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거위 배우의 꿈
나는 맨발로 걸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한적한 흙길이었고 맨발로 걸으면 발은 훨씬 가볍고 걷는 재미가 있었다. 흙과 모래 그리고 작은 돌멩이가 발바닥에 와닿을 때 그 촉감이 기분 좋았다. 신발을 신고 걸으면 알지 못할 길에 대한 기억이 몸에 새겨진달까. 도시에서 자갈이 빼곡하게 박힌 길을 고통을 참으며 걷는 사람을 따라 그 위에 설 때도 나는 아프다기보다는 자갈의 맨질맨질한 촉감을 즐겼다. 원체 발바닥이 두껍게 타고 난 탓이려나.
그날은 한 손에는 신발이 다른 한 손에는 책이 있었다. ‘제인에어’였다. 푹 빠져 읽었던 그 책 말이다. 맨발로 길을 걸어가면서 내 눈은 책 속의 글씨를 따라가는 동시에 머리에서는 등장인물이 행동이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마음은 이야기에 따라 울고 웃고 가슴 졸였다. 온전히 책 속 이야기에 푹 빠져 걷던 그 시간, 추억.
그 추억이 나에게 배우라는 꿈을 꾸게 했다. 책 속 인물을 머릿속에 그리던 아이는 이야기의 힘에 빠졌고 그 이야기가 인물에 의해 살아나는 걸 영화를 통해 확인한 후 관객의 입장에만 만족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다. 그 인물이 되어보지 않고는 영영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모르고 산다는 건 약이 오르고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다.
이렇게 현장에 나와서 종일 할 일 없이 그리고 별일 없이 언제쯤 나를 부를까 기다리고 있으려니 역시 그때 그 책을 덮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제인이 어떻게 살건 말건, 다락방에 숨어 있는 사람이 누구 건 간에, 감추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게 뭐야, 책 속의 것은 그냥 거기 두었어야지, 이 바보야.
그것도 사극이라면 사극인지 킹덤을 찍은 후에 곧잘 사극 영화에서 연락이 왔다. 그게 다 내 얼굴에 서사가 있고 내 몸 선에는 양복보다는 한복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좀비 18의 말은 설득력이 없긴 하지만 꽤 듣기 좋았다. 비록 내가 입고 있는 이 더럽고 찢어진 옷을 한복이라고 부를 수는 있는 건가 싶지만. 그리고 얼굴의 이 검댕 분장은 서사를 검은색으로만 표현하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긴 하나. 저 앞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는 좀비 18이 보인다. 힘을 쓰는 역할이라 몸을 좀 만들어야겠다며 아침마다 동네 얕은 산을 오르며 전화를 걸던 그는 숨을 헐떡이며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했다. 이번에는 무려 병사라고, 살아있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는 산사람다운 생기를 보이며 웃었다. 좀비에서 사람으로. 이런 것도 신분상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좀비로 만난 그와 나는 이번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역할을 하게 됐다. 비록 사람 중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축에는 못 드는 그저 가난한 병사일 뿐이지만.
“얼마 전에 내가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갔거든?”
이번엔 무슨 얘기를 하려나. 다가오는 그를 보니 팔 굽혀 펴기를 끝낸 것 치고 몸이 땀 한 방울 없이 뽀송하다. 두 번은 한 건가?
“앞사람이 주문한 커피를 맞는지 점원이 확인하는 걸 듣는데, 나 부르는 건 줄 알고 대답한 거 있지? ‘엑스트라 사이즈 맞으시죠?’ 이렇게 물었거든 점원이.”
이런 일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긴 하는구나.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그는 엑스트라 사이즈와 단역배우를 일컫는 엑스트라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커피에서 ‘엑스트라 사이즈 주세요’ 할 때는 더 큰 사이즈로 그러니까 더 많이 달라는 뜻이잖아? 그 말대로 하면 영화판에서 엑스트라야말로 뭐랄까 영화에 품격을 더하고 살을 붙이는, 음...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긴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번 해봤어. 어때 내 설명? 영 말이 안 되는 거 같진 않지?”
미안하지만 영 말이 안 됐다. 커피 사이즈 중에는 ‘그란데 사이즈’, ‘벤티 사이즈’도 있는데 영화에서 단역배우 엑스트라가 그의 말마따나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애초에 ‘그란데’나 ‘벤티’라고 부른 건 어떨까라고 의견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그랬다면 좀비 18은 나에게 이제부터 우리는 스스로 엑스트라가 아닌 벤티라고 부르자고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화제를 전환해보기로 한다.
“그건 그렇고, 좀비 18. 너는 어쩌다 배우가 되기로 한 거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답한다.
“그 얘기를 하려면 내게 꿈이 다가온 순간을 얘기해야겠지 아마?”
시작부터 거창하다, 거창해.
“지금 나를 봐서는 상상이 잘 안 되겠지만 말이야. 내가 어려서 정말 숫기가 없었어. 남들 앞에 서면 몸이 얼어붙고, 얼굴은 빨개지고. 누구 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정말 죽기보다 싫었잖아.”
지금 그의 모습을 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과거이긴 하다. 그게 어디든 존재감과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그가 남들 앞에 서기 싫어했다니. 그것도 죽기보다 싫었다고?
“초등학교 2학년 땐가. 내가 교단에서 발표를 해야 했어. 돌아가면서 다 하는 거라 나만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당시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두려운 발표의 순간이 찾아왔고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교단에 선 그는 억지로 말을 시작했다.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가 눈치챌 새도 없이 바지가 서서히 젖어갔다. 바지를 쳐다보며 키득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곧 비명소리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바지가 젖어가는 걸 알아챈 그가 기절을 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더라. 바지가, 참, 뽀송했어. 병원복은 좀 다른 면으로 만드는 건가. 참 바스락거린단 말이야. 여하튼 그 바스락거릴 것처럼 빳빳한 촉감이 아직도 생생해.”
뽀송한 바지 촉감을 느끼며, 원래 입고 있던 바지는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며, 내일 학교를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학교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다시 축축하게 젖어버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쯤 그의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다.
“엄마가 그때 학원 강사였거든. 임용고시 준비하다가 아빠를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뭐 그런 스토리.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한 거였는데. 엄마가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학원 강사였던 거지.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작은 단과 학원 있잖아.”
헐레벌떡 달려온 엄마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데 검지와 중지 사이 흰색과 파란색 분필 가루가 묻어있었다고 했다. 그 분필가루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참 편안해졌다고.
“분필 묻은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더니 엄마가 그러더라. ‘괜찮아. 배우면 돼, 배우면.’”
직업이 학원 강사여서 그랬는지, 그의 어머니는 뭐든 배우면 나아지고 고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거라면 학원에서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학부모 상담을 할 때 한 과목을 더 들으면 아이가 더 나아지고 좋아질 거라고 설득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그렇게 그와 자신을 설득했다. 응급실을 나온 그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의 직장인 204호‘성공단과학원’ 옆 205호 ‘미래웅변학원’에 등록했다.
“웅변 학원 가면 뭐부터 시작하는 줄 알아? 바로 복식호흡. 호흡부터 배워.”
호흡법을 배우고, 둘씩 짝을 지어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며 말하는 법을 배우고, 발표할 원고를 외우고, 청중의 주의를 사로잡는 기술을 배워 나가면서 그를 손아귀에 꽉 움켜쥘 것처럼 거대한 두려움은 점차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만큼 작고 만만해졌다.
“무엇보다 반복해서 학습을 하니까. 실전 경험을 단시간에 무지하게 쌓게 되는 거야.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더라. 결국은 반복 학습 그거지 뭐.”
반복 학습 덕분에 교단 앞에서 발표를 하다 오줌을 지린 아이는 불과 1년 만에 웅변대회 출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대회의 주제는 ‘꿈’이었고,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린 이야기와 학원 선생님의 경험을 살린 첨삭을 받아 원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그는 1등을 했다.
“사실 꿈이랄게 딱히 없었거든 나는. 뭐가 되고 싶다는 그런 감정 자체가 별로 없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것도 되고 싶다 저것도 되고 싶다 말하는 애들을 보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하고 주눅도 들고 그랬어.”
꿈이 없는 아이가 꿈이라는 주제로 원고를 쓰고 그걸 발표해서 우승까지 했다니. 설마 지난밤 꾼 꿈을 주제로 한 거였나 라는 생각이 차오르려는 순간 그가 말을 이어간다.
“내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어. 불과 일 년 전 나는 발표를 하다가 오줌을 지리는 아이였다. 그런데 노력 끝에 나는 오늘 이곳에 섰고 노력의 결실이 빛을 발한다는 것을 지난 1년간 경험했다. 결국 꿈은 노력하는 하루하루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하루하루 열심히 보내고 노력하면 각자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지금 여러분이 꾸고 있는 꿈은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에 달려있습니다.’로 말을 마쳤지.”
역시 그의 경험 한 스푼에 웅변학원 선생님의 첨삭 두 스푼이 더해진 원고라 할만했다. 적당히 감동적이고 또 적당히 교훈적인 그런 이야기. 그리고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
“근데 말이야. 두 번째 줄에 있던 여자아이가 눈물을 흘리는 거야. 그걸 보는데 몸에 정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더라니까? 그 순간 알았지. 내 꿈은 이거구나.”
그날 이후 그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일, 감동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자 진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를 보며 울었다는 그 여자아이가 하품을 하고 맺힌 눈물을 훔치는 순간을 본 건 아니었을지, 여자아이 역시 긴장된 나머지 그가 오줌을 지린 것처럼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을지 그런 의문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건 그냥 머릿속에만 두기로 한다.
“그건 분명히 감동의 눈물이었어. 다른 거였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지. 하품을 했다거나 긴장돼서 흘리는 눈물 같은 거였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었을 거야.”
배우 생활 오래 하면 독심술도 생기고 그러나.
“그렇게 한번 꿈이 생기니까 다른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 요즘도 가끔 그 순간 배우라는 꿈이 나를 선택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해.”
맨발로 걷던 그 길에서 ‘제인에어’의 남은 페이지를 덮어버릴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좀비 18 당신도 꿈이 찾아온 순간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고 묻고 싶어 진다. 당신이나 나나 꿈이란 건 그냥 꿈으로만 남겨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있잖아, 나는. 꿈이 없을 때 보다 꿈이 저기 멀리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너도 그렇지 않아?”
역시 독심술이 있긴 하네.
그런 의미에서 장차 본인의 팬클럽 이름은 ‘드리머’가 좋겠다고 무려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이것 역시 꿈의 한 장면은 아닐까 싶지만, 꿈이 있어 행복하다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나 역시 맨발로 책을 읽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대도 그 책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배겼을 테니까.
흙바닥에 팬클럽 ‘드리머’의 로고랍시고 아무리 봐도 낙서 같은 그림을 끄적이는 좀비 18의 해맑음이 마음에 든다. 책장을 덮었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를 상상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나는 지금 여기 무해한 존재 좀비 18 옆에 있고, 그도 나도 꿈 깰 생각은 없는걸. 긴 대기 시간이 드디어 끝난 모양이다. 구역별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드리머’를 중얼거리며 걷는 좀비 18 옆을 따라 걸으며 말을 보탠다.
“팬클럽 이름 말이야. ‘드리머’ 보다는 ‘거위’ 어떠냐? 거위의 꿈 노랫말에서 착안한 건데, 은유 적이고 괜찮은 거 같은데 말이야. 꿈꾸는 거위들과 함께하는 배우 이런 느낌으로, 어때?”
얼굴을 구기며 웃는 걸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드리머’ 든 ‘거위’든 거기 가입할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나야, 좀비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