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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경청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말은 기술이지만 듣기는 태도다

by 커리어포유

며칠 전,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한 권의 책에서 손이 멈췄다.

아, 이 책.

4년 전(책의 출간연도를 보니 2021년이다.)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서평을 쓰려고 읽던 책을 식탁 위에 잠시 내려뒀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이 그걸 집어 들고는 푹 빠져 한참을 읽더니,

설거지 중이던 내 뒤로 와 신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마, 옛날에는 동전을 금이나 은같이 구하기 힘들고 비싼 재료로 만들었대.

그런데 요즘은 값싼 합금으로 만든대."

"아... 그래?"

"응... 그리고 모든 지폐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자기만의 번호가 있대.

그리고 또 우리가 입는 청바지는 엄청 멀리서 오는데... 어디더라...

아... 맞다... 거기서 그렇게 목화로 실을 만들고... 어쩌고 저쩌고... 또 단추는... 어쩌고 저쩌고...

신기하지? 그리고 또... 어쩌고 저쩌고..."

물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냥 몇 번 맞장구를 쳐줬다.

"진짜???"

"우와... 신기하다."

엄마의 리액션에 신이 났는지 그 후로도 한참을 정성껏 설명하고는

"엄마도 이제 다 알았지?"

라며 쿨하게 돌아섰다.

사실 그때 아들의 이야기 중 10%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솔직히 아직도 청바지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ㅎㅎ

그런데도 아들은 엄마와 소통이 아주 잘 됐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저 고개 몇 번 끄덕이고 몇 마디 대꾸해 준 것뿐인데...


그날 이후, 종종 생각한다.

고개 몇 번 끄덕이고, 몇 마디 호응했다고 해서 정말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말은 들었지만, 정작 그 사람이 전하고 싶었던 핵심은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진심으로 귀 기울였던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8955477287_1.jpg <당시 아들이 읽었던 책>


스피치 강의를 하면서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해야 말을 잘할 수 있을까요?”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은 기술이지만, 듣기는 태도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본 적 있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스피치는 단지 전달의 기술이 아니다.
관계의 기술이고, 결국엔 삶의 태도다.

그렇기에 듣기는 말보다 먼저 배워야 할 소통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로 듣는 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래서 경청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제대로 듣지 못할까?


1. 생각이 딴 데 가 있어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어도,
머릿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가 있을 때가 많다.
'오늘 저녁 뭐 먹지?',
'아까 문자 온 거 답장했었나?'
일상적인 생각의 파편들이 대화 중에도 끊임없이 튀어나온다.

이럴 때 우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말소리를 BGM처럼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2. 말할 타이밍만 재고 있어서

상대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고개는 끄덕이고 있지만,

실은 '이쯤에서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지금 끼어들면 너무 이른가?'

머릿속은 이미 다음 차례 준비로 분주하다.

이럴 땐 듣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차례를 계산 중'인 것에 가깝다.

진짜 경청은 대화의 흐름을 '함께 타는 일'이지,

내가 말할 타이밍을 눈치 보는 일이 아니다.


3. 감정이 먼저 반응해서

말을 듣는 순간, 먼저 올라오는 건 '생각'이 아니라 '감정'일 때가 있다.

불쾌함, 억울함, 또는 방어심.

그 감정이 마음을 먼저 덮으면 그다음 말은 듣기는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심지어 맞는 말도 감정이 걸려 있으면 거부하게 된다.

경청은 감정과의 거리 두기에서 시작된다.

말을 듣기 위해선, 먼저 내 안의 감정을 조용히 시켜야 한다.


4.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들어서

"쟤는 맨날 저런 식이야."

"또 신세한탄 시작이네."

이런 고정된 인식이 앞서면,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우리는 결국 그 ‘틀’ 안에서만 해석하게 된다.

말이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

경청은 상대를 '어제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사람'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5.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말을 끊어서

누군가의 어려움을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돕고 싶어진다.

그래서 듣자마자

"그럴 땐 이렇게 해봐."

"내가 아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라며 조언이 먼저 튀어나온다.

하지만 상대는 아직 '해결'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조언은 가장 늦게 꺼내야 할 말이다.

경청은 도와주는 것보다, 곁에 머무는 힘이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청을 잘하는 사람은 뭐가 다를까?


그들은 특별한 스킬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말을 듣는 태도가 다를 뿐이다.


1. 질문으로 마음을 연다

"그래서 어땠어?"
"그 말, 꺼내기까지 마음이 힘들진 않았어?"
그들은 반응보다는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상대의 마음을 더 깊이 열게 만든다.
진짜 경청은 대화를 흐르게 하는 것이다.


2. 눈으로도 듣는다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에 집중하는 표정 하나만으로도
"나는 지금 너에게 집중하고 있어"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경청은 소리가 아니라 분위기로도 느껴진다.


3.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 듣는 사람은 말이 끊기는 순간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상대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 조용한 기다림 속에서,
상대는 '이야기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4. 감정을 먼저 듣는다

조금 서툰 말속에서도 그 말이 왜 나왔는지를 상상하고,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먼저 읽는다.
"이 말은 어떤 마음에서 나온 걸까?"
그 감정을 이해하려는 순간, 듣기는 달라지고 대화는 깊어진다.


5. 듣고 있다는 걸 상대가 느끼게 해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듣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게 하는 사람.
그 사람 앞에 서면 괜히 더 말하고 싶어진다.
조언을 해주지 않아도,
리액션이 많지 않아도
마음은 편안해지고 말은 길어진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말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은 드물다.
경청은 말보다 상대의 마음에 더 집중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머물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진짜 소통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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