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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Oct 24. 2022

고단한 남부장

손 있는 날. jpg

불 꺼진 방 안에서 그는 허겁지겁 비행기표를 검색한다.       


말하자면 그에게 오늘은 손 있는 날이었고 운수 좋은 날이었다. 

하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쁜 연말, 연달아 직원 셋이 퇴사를 하겠다고 했다. 

둘, 엑셀 명단을 하나씩 밀려서 정리를 한 직원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메일을 받고 그에게 전화로 한참 화를 냈다. 

셋, 여섯 시가 되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털고 간 직원, 그 직원이 하기로 한 일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다.  

넷, 거래처는 행감이다 국감이다 이유를 들어가며 갑작스레 서류를 그리고 자료를 만들어 내란다. 그것도 바로 내일까지 말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직장생활 이십 년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것만 같다. 일은 하면 할수록 쉬워지는 것도 모르겠고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흔히 말하는 경험과 전문성이 쌓이기는커녕, 욕이 그리고 화만 쌓여간다. 변해 가는 세상 속에서 그만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것만 같다. 영영 이렇게 멈춰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고 있을 생각을 하면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일과 함께한 이십여 년을 돌아보면 좋았던 순간도 있다. 특히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그랬다. 일도 잘 풀리고 주변의 동료들도 늘어가고 안팎의 지지와 인정을 통해 어깨가 으쓱했던 순간순간들. 물론 어떻게 좋기만 하겠나. 일을 하다 보면 빡치는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경험, 턱이 아플 정도로 이를 빠득 빠득 갈게 되는 순간도 있다. 그래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빡치는 경험보다 일로 인해 얻은 것이 더 많아서였을 텐데.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고 결과를 냈을 때의 성취감, 떳떳하고 당당하게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가꿔 나가고 있다는 당당함까지. 결코 일이 아니라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감정과 경험을 통해 그 자신의 장점과 가능성을 발견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일 덕분에 이만치 자랐다.   


그런데 요즘 그는 곧잘 이걸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회복 탄력성이 곤두박질친다.   

이전이라면 그냥 넘겼을 자잘한 스트레스가 그에게 쉽게 상처를 남긴다. 동료와 가볍게 웃어넘겼던 일인데 요즘 그는 혼자서 그 일을 씹고 뜯고 맛보고 되새김질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힌다. 하루 푹 쉬면서 잘 자고 잘 먹으면 산뜻하게 한 주를 시작할 힘을 얻기도 했는데, 지금은 삼일을 내리 쉬어도 피곤은 이빨 사이 치석 마냥 있는 줄도 몰랐는데 거기 계속 있는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모른다.   

무엇보다 별거 아닌 일에 별안간 화가 솟구칠 때면 그 ‘화’가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부장님, 이건 제가 확인 해면될까요?”라는 직원의 질문에도,  

“이렇게 해보면 더 효과가 클 것 같아요, 어때요?”라는 팀원의 제안에도,  

“요즘 좀 힘들어 보이네, 무슨 일 있어?”라는 동료의 말에도,  

당황스러울 만큼 불뚝불뚝 화가 몰려온다.  

서슬 퍼런 화에 이어서 찾아오는 건 벌건 부끄러움이다. 그 부끄러움이 너무 선명하고 생생해서 그는 고개를 들 수가 없고 그래서 오래오래 후회와 자책에 시간과 마음을 쏟는다. 이것만 해도 그렇다. 부끄러움에 대한 탄력성도 몹시 떨어진 게 아니고 뭐겠나. 이불 킥 한 번이나 회사 사정을 모르는 친구와의 카톡 몇 줄이면 별일이 아닌 게 되어버렸는데, 지금은 부끄러움이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아, 내가 왜 이러지?’ 

‘이게, 이럴 일이 아닌데, 왜 그러지?’

‘아, 왜 이렇게 힘들지?’

‘이렇게 하는 게, 이게 맞나?’  

인생 참 고단하게 산다 라는 혼잣말이 그리고 한숨이 는다.  


그 흔한 재충전이라는 거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그것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재충전이라는 건 충전이 앞서 있고 다시 충전을 한다는 뜻일 텐데 말이다. 이렇게 별거 아닌 걸 따지고 드는 것부터가 글러 먹었다. 재충전이라는 말이 주는 식상함에 그리고 가벼움에 시작도 하기 전에 입꼬리부터 올라가는 그다.  

얼마 전 신혼여행을 떠난 직원이 처음으로 부럽다. 결혼이 아니라 신혼여행이라는 핑계를 거머쥔 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이제 두서없는 원망이 이어질 차례인가 보다. 맥락 없이 모든 건 다 때가 있다는 옛말이 가슴을 때린다. 그 ‘때’라는 것을 놓쳐서 그가 이러고 있나 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그래서 그게 뭐가 어때서 라는 또 다른 원망이 차오른다. 때맞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이 아닌 다른 우선순위를 곁에 두고 있는 사람에 비해 그는 오직 일 뿐이다. 그 모든 게 그가 선택한 것인데도 부아가 솟고 원망이 쌓이고 스스로가 그저 가엾다. 일로만 채워진 일상 거기에 딸려 있는 부담감, 불안감, 외로움 같은 것들이 혀를 날름 거리며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때가 되면 그를 냅다 채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그 혼자 화내고 위로하고 원망하고 다시 또 화를 내는 끝도 없는 인생의 회전목마다. 모름지기 놀이기구는 아쉬운 마음이 들 때쯤 끝나야 재밌는 법인데 이놈의 분노 원망 사이클 회전목마는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이럴 땐 여행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들 한다. 그도 한때는 여행이 도움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이천만 원어치 항공권을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솟고 그랬다. 

‘그래, 여행. 여행을 가는 거야.’ 

‘한마디도 말을 못 알아듣는 낯선 곳에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루에 이만 오천보씩 걷는 거야.’      

하도 오랜만에 항공권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서 그런가. 로그인부터가 숙제요 미션이요 빌어먹을 일, 그래 이것도 일이다.  결국 본인인증을 다시 하고 (내가 나 임을 인증해야 하는 일 왜 이렇게 잦나. 기술은 끝도 없이 발전하면서 이런 것도 아직 해결 못하고. 하이고 이쯤 하고 말자), 비밀번호를 바꾸고 나니 벌써 지친다.      


여기서 멈추지 말자. 힘을 내자, 힘을 내. 

가는 날을 선택해야 한다. 가는 날, 휴가를 낼 수 있는 날 말이다. 

‘그래서, 여행을, 언제, 갈 수 있지?’ 

평일 2일 주말을 붙여서 4일, 대여섯 시간 비행시간이라고 하면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그럼 여행지에서 이틀 정도를 보내게 되는 거다.  

‘그런데 날짜는 언제로 할 수 있을까. 연말은 도저히 안 될 거고, 연초는 좀 나을 텐데 그래도 3일 이상은 무리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벌써 김이 새 버렸다.


여기서 멈추지 말자. 힘을 내자, 힘을 내.  

2023년 1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선택해본다.  

오키나와.

참 따뜻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비행기 값이 원래 이렇게 비쌌나.’ 

삿포로. 

영화에서 본 풍경이 그림 같았다.   

‘시간이 꽤 걸리네.’  

그다음으로 방콕을 마지막으로 홍콩을 검색한다. 

이쯤 되니 여행지를 고르는 게 아닌 적당한 시간대와 가격대를 고르는 거 같다. 

오키나와 해변에 앉았을 때 온몸을 감싸던 따뜻한 햇살도, 

‘늬씌 뽤로마’라고 깔깔대며 하늘에 닿을 것 같은 홍콩의 빌딩을 바라보던 예전의 그날도, 

눈이 시릴 만큼 하얀 눈이 허리 높이까지 쌓여있는 곳에 빨간 목도리를 하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모두 뒤로 하고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시간을 확인하니 자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겼다. 

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내일의 일정 이어서 내일까지 해야 할 일 그리고 기한이 정해진 몇 가지 일에 대한 생각이 줄줄이 떠오른다. 이 모든 일들이 밤새 그 혼자 고민으로 끙끙 앓아도 바뀌는 것이 크게 없다는 것을 안다. 길고 단 잠을 자고 난 후에 그만그만한 걱정거리를 해결하고 나면 다른 일이 덤벼들 힘이 좀 날 테고, 그를 괴롭히는 불안은 어제보다 몸집을 줄인 채 그 앞에 놓여있을 수 있고, 잘하면 ‘이건 그저 일일 뿐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일단은 걱정과 불안 대신 대책 없는 희망을 가득 품고 자리에 눕기로 한다.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을 한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꿈도 없는 길고 긴 잠뿐이다. 


‘우선은 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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