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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짧지만 강력한 스피치

건배사, 한마디로 리더십이다

by 커리어포유

지난주에 있었던 모 대학 총동창회장 이·취임식.

13화에서 축사 얘기를 했었는데, 사실 그날 무대엔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1부 공식행사를 마치고 2부 만찬이 이어지는 시간.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자 주최 측의 요청으로 내빈 몇 분께 건배 제의를 부탁했다.

그중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건네받으신 분은 짧은 감사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인사는 곧 축사를 닮아갔고,

축사는 회고담이 되고,

회고는 인생철학으로 길게 이어졌다.

건배사가 늘어지자 사람들은 잔을 든 채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고,

누군가는 괜히 물을 한 모금 삼킨 뒤 애꿎은 컵만 바라봤다.

몇몇은 옆사람과 '짠~' 소리를 내며 먼저 잔을 부딪히고 조용히 술을 비워냈다.

말은 계속 이어졌지만, 이미 모두 속으로 '위하여'를 외친 듯했다.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이처럼 만찬 자리에서 건배사를 요청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느낀다.

건배사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짧지만 강력한 스피치라는 것을...

임팩트 있는 건배사로 청중을 압도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울리지 않는 말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길거나 무리한 말장난으로 흐름을 깨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건배사를 지위 높은 사람, 나이 많은 사람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어떤 기업에서는 신입사원에게도 건배사를 시킨다고 한다.

그 짧은 순간 안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일종의 리더십과 센스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5명이든, 100명이든, 그 이상이든

모두를 산 정상까지 이끌고 가
다 함께 '야호!'를 외치게 만들 수 있는가.
건배사는 곧, 순간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말하기다.
누군가에게는 그 짧은 한마디가

'나를 각인시킬 수 있는 강력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건배사는 왜 어려울까?

그건 대부분 갑작스럽게 마이크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이 눈앞에 잔이 놓이고,

순간 모든 시선이 집중되면,

분위기를 망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

유쾌해야 한다는 압박,
무엇보다도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욕심에 말문이 막힌다.


분위기를 살리는 건배사, 핵심은 다음 네 가지다.

짧고 간결할 것

상황과 청중에 어울릴 것

진심이거나 유쾌하거나, 혹은 둘 다일 것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민망하지 않을 것

건배사는 분위기를 띄우는 말이지만,

억지스러운 연출은 오히려 독이 된다.
무리한 말장난보다는,

내 이야기를 짧게 툭 던지듯 전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건배사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짧지만 완성도 있는 하나의 스피치다.
그래서 다음 순서를 기억해 두면 도움이 된다.


1. 간단한 인사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에게 건배사를 맡겨주셔서 영광입니다."

형식적이라는 생각에 인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지만

짧고 담백한 인사 한 줄만으로도 격식을 갖춘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중 나에게 건배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영광'이지 않은가?


2. 권주(잔 채우기 권하기)
"혹시 잔이 비어있다면 채워주시겠습니까?"

이 말을 빼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면 건배 구호를 외칠 때 여기저기서 술을 따르느라 어수선해지기 쉽다.

건배는 모두가 함께할 때 힘이 생긴다.

잔을 채운다는 건 단지 술 마실 준비가 아니라,

함께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조용한 신호다.


3. 건배 구호 제의 (리드멘트)

건배사라는 것이 불과 30초 남짓한 짧은 스피치지만

막상 갑자기 하려고 하면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레퍼토리를 몇 개 정도는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요즘은 건배사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해 다양한 건배 구호가 사용되고 있는데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이 축약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진. 달. 래.(진하고 달콤한 래(내) 일을 위하여)
나. 가. 자.(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당. 나. 귀.(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개. 나. 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사. 우. 나.(사랑과 우정을 나누자)
청. 바. 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해. 당. 화.(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재. 건. 축.(재미있고 건강하게 축복하며 살자)

이런 구호는 말장난처럼 느껴지기 쉬우니

완벽히 외우고, 감정을 실어 그 느낌을 잘 살려낼 자신이 있을 때만 쓰는 게 좋다.

또 아무리 의미가 좋다 하더라도

구호의 어감이 좋지 못하면(예를 들어 개. 나. 발. 같은 경우)

건배제의를 하는 사람의 품격이 떨어진다.

게다가 겨우 하나 외워갔는데

앞사람이 똑같은 구호를 외쳐버린다면... 대략 난감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나만의 건배 구호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왜 이 자리에 모였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출발하면 된다.

그 자리가 축하의 자리인지,

위로나 격려가 필요한 자리인지,

무엇을 다짐하거나 기원하는 자리인지,

단순한 친목의 자리인지...

모임의 취지와 성격을 파악하면 건배 구호는 만들기가 쉽다.

모임의 성격이 분명해졌다면 다음은 간단한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참석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스토리를 풀어놓으면서

그 이야기 속에서 구호를 만들면 좋다.

이때는 선창과 후창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미리 친절하게 말해줘야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고 제대로 따라 할 수 있다.

'리드멘트'를 통해 선창과 후창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제가 진달래로 건배 제의를 하겠습니다. 진달래~"

라고만 해 버리면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 해야 하는지 몰라 우물쭈물해 버린다.

이때는

"제가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고 외치면 여러분은 '진달래'라고 해 주십시오."

라고 정확하게 말해줘야 한다.

(이때 진달래의 속도까지도 정해주는 것이 좋다. '진달래'로 할 것인지 '진. 달. 래.'로 할 것인지...)

그리고 건배 구호를 선창 할 때는 목소리를 두 배 정도 높이는 것이 좋다.

내가 크게 외쳐야 뒤따라오는 구호도 커지게 돼 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선창을 하고

사람들이 후창을 할 때도 같이 외쳐주는 것이 좋다.


4. 마무리인사와 박수유도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건배 구호를 외친 뒤, 그대로 자리에 앉는 것보다

간단한 마무리 인사 후 박수로 흐름을 정리하는 것이 훨씬 인상 깊다.

이 짧은 여운이 말 잘하는 사람과 센스 있는 사람의 차이를 만든다.




건배사라는 짧은 말속에는

말센스, 배려, 유머, 진심 같은 말의 본질이 모두 들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짧은 건배사 한 줄이 그 자리를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강한 문장이 되기도 한다.


혹시 오늘 당장 건배사를 부탁받는다면 당신은 어떤 한마디를 준비하겠는가?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센스가 넘치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의 언어로,

진심을 담아,

그 자리를 따뜻하게 만드는 한마디.
그게 진짜 멋진 건배사다.

그러니 이제부터,

당신만의 한마디를 준비해 보자.
혹시 아는가?

그 말 한마디 덕분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참 좋은 자리'로 남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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