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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준비한 내용을 다 말해야 한다는 강박

내용을 줄일수록 핵심은 또렷해진다

by 커리어포유

며칠 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발표력 향상' 강의를 마무리했다.

3회 차에 걸쳐 총 9시간 동안 진행된 교육이었다.

1·2회 차 수업에서는 보이스 트레이닝, 프레젠테이션 구조, 발표 스크립트 구성 등
실제 분임조 발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실전 중심의 강의로 채워졌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날,
교육생들의 발표 영상을 함께 보며 피드백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리허설 때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앞선 수업에서 건넸던 피드백들이 발표에 차분히 반영된 모습을 보며 내심 뿌듯했다.

그중 한 발표자는

목소리 크기나 톤, 청중과의 아이컨택, 동선이동, 제스처, 슬라이드 구성 등 모든 것이 훌륭했다.

발표 초반에는 안정감이 느껴졌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잘 유지하며 내용을 이끌어갔다.

그런데 발표 후반부로 갈수록 말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슬라이드 전환도 다소 급해졌고, 결국 마지막 마무리는 숨 가쁘게 쏟아내듯 끝나버렸다.

그 장면을 함께 보며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뒷부분으로 가면서 타임체크 하셨어요?"

"네... 조원이 시간이 다 돼간다고 신호를 줬어요."

"그래서였군요.
말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더라고요.
내용이 많이 남아 있었나 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연습할 땐 분명히 시간이 남았었는데
막상 발표하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훅 지나가더라고요.
슬라이드가 몇 장이나 남았는데
시간이 다 돼 간다니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서..."




처음에는 안정적으로 시작하다가도,
후반부로 갈수록 말이 점점 빨라지고 결국 마무리가 엉키는 경우.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준비한 내용을 다 말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많은 발표자들이 말한다.
"연습할 땐 괜찮았는데, 발표할 땐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실제 무대에 서면
머릿속 계산보다 훨씬 빠르게 감정이 움직이고,
청중의 시선과 반응, 시간에 대한 압박이 발표자의 리듬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필요한 건,
"빼는 연습"이다.


발표가 잘 됐느냐의 기준은

준비한 걸 전부 말했느냐가 아니라
핵심이 제대로 전달됐느냐다.

슬라이드가 10장이든, 15장이든
무조건 다 말해야 발표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 말하려다 보면
정작 중요한 말이 묻혀버릴 수 있다.


발표는 '말을 채우는 기술'보다 덜어내는 감각'이 더 중요하다.

말을 비워야 메시지가 남고,
슬라이드를 덜어내야 시선이 또렷해진다.
말을 줄여야 청중의 기억 속에 하나의 문장이 오래 머문다.


잘 만든 발표는,
정보가 많은 발표가 아니라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을 갖고 있는 발표다.


발표가 끝난 뒤
"아, 이 말도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오히려 괜찮다.
그보단 이렇게 끝나는 발표가 더 아쉽다.

"하긴 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청중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발표다.


그래서 나는 프레젠테이션 강의를 할 때 이렇게 강조한다.

"다 말하려 하지 마세요.

무엇을 남길지를 먼저 결정하세요."


덜어내는 연습은 단순히 분량을 줄이는 일이 아니다.

내가 정말 전하고 싶은 핵심을 중심에 두고,
그 핵심을 가장 잘 받쳐줄 말만 남기는 일이다.

어떤 말은 멋있어 보여서,
어떤 슬라이드는 정성껏 만든 게 아까워서
도저히 뺄 수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피치는 욕심보다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좋은 발표는 말이 많은 발표가 아니라, 메시지가 선명한 발표다.


덜어낼 때는 이런 질문을 해보면 도움이 된다.

이 말은 핵심을 강화해 주는가?

청중은 이 말을 듣고 반응할 가능성이 있는가?

이 문장을 빼도 전체 흐름이 무너지지 않는가?

이 질문에 ‘아니요’가 떠오르는 부분은 과감히 덜어내도 괜찮다.


실제 발표자 중에 슬라이드를 줄이지 못해서

각 페이지당 20~30초씩만 할당하며
청중이 내용을 따라가기조차 힘들게 만드는 경우도 많이 봤다.

하지만 슬라이드가 많다고 풍성한 발표가 되는 건 아니다.

발표의 질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담았느냐보다
얼마나 명확한 흐름으로,
한 가지 핵심 메시지를 잘 전달했느냐에 달려 있다.


기억하자.

말을 덜어낼수록 청중의 집중은 더 깊어지고, 메시지는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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