...


*부모 마음 처방전*

1. 아이가 선택 앞에서 망설일 때, 대신 결정해 주려 하지 마세요.
그 망설임의 시간이 아이를 성장하게 합니다.
완벽한 선택보다,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한 경험이 아이를 단단하게 키워줍니다.

2.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실수하더라도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받은 기억이 아이의 자존감을 천천히 키워줍니다.

3. 부모는 빠르게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의 선택을 믿을 수 있도록,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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