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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Jan 18. 2023

엔딩크레딧

04.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물먹은 솜처럼 축축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을 향해 걸을 때 나는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는 그저 고단할 거라는 걸 알았다. 막차가 운행을 마치고 첫차가 다니기 시작하기 전, 텅 빈 지하철 터널 안은 나의 앞날만큼 깜깜했다. 그래서 편안했던 걸까.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깜깜한 터널 안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두렵긴커녕 그저 편안했다. 터널 속 고장 난 기계를 수리하고 켜켜이 쌓인 쓰레기와 먼지를 걷어내는 일,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나는 주로 청소를 했다. 높은 시급에 위험수당까지 얹어주는 일이라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찬물 더운물이 뭐야 구정물까지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 하자고 그렇지 않아도 없는 살림인걸 뻔히 아는데도 돈을 보태달라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다리를 뻗을 만큼 누울 자리가 아니었던 집구석, 집에 손을 벌리기는커녕 손에 있는 것이라도 빠져나갈까 싶어 손을 더욱 꽉 마주 잡았던 오랜 날 들.  

깜깜한 터널 속 낡은 형광등 아래서 헤드렌턴을 쓴 나와 일꾼들은 드넓은 바다에 떠 있는 오징어 배 같았다. 멀리서 봤을 때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던 오징어 배처럼 나와 일꾼이 만들어내는 풍경도 멀리 선 아름다울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는 바다도 아니고 만선의 부푼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오징어 배와 다르게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라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일꾼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각자 할당받은 구역을 쓸고 닦고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정해진 구역을 손보고 나면 다시 그만큼의 간격으로 앞으로 나아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터널을 지나고 몇 개의 지하철역을 지나면 작업의 끝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터널에서 나와 지하철 선로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는 곳에 서 있으면 다시 보통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하철과 같은 기계에서 사람으로, 청소부에서 보통의 사람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애를 쓰는 철도 희망도 없는 어른에서 현실감각을 고루 갖춘 건실한 경제인으로. 처음으로 출발하는 지하철에 올라 방금까지 내가 있던 터널을 지날 때면 머리가 아득했다. 외선순환과 내선순환을 반복하는 삶, 그게 내 인생인 건가. 이렇게 평생 맴맴 돌기만 하면 어쩌지. 




“좀비 18, 너는 무슨 아르바이트해봤어?”  

촬영장까지 가는 길에 함께 대사도 맞추고 감정선도 다듬어 보자는 좀비 18을 홍대입구역에서 만났다. 대사라곤 ‘아아아’ 나 ‘크어어억’ 정도뿐인데 거기에 담긴 감정이라곤 억울함 같은 것뿐인데 뭐 맞추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싶긴 한데 말이다. 그는 원래 뭐든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이니까.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김에 지하철역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으니 야간에 터널에서 했던 알바가 떠올랐다. ‘난 이런 일도 해봤어’ ‘알바라면 안 해본 게 거의 없지 아마’ 같은 뻔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일을 했을까, 나와는 다른 어떤 경험이 있을까 궁금했을 뿐이다. 개찰구가 있는 쪽으로 함께 걷던 그가 나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한다. 

“알바? 알바라... 그거라면 할 얘기가 있지 내가.” 

말을 시작하는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역시 그의 안광은 특별하기보다는 특이하단 말이야.  

“영화제에서 주로 일했어 나는. 말도 마라. 거기서 일하면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쫙쫙 달라붙는 나 같은 끈끈이형 인간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긴 해.”  

하긴. 나도 그의 끈끈이에 걸려있으니. 끈끈이에 빼곡하게 붙어 죽어가는 파리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지만, 내가 그 모양새인가 라는 생각이 잠시 스치지만, 그건 대충 넘어가고.

“난 배우가 될 거니까, 아니 이미 배우니까. 기왕이면 그쪽 업계 사람을 만나고 돈도 벌면 좋겠다 싶어서.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거니까 공통분모도 있으니 쉽게 친해지는 것도 좋았고.”

처음엔 자원봉사로 다음으로 프로그램의 운영을 돕는 진행팀 단기인력으로 끝내는 홍보팀원으로 일했다는 그는 과연 인간 끈끈이라 할만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큰 행사를 무사히 마치는 경험은 사람들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하는 법이다. 달성해야 할 일이 있고 그걸 함께할 사람들도 있는 상황에서 똘똘 뭉쳐 보는 경험, 그리고 영화제가 끝나면 저마다의 일상으로 깔끔하게 흩어지는 것. 시한부 관계와 일은 때로는 그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기도 하지. 오래 볼 사이 이거나 밀도를 높여가는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수월해지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국물 같은 관계. 

“첨엔 영화제 마무리까지만 도와달라고 해서, 그다음엔 이쪽 일 경험이 있으니까 소개로 들어가고 그랬는데 말이야. 그렇게 하다 보니까 영화가 그냥 일이더라? 그 시점에 여기서 더 일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관뒀어.” 

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할 때 그의 차례가 돼서  내 인생의 영화를 찾아 떠난다고 말했다나. 그의 말이 취해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 동료들은 한바탕 웃고 말았다고. 자기 말에 웃는 걸 보면서 여기 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배우로서 우울했다고 말하는 그. 제법 진지한 말을 이어가던 그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래 좀비 18. 

“영화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게 뭐게?”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가 흐른다고? 

배우도 있을 것이고 관객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영화가 있어야 영화제가 존재할 테지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가 생각한 것 중에서 그가 원하는 답은 없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런 뻔한 말을 할 거라면 애초에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테지.  

“청테이프! 그거 없으면 영화제 못한다 너?” 

청테이프라. 이 말을 하고 어깨를 키득거리며 웃는 그를 보니 정신이 아득하다. 마침 역을 향해 들어오는 지하철, 그와 함께 열차에 올랐다가 문이 닫히는 순간 내려 버릴까. 그럼 다신 청테이프 같은 소리는 안 하겠지. 여전히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 입에 청테이프를 붙이는 상상을 해본다. 저 놈의 침 때문에 금세 떨어지겠네.   

자원봉사자가 펑크가 나면 다른 사람으로 채우면 되고, 오기로 한 배우가 못 오면 다른 배우로 얼추 퉁치면 되고, 기계가 고장 나면 고치면 되는데, 청테이프는 대체 불가한 물건이라 그렇다고.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그래서 나는 말이야. 내가 영화제를 만들면 말이지. 영화제의 숨은 주역이라고 할만한 청테이프로 무대를 꾸미고 기념품을 만들고 레드카펫 대신 녹색 청테이프 카펫을 만들고 뭐 그렇게 할 거다. 그리고 그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청테이프에게 줄 거야. 어떠냐?” 

이런 뻘소리를 하는 사람을 싣고도 열차는 별 탈 없이 다음 역을 향해 나아간다. 신기하게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상상을 덧붙인다. 청테이프가 주제인 영화제라, 그럼 영화제 이름으로 뭐가 좋으려나. ‘Tape Movie International Movie Festival’ 앞에 영문자만 약자로 줄이면 ‘TMI 영화제’가 되는 건데, 흥미롭네 흥미로워. 




사당역에서 내려서 4호선을 향해 걸으면서 향긋한 델리만주 냄새를 맡으며 영화제 오프닝 공연으로는 누가 좋을지 고민한다. 그 영화제에서 좀비 18은 누구보다 화려한 녹색 옷을 입고 그린 카펫을 밟으리라. 그라면 입에 청테이프를 붙이고 나올 수도 있겠지. 이런 돈 안 드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면서 걷는다. 

2호선 내선순환선에서 내려 4호선으로 환승을 준비하는 지금. 어쩌면 내 인생도 맴맴 순환하는 대신 그다음으로 환승 중인 걸 지도 몰라. 

‘그래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저기 앞에 코를 킁킁대는 그에게 다가가 델리만주를 한 봉지 사서 4호선에 오르자. 내가 영화제 이름 지었다고 TMI 영화제라고 얘기하면 그는 얼굴을 구기며 웃겠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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