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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Dec 26. 2022

엔딩 크레딧

02. 나에게 넌, 자전거 탄 풍경 

좋다, 싫다 보다 최악은 별로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축제가 별로다.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일 중에 별로인 일이 많다는 게 문제다. 나는 오늘 평소 별로라고 생각하는 축제 현장에 내 발로 걸어서 왔다. 돈을 벌려면 별 수 있나.  


킹덤 시즌2가 무사히(내가 무사히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방영되고 시청률과 평단의 좋은 반응(얼씨구? 이동진이야 뭐야)을 얻었다. 다음 시즌이 확정된 모양이다. 비록 전편을 몰아보고 한편씩 집중해서 봐도 나의 얼굴이 식별 가능할 정도로 나오는 장면은 없지만. 예상은 했어도 기대도 좀 했던 터라 누구한테랄 거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 

방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 18이 전화를 했다. 좀비 18은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각도와 분량으로 얼굴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전화를 거는 좀비 18의 목소리가 밝았다. 축하 인사를 전하는 내게 좀비 18은 그 신은 두 번째 컷의 연기가 좋았는데 아무래도 네 번째 컷이 쓰인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누가 알겠냐 싶지만 누구긴 누구겠나, 바로 그가 알겠지. 그리고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얼굴 한번 보자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는데 빈말이 아니었음에도 사는 게 바빠 연락을 통 못했다. 이번에도 좀비 18이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거였다. 그런 좀비 18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좀비 럭키 세븐세븐, 어떻게 지내?”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래도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주는 건 좀비 18 뿐이네.” 나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그가 껄껄 웃으며 말을 받는다. 웃을 때 잔뜩 구겨지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순간 그가 그리웠다. 

“다른 게 아니라 알바 하나 안 할래?” 


좀비 18의 얼굴도 보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를 노리고 간 곳에서 나는 투구를 쓰고 한 손에는 비누 방울이 나오는 총을 들고 서 있다. 이런 옵션이 있는 건 몰랐지만 이건 일속이조라고 부르기엔 뭔가 밑지는 기분이긴 하나 그래, 뭐 대충 넘어가자. 저 앞에서 요란한 색깔의 뽀글이 가발과 코가 달린 선글라스를 쓰고 나와 마찬가지로 비누 방울이 나오는 총을 들고 있는 좀비 18도 있지 않은가. 그는 오늘도 축제의 주최 측으로 오해를 살만큼 열심이다. 

축제 현장은 테마파크 콘셉트로 꾸며져 있다. 돌담이 마주 보고 있는 도로의 양쪽 끝을 막아서 차량이 들어올 수 없게 하고 보도 앞을 따라 차려진 몽골 텐트가 스무 개가량 보인다. 각종 체험 프로그램, 빵과 커피 판매, 어쿠스틱 공연, 다채롭다. 나와 좀비 18은 여기서 진행알바이라기엔 호객알바에 가까운 역할이다. 주최 측 진행 스텝은 이 행사의 콘셉트가 테마파크임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라며 내 손에 투구와 비눗방울을 쥐어주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눠준 소품은 힘들더라도 꼭 착용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머리통이 작은 편도 아닌데 투구는 자꾸만 흘러내리고 돌아가서 자주 눈구멍이 막혀버린다. 오가는 사람도 투구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비눗방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참 좋아들 한다.      


나와 같은 처지의 호객 알바는 총 일곱 명이다.  

꽤 높은 시급을 주기 때문에 연극영화과 출신이나 배우 지망생으로 지원자를 제한했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저기 망토를 걸치고 있는 친구도, 피에로 신발을 신고 있는 친구도, 오징어게임 가면을 쓰고 있는 친구도 모두 소위 전문인력이라 그거구나. 역시 좀비 18은 가장 먼저 나서서 통성명을 하고 열심히 해보자며 기운을 불어넣는다. 호객 스텝의 가장 큰 무기인 비눗방울 제조기에 비눗물을 세 번째로 채우고 돌아서는데 좀비 18 앞을 지나던 사람 하나가 알은체를 하는 게 보인다. 순간 그 사람 목소리를 들은 그의 몸이 순간 멈칫한다. 누구길래 저럴까. 여자는 8살 정도 되는 아이 한 명과 손을 잡고 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 남자가 3살 정도 되는 아이를 안고 있다. 여자는 몹시 반갑다기보다 의외의 장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오는 반가움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여자의 소개에 따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던 남자도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어쩐지 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아이들은 비눗방울에 관심을 보이고, 그런 아이를 신경 써서인 듯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좀비 18은 비눗방울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슝’ ‘슝’ 소리와 함께 비눗방울이 그들 주변을 감싼다. 뮤직뱅크 컴백 무대 같다고 생각하며 킥킥거리고 있는데, 곧 4인 가족은 행사장을 떠나고 좀비 18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아는 사람?”  

“아. 뭐라고 설명해야 적합할지. 말하자면 일종의 내 마지막 사랑?” 

“그렇구나. 마지막 사랑.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마지막 사랑님아, 마지막까지 자알 먹고 자알 사세요 그랬어?” 


상투적인 이야기였다. 연기과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 CC로 시작해 졸업하고도 한동안 연기의 꿈을 키우던 젊은 연인. 고단한 생활과 희망 고문에 지쳐갈 때쯤 여자는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보기로 결심했다고 좀비 18에게 말했다. 그런 여자를 말릴 염치가 그에겐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결정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여기까지 들었을 즈음 그 상투적인 스토리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좀비 18, 내가 뭐 의심하고 그런 건 아닌데, 이거 진짜 너 얘기 맞는 거지? 영화나 드라마 얘기 아니고?”  

내 얘기에도 좀비 18은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우연한 만남이 가져온 추억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드는 중인가 보다.  

“그런데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나한테 원하는 게 딱 하나 있다는 거야.”

“그래? 설마 그동안 사준 거 내놔라 뭐 이런 건 아니길 바란다.”  

“자전거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  

그녀는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줄 테니 언젠가 함께 한강 자전거 데이트를 가자던 좀비 18의 말을, 정작 그 말을 뱉은 당사자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 말을 근거로 한 말이었다. 영원할 것 같던 행복만큼 언제든 가르쳐 줄 수 있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이제 그에게 기한이 정해진 숙제처럼 다가왔다. 

“자기가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면 말이야.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헤어져서 각자 인생을 살자고 하더라고.”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었기 때문에 좀비 18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자전거 위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데만 집중하라고 그러면 곧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될 거라고 말을 하면서도 그는 그녀가 영영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못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좀처럼 바퀴를 굴리지 못하고 몇 바퀴 굴린 후에는 바닥에 넘어져 버리는 그녀를 보면서 그의 바람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품었다. 

“어릴 때는 뭐든 빨리 배우잖아.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근데 나이 들어서 뭐 하나 배우는 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요. 몸은 무디지 넘어져서 다칠까 봐 겁은 나지. 좀처럼 늘지가 않더라 실력이.” 

좀비 18은 그녀가 이제 그만두겠다고, 자전거 까짓 안 배우거나 나중에 배우면 된다는 말을 하기를 바랐다. 그 말에 대한 대답도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또 배우고 싶을 때 그때 내가 옆에서 자전거 가르쳐 줄게. 그때까지 내가 너 옆에 있을게.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이렇게 말하려고 했어. 근데, 걔가 말이야. 정말 악착같이 이빨을 꽉 깨물고 자전거를 기어이 타려고 하더라. 내 속마음을 아는 것처럼 말이야.”  

처음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을 벗어나,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마침내 그녀와 그는 한강으로 향했다. 불과 2주 만이었다. 그녀는 한강에 도착해 자전거를 한쪽에 세워두고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두 캔 사 왔다. 한강이 보이는 곳에 나란히 앉은 그녀와 좀비 18은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홀짝이는 그와 다르게 그녀는 벌컥벌컥 몇 모금 만에 한 캔을 비웠다. 그리고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금방 맥주 한 캔을 다 먹더니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앞으로 어디서든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하고 자기 자전거를 타고 가더라. 그게, 끝이었어. 그게 벌써 10년 전이네.”  

통 소식을 전해 듣기 어렵던 그녀를 10년 만인 오늘 우연히 만난 거였다.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녀인 줄 바로 알겠더라고 말하며 좀비 18이 웃는다. 평소처럼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긴 한데 왜 슬퍼 보이지.  

“갑자기 만나니까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뭐부터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게? 지금도 자전거 잘 타냐고 물었어. 아, 딴 얘기를 해야 하는 건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근사한 말 같은 거.” 

덕분에 지금도 잘 탄다고, 요즘은 네 가족이 자전거 두 대를 나눠 타고 한강에 종종 나간다고 답했단다. 좀비 18 말처럼 다른 질문을 했다면 뭐가 좀 달랐을까. 별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근데, 이렇게 가발도 쓰고 안경도 쓰고 그랬는데, 나인줄 딱 알아본 거잖아.” 

설마 좀비 18 당신을 그녀가 못 잊은 거 아니냐고 나에게 물으려고 하는 거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순간 좀비 18이 해사하게 묻는다. 

“이게 바로 분장을 뚫고 비어져 나오는 대배우의 아우라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이 말을 꽤 진지하게 했어. 역시는 역시, 바로 이것이 좀비 18이지. 


“여기 앞에 따릉이 있던데, 오늘 일 마치면 그거 타고 한강 가서 맥주 한 잔 할까?” 

알바를 소개해 준 것도 고마워서 근처 맛집을 몇 개 검색해 두었지만 그의 제안을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다. 한강에 가는 길에 어설픈 나의 자전거 실력이 들통날 테고 좀비 18은 그런 나에게 자전거 잘 타는 비법이라며 몇 가지 방법을 알려주겠지. 그렇게 나를 가르치다 보면 마지막 사랑은 원래 있던 자리, 추억 속으로 돌아가 있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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