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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Dec 20. 2022

엔딩 크레딧

01. 엔딩 크레딧 

“엄마, 나 죽으러 갔다 올게.” 

뭐라 뭐라 대꾸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통수에 달고 문을 나선다. 

말 그대로다. 나는 오늘도 죽으러 가는 길이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굳어 있던 몸을 푼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관절을 하나씩 확인하며 이완한다. 다음으로 회전을 할 차례다.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발목, 무릎, 손목을 회전한다. 녹색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얼굴 근육을 움직인다. 전철역에 다다른 지점, 인적이 드는 골목에서는 소리를 내서 목 상태도 점검한다. 

‘오늘은 왼쪽 팔을 뒤로 꺾는 동시에 오른쪽 무릎을 꺾으면서 쓰러지면서 죽어보자.’ 


전철 두 번과 버스 한 번을 갈아타고 도착한 곳, 이곳이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죽고(살아났다 다시 죽는 걸 반복하고) 있는 장소다. 나는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킹덤」의 두 번째 시리즈에 아마도 나올 예정인 좀비 77이다.

“어이. 럭키 세븐 세븐 왔는가?” 

저 앞에서 나를 보고 반갑게 다가오는 그, 좀비 18이다. 벌써 분장을 마친 모양인지 차림새가 살벌하다.    

“어이 십팔 좀비. 오늘 분장 좀 잘 먹었는데?”

살벌한 차림새와 다르게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선 단내가 난다. 오늘은 피 분장에 설탕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벌레 꽤 꼬이겠네, 벌에 쏘이지 않게 조심해야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우리 주변으로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피칠갑을 한 좀비들이 가득하다. 촌락으로 꾸며놓은 세트 주변으로 좀비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흡사 가을철 논밭에서 볼 수 있는 동그란 흰색 짚풀 더미 같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마시멜로를 떠올리겠지만. 한 달 전의 나였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앞으로 그걸 보면 지금 이 촬영 현장을 떠올릴 거다. 논밭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짚풀 더미와 지금 풍경이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하나, 주변의 좀비들 손엔 핸드폰이 들려있다는 정도일 거다. 누군가는 게임을 하고 누군가는 다음 캐스팅 일정을 체크하고 누군가는 드라마를 보며 키득 거린다. 얼굴에 피딱지가 있고, 옷은 뜯기고, 팔과 다리엔 피가 줄줄 흐르지만 공기 중에 심각함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이곳은 치열한 연기의 현장이라기보다 생활감이 잔뜩 묻어나는 시장통 풍경과 비슷하다.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네.”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좀비 18이 말한다.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죽는 것도 이제 끝이다 끝.”

홀가분한 마음을 담아 말했지만 말끝에 쓸쓸함이 달라붙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좀비 18과는 촬영 첫날 만났다. 좀비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5킬로그램가량을 감량한 나는 첫 신에서 가뜩이나 없는 기운을 짜내서 메소드 연기를 펼친답시고 악을 쓴 참이었다.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쉬는 시간 동안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저기요, 그렇게 소리를 막 지르면 목 금방 나가요. 살살해요. 어차피 후시로 소리는 다 따로 따니까.” 이렇게 말하며 그는 나에게 복숭아 맛 마이쭈를 건넸다. 

“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가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이거, 나만 아는 비법인데요. 이거 마이쭈를 먹으면 침이 입안에 좀 돌 거든. 그 상태로 입을 크게 벌리면 침이 자연스럽게 흘러요. 좀비 리얼리티는 뭐다? 침. 바로 침이에요. 디테일 알죠? 결국 한 끝 차이가 디테일을 만드는 거거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복숭아 맛 마이쭈가 연기의 묘약이라도 된 듯 신비로워 보였다. 홀린 듯 받아 든 마이쭈를 입안에 녹이며 먹다 보니 디테일은 모르겠지만 긴장된 몸과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이쭈 하나로 이름 없는 좀비에서 좀비 18이 되었다는 그의 말을 들어서였을까. 과연 좀비 18의 얼굴에서 대배우의 위엄이 언뜻 스치는 듯도 싶었다. 


좀비 18에게 참 많은 걸 배웠다. 그는 킹덤 시즌 1부터 출연했고 그밖에 꽤 많은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나름 다작 배우라고 했다. 한 번에 빵 하고 뜨는 건 본인 체질이 아니라고 뭐든지 차곡차곡 계단을 밟듯 쌓아 올라가는 게 본인의 철학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진지했다. 

‘하나하나’ ‘차곡차곡’

그런 게 이 바닥에서 가능한 일이던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과거의 얘기가 된 지 오래인데 하물며 엔테터인먼트 업계에서 당초 그런 게 존재한 적도 없지 않은가. 성공한 배우 몇몇은 본인이 개천 출신이라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모양인데 글쎄, 과연? 그리고, 무엇보다, 개천에서 나올 용이 다른 곳에서 나왔다면 더 일찍, 더 잘 됐겠지. 좀비 18의 이야기에 나는 그저 ‘하나하나’ 그리고 ‘차곡차곡’ 의심만 쌓아갔다. 인생철학은 나와 달랐지만 좀비 18 그는 과연 다작 배우답게 아는 게 참 많았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을 본인만의 비밀로 간직하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나에게 마이쭈를 건넨 얼마 후 첫 촬영에 나선 좀비 101에게 마이쭈를 건네는 걸 봤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꽤 많은 좀비가 입에 뭔가를 오물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좋은 건 여럿이 나눠야 배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나 좋은 건 혼자 알고 있을 만큼 입이 무겁지가 않은 타입, 그게 바로 좀비 18이었다. 그의 철학 혹은 가벼운 입 덕분에 여러 가지를 배웠다. 팔을 어떻게 꺾어야 인대를 다치지 않는지(꺾는 듯 보이지만 꺾지 않는 게 포인트라고 했다. 언뜻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해보니 그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핫팩을 어디에 붙여야 가장 따뜻한지(허벅지 뒤쪽은 하수들이나 하는 거라고 했다. 뒷목 아래 10센티 위치, 바로 거기가 우리 몸의 온열 버튼이라고 했다),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분장 전 세타필을 꼭 바르라고 했다.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 배우가 세타필 바르는 거 봤냐고, 대배우가 온몸에 덕지덕지 바를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했다)까지 모두 그에게 배웠다. 이것이 그가 말한 차곡차곡 일까. 좀비 18이 알려준 것들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하나씩 해보고 그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고부터 나는 은근슬쩍 그의 ‘차곡차곡’ ‘하나하나’라는 계단에 발을 걸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나보단 둘, 둘보다는 셋, 이라는 노랫말도 있지 않나. 그러니까 외롭지 않게 그렇게. 누가 아나. 그렇게 하다 보면 좀비 18이 말한 것처럼 혼자 일 때보다 더 높이 그리고 오래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촬영 회차가 더해갈수록 좀비 18에 대한 신뢰가 그리고 호감이 쌓여갔다. 그를 향한 신뢰와 호감의 결정체가 있었으니, 좀비 3-3-4 워킹이라는 것. 지금까지 것들은 잊어버리더라도 이건 잊어서는 안 된다며 337 박수를 기억하면 쉬울 거라며 설명하는 그의 눈이 유난히 반들거렸다. 대배우들은 안광이라는 것이 특별하다고 하던데 그의 안광은 뭐랄까, 특별하다기보다 특이했다. 

맨 앞의 3걸음은 미친듯한 속도로, 다음 3걸음은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느린 속도로, 마지막 4는 목 어깨 무릎 발목 순으로 비틀며 걷는 것. 이것만 기억하면 어떤 사람도 좀비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말로 들어서는 잘 알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듯 내 어깨를 몇 번 토닥인 후에 그는 시범을 보이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주 잡은 손을 비비며 준비를 하는 그 주변으로 주변 좀비들의 시선이 쏠렸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얼마 동안 즐기는 듯싶던 좀비 18이 별안간 337 워킹을 선보였다. 그의 말처럼 맨 처음 3걸음은 눈으로 쫓아갈 새가 없을 만큼 빨랐고, 다음 3걸음은 늘어난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할 때처럼 느렸고, 목 어깨 무릎 발목 순으로 비틀며 걷는 그의 몸짓엔 절도가 있었다. 연거푸 세 번 정도 3-3-7 워킹을 선보인 그의 눈은 특이한 안광으로 번들거렸고 그의 입술 끝엔 마이쭈 때문에 과도하게 흘러나온 침 때문에 축축했다. 그의 말을 따라 워킹을 몸에 익히고 보니 대부분 좀비의 행동거지는 3-3-4로 설명이 되었다. 좀비의 걸음걸이 혹은 뜀박질은 대부분 3-3-4 워킹의 응용 버전이었다. 운동경기에서 337 박수가 모두를 한마음으로 이끄는 것처럼, 3-3-4는 모든 좀비를 하나가 되게 했다. 3-3-4 워킹으로 하나가 되는 좀비 떼.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친 좀비 떼가 다가오는 풍경은 장관이라 할 만했다. 언뜻 불규칙해 보이지만 그 안에 질서와 리듬이 있었고, 그 질서와 리듬 안에서 개별 좀비들은 좀비 떼로 분했다. 각자의 독립공간을 지키면서 상대방의 공간도 배려하고 한 신을 완성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원동력은 3-3-4 워킹에 있었다. 


평소와 달리 방송국 카메라가 여럿 보인다. 마지막 촬영이라고 오픈 프레스를 하는 모양이다. 그를 비롯한 좀비를 한 바퀴 빠르게 훑고 지나간 카메라는 주연 배우들 주변을 한참 머무른다. 좀비 떼의 주변엔 단내를 귀신같이 맡고 들러붙기 시작하는 날벌레가, 주연 배우의 주변엔 각종 방송사의 카메라가 들러붙는다. 주변을 맴도는 이름 모를 벌레와 벌이 성가신 것처럼, 저 배우들도 주변에 가득한 카메라가 성가실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기분을 맛볼 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올까. 마지막 촬영이라 새삼 감상에 빠지는 건가.  

“어이, 럭키 세븐 세븐. 우리도 이제 준비해야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서는 좀비 18을 따라 나도 일어선다. 나란히 마주 선 나와 좀비 18은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양손을 쭉 펼치고 서로 손을 마주 잡은 후 허리를 숙인 다음 양팔과 어깨를 쭉 펴고, 그 상태로 발꿈치를 위로 들어 무릎과 발목도 푼다. 포개져서 얼굴은 바닥을 향한 채 양팔과 어깨 근육을 풀던 중에 좀비 18이 불쑥 말한다.   

“다음 시즌도 하겠지?”

좀비 18의 목소리엔 차곡차곡이라는 인생철학을 자신감 있게 말하던 그 답지 않게 의심과 걱정이 묻어있다. 그 역시 마지막 촬영이라 감상에 빠진 걸까.   

“이번에 반응이 좋으면 하지 않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멋대로 답을 한건 이렇게라도 해야 나와 좀비 18 모두 힘이 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답을 모르는 건 매한가지인데 기왕이면 좋은 답을 하는 게 좋겠지. 

“그럼 럭키 세븐 세븐, 다음 시즌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파이팅!”  

언제 시무룩했냐 싶게 얼굴을 가득 구기며 웃는 좀비 18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주름 사이사이 피부가 터지고 찢긴 분장이 되어 있어 웃는 얼굴이 어쩐지 기괴하다. 거기에 특이한 안광까지 더해지니 그는 촬영을 시작할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나도 얼른 분장받고 올게.”     


분장을 받으러 자리에 앉아 음악을 재생한다. 언제나 분장을 받을 때, 좀비로 변할 때, 나의 플레이 리스트는 하나다. 엄정화의 [엔딩 크레딧]. 노래의 시작 부분 웅장한 도입부를 들으면 몸과 마음이 정돈된다. 내 이름이 새겨진 엔딩크레딧을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고. 노래를 주문삼아 그런 바람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달까. 얼굴에 닿는 분장사의 거친 손과 귓가에 울리는 노래와 함께 나는 본격적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간다.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피 분장이 입술 끝에 묻는다. 혀를 내밀어 은근히 맛을 보니, 역시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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