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뉘앙스에 대하여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다.
학교에서 '부모님께 가장 듣고 싶은 말, 가장 듣기 싫은 말 적어오기' 숙제가 있었다.
딸은 망설임 없이 연필을 움직였다.
가장 듣고 싶은 말 – "사랑해", "널 믿어."
가장 듣기 싫은 말 – "안돼", "하지 마."
예상 가능한 대답들이라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말했다.
엄마... 내 친구 00 이는 엄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잘했다'래...
이상하지?
난 엄마한테 잘했다는 칭찬받으면 기분 좋은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눈치챘다.
그 친구가 말한 '잘했다'는 진심 어린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말투의 "자~알~했다"였을 것이다.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말투 하나로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말의 힘은 언제나 그 말투 속에 숨어 있다.
말을 업으로 삼은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말하기를 들었다.
그중에는 정말 좋은 말을 하고도 상대의 마음에 닿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 이유는 하나다.
말은 의미보다 먼저, '태도'로 들리기 때문이다.
"괜찮아."
이 말은 누군가에겐 위로지만, 누군가에겐 외면이다.
"그래."
동의의 표현이 될 수도 있고, 체념 섞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결국, 말은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어제 수산업계 CEO를 대상으로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강의하던 중 교육생 한 분이
"저는 진심으로 말했는데, 상대가 오해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되물었다.
"그 말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전했는지 기억하세요?"
그리고 앞서 얘기한 딸 친구의 얘기를 들려줬다.
말은 문장이 아니라 리듬이다.
말은 단어가 아니라 숨결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투'라는 건, 바로 그 리듬과 숨결, 감정의 결을 뜻한다.
말을 잘하고 싶다면, 말의 스킬보다 먼저
'나의 감정이 말에 어떻게 실리고 있는가'를 들여다봐야 한다.
나는 딸의 그날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가 느꼈을 그 묘한 감정,
'잘했다'는 말에 묻어 있던 그 말투의 온기 아닌 서늘함,
그 작은 어긋남이 아이 마음에 남겼을 낯선 불편함을 조심스레 헤아려본다.
우리는 종종 말의 '뜻'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할까, 어떤 표현이 좋을까를 고민하느라
정작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어떤 기분일지는 쉽게 놓쳐버린다.
말은 문장으로 구성되지만,
상대는 문장이 아니라 태도와 뉘앙스를 먼저 듣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만 집착한 나머지
'어떻게 들릴 것이냐'를 고려하지 않는다.
결국, 말은 전달되지 않고 진심은 말투 속에서 길을 잃는다.
사람의 마음은,
내용보다 먼저 느낌으로 반응한다.
그 말이 다정했는지, 무심했는지,
나를 향해 열린 말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는지를 먼저 알아차린다.
그래서 말은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태도이고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감정의 언어다.
때로는 잘 고른 단어보다,
그 말을 담은 목소리의 온기가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말은 전달하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그 울림은 듣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말보다 말의 흔적이 더 오래 남는다.
칭찬도, 위로도, 때로는 사소한 인사 한마디도
그 말투 안에 담긴 내 감정이
고스란히 상대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
그걸 아는 순간,
비로소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