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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출 Nov 09. 2018

해설 –김형하 시집『낮달의 기원』(2013 문학의전당)

세 개의 자화상-박옥춘 문학평론가

해설 – 김형하(본명 김형출) 시집 『낮달의 기원』(2013 문학의 전당 )     

세 개의 자화상     

박옥춘 문학평론가          


시인은 무엇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걸까요?

무엇으로 모든 원소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슴속에서 솟아나와 온 세계를 다시 가슴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조화의 힘이 아닐까요?

―『파우스트』, 「무대에서의 서연(序演)」 中          


 시인은 언어라는 도구로 꿈을 벼리는 자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 우주는 ‘없던’ 것으로부터의 솟아남이 아니며 기존의 우주를 참조한다는 점에서 창조라기보다는 재편성에 가깝다. 시인의 환상이 언어에 의해 정교하게 구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편의 시는 재편(조정)된 하나의 우주요, 한 권의 시집은 재편된 우주의 모음집이다. 그런데 왜 시인은 이 우주 창조를 한 번에 그치지 않는가. 왜 새로운―새롭다고 믿는― 우주 창조에 매번 자신의 전존재를 내던지는가. 이 물음은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가, 하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과연 내부의 어떤 추동력이 시인을 충동하는가.      


위험 짊어지고

징검다리 건너는 아이가 있다

짓눌린 가위에

파르르 떨림 진동수 비틀비틀

공중에 걸려 있는 까치둥지 외벽

나뭇가지에 엮은 베틀생명줄

아이의 올가미

빙글빙글 돌고 도는 환청

저기

삭막한 벌판에 흩날리는 초라한 초개

사람이 찾고 들쥐가 찾고, 새들이 찾는 맥박

심장 안에 구부린 채

주인 기다리는 가느다란 초개여     

널 잡고 싶은 끈 저기에 있다.

      

                                                        ―「지푸라기」 전문 『비틀거리는 그림자』   

 

어둠 안에 있다

어둠 안에 숨어 보인다

모른다, 하였다

빛의 존재, 섣불리 원망하지 마라

그림자 안에 잉태하고 붙어사는

감추고 드러내 보이는 내 영혼 

지금 방황 중,

오랫동안 갈등했었다

어둠을 덮고 당찬 햇발* 기다리며

나는 내 구멍 안에 있는 것이다

껌처럼 굳어 있다 영혼이 해동되고 

조각조각 부서지면 볕뉘** 깨우치리라

나는,
 

어둠 안에 있다

어둠 안에 숨어 보인다

모른다, 하였다

                                                                                       ―「어둠 안에 있다」 전문


 서두의 질문에 대한 답을 「지푸라기」에서 어렴풋이나마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팽배한 불안의 기미와, 위험에서 구해줄 ‘어떤 것’에의 기다림이다. 아이를 불안에 빠뜨리는 위험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징검다리’ ‘공중’ ‘외벽’ ‘올가미’ 등으로 불안의 정황을 확고히 할 뿐이다. 구원? “초라한 초개” 곧 지푸라기를 기다리는 홋홋한 일일 터. 일순간 “빙글빙글 돌고 도는 환청”과 “삭막한 벌판에 흩날리는 초라한 초개”가 유사관계에 놓이면서 불안한 자아와, 자아가 기다리던 지푸라기가 다만 “초라한 초개”로 동일시된다. 그러나 그 초라함(무소용)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들쥐, 새가 필요에 따라 찾는 것처럼 “심장 안에 구부린 채/주인 기다리는”, “널 잡고 싶은” 끈이 있다. 어떤 혼란-불안으로 인한? 혹은 욕망?―이 시를 모호하게 하지만, “심장 안에 구부린 채/주인 기다리는 가느다란 초개”를 시(詩)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올가미’와 ‘베틀생명줄’을 오가는 위험과 구원의 ‘끈’―.

 첫 시집에서 시인이 탐구했던 ‘지푸라기’ 이미지가 이번 시집 『낮달의 기원』에서는 ‘동굴’로 탈바꿈한다. 부유하는 이미지에서 고정된 이미지로의 전환. “구멍은 유구한 동굴이다/구멍 안에 있다 나는”(「구멍론」). 동굴의 큰 특징은 열린 폐쇄성의 ‘구멍’에 있으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데 있다. 「어둠 안에 있다」는 영혼에 대한(“심장 안에 구부린 채/주인 기다리는”) 탐구다. “나는 내 구멍 안에 있는 것이다”. 존재라는 구멍과, 구멍에 깃든 존재, 자아 인식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동굴 안의 어둠과 외부로부터의 빛. 절반의 어둠과 절반의 빛. 어둠이라는 바탕 위에서 비로소 빛은 인식의 장을 연다. 그러나 불명(不明)이 괴로움인 것처럼 ‘빛의 존재’ 앞에서도 역시 고통스럽다. 빛도 어둠도 아닌 존재의 반투명성, 그로 인한 인식의 불투명성으로 존재는 “어둠 안에 있다”, “모른다, 하였다”. 

 그러나 이 “숨어 보이는”, “감추고 드러내 보이는” 존재야말로 “비밀스러운 신비”(「낮달의 기원」)다. 동굴 속의 고독한 존재는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가 읽고 쓰는 행위는 문자에 바치는 제식이 아니라, 자신을 읽고 쓰는 깨우침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굴은 자기인식―빛의 존재로 말미암아―의 방(房)이며, 불명(不明)에서 깨어난 자아의 탄생을 위한 산실(암실)이기도 하다. 시인은 불명의 과정을, 혹은 그 결론을, 혹은 그 실패를 낱낱이 기록한다. 마치 연금술사의 일지처럼 창조의 시도와 그에 따른 무수한 실패를. 그것의 절박함과 끝없는 반복은 신체적 욕구와 닮았다. 생존하기 위한 본능처럼 시인은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화상은 대상을 자신으로 제한하는 집약된 창조다. 세계의 철저한 배제와 함께 자신의 일부분(얼굴)만을 선택하는 특수한 기술(記述)이다. 세계로 향한 시선이 나에게 되돌아옴에 따라 나는 세계를 대신하는 대상이 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요약된 세계상인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기초하지 않은 자화상이 있을까. 그러나 세계의 배제와 함께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 속에는 공정치 못한 판단이 간섭할 수 있다. 어쩌면 나르시시즘의 반동적 지각에 의한 냉소와 각성과 객관적 시선을 앞세우는 지나친 성찰과 회오들. 

 이번 시집의 세 국면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자화상」은 시인의 삶을 요약하며, 또 자기 인식 과정과 시의 지향점을 가리키고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구획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과거 삶에 대한 반추에서부터 미래의 시간, 특히 죽음에 대한 사유에까지 이른다. 청춘의 자화상과 다른 점은 시간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다. 「자화상」 1에서는 먼저 노후해가는 육체에 대한 서글픔, 흐르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 속에는 회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망각을 남기다」, 「나를 고발하다」에서처럼 자기성찰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결연한 다짐이 있다.       

자화상 1 : 생의 종합과 요소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동공 속엔 내가 태어난 동굴이 있고

동굴 앞에 우물도 보인다

우물 안에 달빛이 차오르고 태양이 빨려들었다

꽃이 피고 지고 밤낮이 오가는 길목에 

나목 같은 나잇살이 차오르면서 또 하나의 나를 본다

삶과 죽음에 관한 밀담과 비밀을 움켜쥐고

매일 거울 앞에 서서 죽은 가면 썼다 벗다

반복하며 나는 나를 자해(自害)하며

의문이 많은 내 영혼을 읽으려고 애쓴다

가끔은 어디론가 이탈하고 싶은 비장한 충동과 탐욕스러운 욕구

안에 갇힌 나는 운명적인 내 몫에 포섭되었다 

                                                                                               ―「자화상」 부분    
 


 삶의 시간은 축적인가, 아니면 다만 통과하는 것인가. 위의 시에서 보는 것처럼 김형출 시인에게 시간은 곧 경험과 비례하면서 자아는 세계와 사물에 대한 종합 혹은 요소에 대한 사유에 몰두한다. “나잇살이 차오르면서 또 하나의 나를 본다”. 자아는 거울에 투영된 “또 하나의 나”와 ‘거울을 들여다보는 나’로 이분되어 있지만 의식하는 자아가 우세하다. 그는 마치 어두침침한 골방의 파우스트 박사처럼 “삶과 죽음에 관한 밀담과 비밀”, “의문이 많은 내 영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충동으로 가득하다. “이 세계를 가장 내밀한 곳에서/통괄하는 힘을 알게 되고,/모든 작용력과 근원을 통찰”(『파우스트』)하여 종합하고 확고한 판단에 이르고자 한다.  

 「밥알의 기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물밥’에 대한 애틋한 기억이며, 「밥알론」에서는 밥 한 톨을 ‘우주의 살점’으로 비유하면서 그것 앞에서의 마음가짐을 ‘밥심’이라 말한다. ‘밥심’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공물(供物)이면서 그것에 바치는 겸허함이다. 「지구 껍질에 대하여」, 「한 방울에 대하여」, 「공간」이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추상적 사유라면, 「콩에 대하여」는 인간이 향유하는 물질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사실의 종합이다. 「위안하다」는 루소와 에디슨을 참고하며 자연과 문명의 갈등을 언급한다. 의식적 자아가 지배적인 자화상 1의 국면은 세계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원대한 욕망으로 인해 오히려 추상적, 관념적, 평면적 진술에 머무는 위태로움에 놓이기도 한다.   
  

자화상 2 : 욕망과 근원으로의 회귀     


우물 단지에서 인연을 본다

보이지 않는 인연까지 다 내려놓고, 함몰된 흔적

상처가 깊고 아리다

배꼽이다,

가위에 잘린 자국 안에 내 주름진 울음이 매장되어 있다

삼* 안에 고여 있는 모래집물**

신성하다 못해 신비하다

우물 단지는 아직 흥건하다

달의 뼈와 살이 농축된 어둠 속 그림자

서로 속삭인다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는 우주의 중심을 엿볼 때 

배꼽이 그립다

손으로 문지르고 주무르면

우주의 중심에서 어머니의 젖 냄새, 살 냄새 

                                                                                             ―「배꼽이다」 부분     



 「자화상」 2의 국면은 욕망하는 자아를 직시한다. 거울을 매개로 의식하는 자아와 거울에 투영된 자아로 분리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욕망하는 자아가 부각된다. “그대는 누구냐?/그대는 나다, 나는 그대”라는 문답을 통해 자아는 “욕망의 수배자”이며 “욕망의 소유자”임을 인정한다. 욕망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욕망으로 인해 갈등하는 자아는 볼품없는 ‘청개구리’다. “착각의 표류자”, “복제된 가짜”로서의 가차 없는 자기 판단은 이후의 심리 변화를 예측하게 한다. 

 한편 “영혼은 깨끗하지도 착하지도 않고 온 데 다 빌붙는다”(「내 영혼에 보내는 허튼소리」 )는 말처럼 시인이 욕망을 말할 때는 짓궂을 만큼 직설적이기도 하다. 「동백꽃」, 「고추」, 「욕망」은 어떤 수식도 없이 ‘몸엣것’을 드러내고 있다. 동심을 바라볼 때처럼 웃음을 선사하지만 “안에 감추어진 불더미”와 “빠알간 눈물”, “붉은 눈”은 욕망하는 자의 슬픔을 엿보게 한다. 시인은 「꿈의 기원」, 「회상몽」에서 욕망의 기본 텍스트로서 꿈을 파악하기도 한다. 소원성취로서의 꿈(“꿈은, 밤의 창녀다”)과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욕망이 비롯된다는 꿈의 기원(“꿈의 시작은 동굴에서다”)까지. 착각과 복제의, 갈등의 이중적 존재가 ‘그림자’로 비유되고 있다. ‘가면’이 현실적 자아의 단편적 모습이라면 ‘그림자’는 분리된 자아의 총체적 모습이겠다.

 욕망의 탐색, 그 끝은 어디일까. 탄생과 성장의 시간에서 소멸의 시간 축으로 삶이 이동해가면서 근원에 대한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죽음과 삶이 맞물려 욕망을 충동하기 때문이다. 「고향의 고향」, 「서늘한 기억의 집」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다. 태초의 고향은 우물 단지, 동굴, 보름달로 형상화하면서 결국 어머니의 자궁에 이른다. 종종 산(山)―얼마나 많은 산이 호명되는지―이 실재적, 상징적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배꼽이다」는 욕망의 종착지를 극명하게 선언한다. 배꼽은 어머니와 나의 인연의 끈이며, 존재의 구멍이며, 우주의 중심이다. “어머니의 젖 냄새, 살 냄새”가 그리운 시인은 근원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자화상 3 : 날개-     



내가 찾는 꿈이었나 봐

몸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 

어둠 속에서도 무섭지가 않나 봐

그만큼만 날고 싶어 훨훨

파란 바다 위를 날아도 

어린 날갯짓이 무섭지도 않나 봐

내가 찾는 꿈 날개를 훔치는 것

내가 찾고 있는 꿈이었나 봐 

날고 싶어 훨훨

꿈이 날아가도 무섭지 않나 봐 

그만큼만 날고 싶어 훨훨

내가 찾는 꿈 날개를 접는 것

생목숨에 붙어 있는 나비 한 마리 

하루가 무섭지 않나 봐

그만큼만 날고 싶어 훨훨 

세상이 무섭지도 않나 봐

내가 찾는 꿈은 

날개를 만드는 것이었나 봐

                                                                             ―「은빛 나비」 전문     



 자화상의 세 번째 국면은 삶과 시에서의 궁극의 꿈을 그리고 있다. “비워야지 털어내야지”(「자화상」), 구축하고 축적하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의 꿈. 그것은 죽음을 가까이 경험한 후에 더욱 강화된다. “눈 감고 먼 곳 나의 집을 보”는 「파묘」의 경험과, 직접 죽음의 시간을 호흡했던 「그 남자의 방」 507호 병실. 소멸과 소생의 강렬한 체험은 이후의 삶을 재조정하며, ‘날개-꿈’에 몰두하게 한다. 

 나비, 목어, 솟대는 외형적 혹은 존재론적 ‘날개’를 가진 객관적 상관물이다. 목어(木魚)는 “날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업장(業障)”(「기왓장 경문」)을 지고 있지만 “잉어의 굳비늘 지느러미 날갯짓”으로, 솟대는 “새처럼 날고 싶은 바람”(「솟대」)으로 날개를 가진 나비와 동일해진다. 시인은 구속된 존재로서 목어, 솟대와 동일시하는 동시에 나비에의, 날개-꿈에 동참하는 것이다. 「은빛 나비」는 동시처럼 단조로운 리듬으로 “날개를 훔치는 것”에서부터 “날개를 접는 것”, “날개를 만드는 것”까지의 날개-꿈을 변주하고 있다. 시인은 비상하는 나비의 날개-꿈과 흡사한 집을 꿈꾸기도 한다. “지붕 없는 자유”, “민들레 같은 집”(「집을 꿈꾸며」)을 꿈꾸는 것이다. 이 집은 곧 「자화상」 3의 “그림자 자리”와 동일하다. 소멸하기에 좋은 “그림자도 침묵하는 고요한 그곳”이다. 이성적 자아와 욕망의 자아가 “그림자 자리”에 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분별심이 사라지고 고요한 소멸의 장소에는 아름다움(“아름다움이 여여란다”―「여여(如如)하신가」)만이 남으리라.      


엎질러진 감잣국이 생각나는 도톰한 저녁이다

대파 껍질 우려낸 어머니의 아릿한 손맛

해거름 노을처럼 어슷어슷 썰고

평상 밑으로 기어드는 해넘이 긴 하루를 배웅하며

반달 썰어 허기 담고 

일렁이는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 

연기처럼 샐쭉하다

토닥이는 잉걸불 희디흰 여름밤을 사위고

잔별들 소곤소곤 속삭임

찰랑찰랑 어둠이 모여드는 그곳, 

반딧불은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을 유유히 날고 있다

구수하게 눈물 우려낸 

어머니의 감잣국 맛에 스르르 잠들면

아롱아롱 깊어만 가는 여름밤의 물빛 추억 

새벽이슬처럼 또렷하다

감잣국 안주에 술맛이 살찬 서러움은

아마, 어머니의 마른 허기일 터

                                                                                               ―「감잣국」 전문   


  

 김형출 시인의 자화상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삶과 우주의 원리를 종합하고 분석하는 이성적 자아와 근원으로의 회귀를 욕망하는 자아, 모든 분별심 너머의 자유를 꿈꾸는 자아를 보여준다. 세 국면의 자아는 분명하게 분리되거나 순차적이지 않다. 시인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충동하는 힘이다. 시는 세 국면의 자아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데, 이성적 자아와 소멸을 꿈꾸는 고요한 자아가 시를 끌어갈 때는 관념적이거나 피상적 세계에 머물곤 한다. 구체적인 경험일지라도 평면적 설명이나 심정의 토로이기 쉽다. 그러나 근원 회귀를 꿈꾸는 자아가 어머니를 노래할 때는 우리에게 색다른 감각을 환기한다. 

 「감잣국」은 어린 시절의 여름밤, 어머니가 끓여준 감잣국에 대한 회상이다. 특별할 것 없는 여름밤의 묘사와, 어머니와 음식에 대한 추억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 평범한 언술로 하여 시가 되게 하는가. “도톰한 저녁이다”에 답이 있다. “도톰한 저녁”은 “엎질러진 감잣국”이라는 사적인 기억과 두툼한 감자 조각, 어머니의 눈물이 한데 엉겨, 현재의 여름밤에 지속적으로 불리어온다. “어머니의 아릿한 손맛”과 “어머니의 마른 허기”를 맛보는 시인에게 밤은 서럽게 도톰해오는 것이다. “도톰한 저녁”은 깊은 우물과도 같이 어둠 속에 차오르는 개별적―시인으로부터 독자에게 건네진―분위기를 반향한다.      

 시인은 “아직 거뜬하고 물컹”(「수상(手相)」)한 진흙덩이다.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고 거센 화염 속에서도 살아남는 붉은 얼굴을 빚기를 바란다.



출처: <시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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