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오키나와
푸른 바다가 들어가는 노랫말이 잔뜩 떠오르는, 그런 노랫말의 실사판 같은 바다였어. 두 시간만 비행기를 타면 한겨울인 곳에서 이렇게 따뜻한 곳으로 올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는 노인네 같은 생각을 했어.
‘세상 참 좋아졌다.’
좋다는 여행지나 식당에 갈 때마다 엄마 아빠는 그 말을 했거든. 세상 참 좋아졌다고 말이야. 대충 찍어도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진이 나오는 그곳에서 실컷 웃고 떠들었어. 목이 쉴 정도로 수다를 떨다가 맥주를 마셨지. 그 바다에서 머무른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이 오키나와의 첫인상이었어. 아름답다, 그림 같다, 여기 계속 있고 싶다, 그런 생각만 한 것 같아. 거기 있는 내내.
같은 곳이더라도 어느 때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여행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 어떨 때는 달의 앞면처럼 환한 모습을, 어떨 때는 달의 뒷면처럼 어두운 모습을 말이야. 아니, 달은 그냥 거기 그대로 있을 뿐이고 나 때문에 달리 보이는 것이겠지. 결국 환한 달을 보면서 걷느냐 달을 등지고 걷느냐의 차이이려나. 이런 거 보면 사람이 참 간사해. 이 말도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인데. 중국집에서 엄마는 짜장면을 나는 볶음밥을 시켰을 때였어. 먹기 전에 볶음밥을 앞접시에 담아 드리니까 맛있다고 드시더라고. 내가 볶음밥을 남기니까 음식 남기는 걸 못 보는 엄마가 내가 남긴 볶음밥을 한 숟갈 드시더니 그러더라. “아까는 그렇게 맛있더니, 내 배가 부르니까 이게 맛이 없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해.” 배가 불러서 음식 맛이 없는 걸 간사하다고 까지 하는 엄마가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어. 엄마들이 하는 말은 왜 자주 짠할까.
첫 오키나와 여행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 좋은걸 나의 엄마 아빠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었어. 평생 같은 동네에서 같은 풍경만 보고 산 나의 엄마 아빠와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보고 싶었지. 그림 같은 풍경을 함께 보고 그걸 두고두고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었으면 했어. 아빠는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자꾸 눕고 싶다고 했어. 강원도에서 공항이 있는 인천까지 오는 게 아무래도 고됐나.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대기 시간 동안 아빠는 누울 곳을 찾을 만큼 힘들었나 봐. 평소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텐데 찾고 보니 그런 곳이 있긴 하더라. 비행기를 타기 전 고단한 사람들을 위한 간이침대가 모여 있는 곳이 말이야. 거기서 아빠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한결 괜찮아진 표정으로 비행기를 탔어. “좀 나은 거 같다”라고 말하고 비행기에 타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창밖을 빤히 보는 아빠를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더라.
그래서 어땠냐고?
두 번째 오키나와 여행은 바라보는 순간 노래가 재생될 만큼 아름답던 바다, 따뜻한 날씨, 깨끗하고 정갈한 음식 대신 꽉 짜인 일정, 틈 만나면 눕던 아빠, 다른 일행을 따라 움직이느라 종종 대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으로 채워졌어. 그래, 등 뒤에 달을 두고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지 그때.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말하며 쌀쌀맞게 돌아선 친구처럼 그때 오키나와는 차갑고 어두웠어. 야속하게 날씨마저 도와주질 않았는데, 3일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흐리면서 비가 오거나 하더라고. 그래도 중간중간 엄마 아빠는 “세상 좋아졌다”라고 했어.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거대한 유리면을 감싸고돌던 고래를 보면서, 높은 파도가 몰아치던 바다를 따라 걸을 때 어쩜 이렇게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게 관리를 하는지 감탄하면서, 칸칸이 정갈하게 담긴 반찬을 보면서.
얼마 후 아빠는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어. 병원에 조금만 늦게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그 말이 의사들의 단골멘트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더라. 미련하게 여행을 갈게 아니라 병원을 갔어야 했다는 후회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아빠는 한결 후련해 보였어. 병원 침대에 누워서 푸석하긴 해도 후련해 보이는 표정으로 아빠는 말했지.
“수술하고 나니 이렇게 괜찮은걸. 세상 참 좋아졌어.”
행사하나 끝낸 것처럼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공항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여행을 다녀온 건지 전지훈련을 다녀온 건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는데, 세상 좋아졌다는 아빠의 말을 들으니 다음엔 또 어디를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람 마음 참 간사해.’라고 혼잣말하다가 웃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