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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Jan 28. 2023

엔딩크레딧

05. 연기할 때 꺼내 먹어요 

[조심히 안전하게 와주세요] 

이 말에 ‘천천히’ 혹은 ‘제 속도로’라는 말이 없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내 등에 짊어진 음식이 차갑게 식거나 뜨겁게 익어버리는 일이 없게 와달라는 말이다. 이 말의 대전제는 늦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 몇 번의 음식 배달을 하고 나서 이걸 쉽게 알아챘다. 그 순간부터 ‘배고파요, 빨리 와주세요.’라는 말보다 속내를 숨기고 있는 ‘조심히 안전하게 와주세요’라는 말이 더 무섭다. 이 메시지를 확인한 후 자전거 페달 위에 놓인 양발에 더욱 힘을 준다. 머릿속에 짜 넣은 동선을 중간중간 되새기며 두 번째 배달을 마치고 세 번째 배달 장소로 향한다. 여기에 음식을 배달하고 한 군데만 더 가면 된다. 이번까지 마치면 편의점 앞에서 잠시 쉬어야지. 거기서 뭐라도 마시면서 다음 콜을 기다리자. 


식판에 제육볶음과 북엇국을 담아서 자리에 앉는다. 어제 내가 음식을 배달한 곳이 여기었나 싶을 만큼 비슷한 메뉴의 음식들. 내가 시킨 거였다면 더 천천히 가져다줄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북엇국에 둥둥 떠다니는 작디작은 북어와 두부 조각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잘도 한다고 놀리는 것처럼 내 숟가락을 피해 도망 다닌다. 제육볶음을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그 맛이 느껴진다. 뭐든 뻔한 것만큼 사람 기운을 빼는 게 없다. 입안에 넣고 씹기 전인데도 무슨 맛인지 다 알 것 같은 제육볶음, 잘하면 여기 고춧가루가 얼마가 들었는지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뻔하다. 

싱글거리며 식판을 들고 다가오는 좀비 18, 나와 같은 음식일 텐데 그의 표정은 생일상을 받아 든 것처럼 밝다. 이게 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기운 탓인가.  

“여어, 오늘 제육볶음 때깔이 특. 별. 히 더 좋은 거 같은데?”  

나도 한 미맹 하는데, 그는 급이 다른 미맹인 게 분명하다. 혀에 새겨진 것처럼 다 알 것 같은 그 맛이 특별히 다른 날이 있다고? 역시 기운 탓인 건가. 

다가온 그의 식판을 보니, 과연 다르긴 했다. 음식이 아니라 반찬의 배치가. 식판은 보통 두 줄 구성이 기본이다. 반찬을 담는 윗줄은 움푹 팬 작은 원 두 개와 납작한 작은 사각형 한 개가 위치하고 국과 밥을 담는 아랫줄엔 두 개의 큰 원이 있다. 이걸 사회적 약속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사회 통념상 그런 거라고 하면 아, 이것도 여전히 거창하네. 그런데 그의 식판은 약속과 통념을 가뿐히 뛰어넘어버리는 구성이다. 밥과 제육볶음이 큰 원의 한 곳에 몸을 비비며 놓여있고, 그 위에 쌈으로 준비한 상추가 잘게 조각 난 채 올려져 있다. 북엇국에 있던 두부는 물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물기 없이 반찬을 담는 작은 원 안에 있다. 그 옆에는 내 식판과 유일하게 같은 모양새로 브로콜리가 있다. 나의 식판과 그의 식판을 번갈아 보면서 다른 그림을 찾고 있는 중, 이걸 다 맞추면 메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국을 왜 그렇게 많이 담았어? 국물 많이 먹으면 배 나와요 이 친구야. 배 나오면? 건강에도 안 좋고, 의상 피팅도 어렵고, 몸은 슬림하게 유지할 것! 내가 이거 지난번에 말한 거 같은데 그치?”   

두부를 으깬 후에 그 위에 브로콜리를 올리면서 잔소리를 하는 그. 한 번에 하도 여러 말을 하니까 말을 다 기억조차 할 수는 없는걸. 제육볶음을 제육덮밥으로 만들어 비벼 가면서, 북엇국의 두부와 브로콜리를 섞어서 어디서 본 듯한 새로운 반찬으로 탄생시키는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먹는 연기 해봤으려나? 그거 해보면 꽤 어렵잖아.” 


흔히 ‘생활연기’라는 말로 퉁치는 자연스러운 연기는 꽤 어렵다. 눈물을 흘리고 고성을 지르고 한바탕 웃어젖히는 연기는 생각보다 쉽다. 슬픔, 분노, 즐거움이라는 감정에 빠지면 행동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슬픔은 눈물을, 분노는 고성을, 즐거움은 웃음을 어렵지 않게 불러온다. 그에 반해 일상적인 걷기, 생각에 잠기기, 자연스럽게 대화하기, 밥 먹기, 잠자기 등은 어렵다. 무대 위 배우가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지? 그거만 봐도 알 수 있다. 연기라는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 이게 바로 좀비 18이 누누이 말하는 한 끝 차이를 만드는 거겠지. 배우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도 이거였다.  

‘연기를 너무 연기하듯 하지 말 것’  

특히 주연배우의 뒤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섞이고 묻히는 배경이 되어야 할 나 같은 사람이 연기를 한다고 설치면 안 되는 거다. 대부분의 진리가 그러하듯 이거 참 말이 쉽지. 


“아마 결혼식 장면이었을 거야. 뷔페 음식을 가져다 먹는 거였거든. 남주와 여주가 결혼 피로연에서 처음 만나는 설정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저 구석에서 음식을 먹으면 되는 거였어. 뭐, 간단한 거였지.”  

그 역시 자연스럽게 음식을 접시에 담아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자연스럽게 먹는 것은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몰랐어. 자꾸 감독님이 나를 보고 뭐라 뭐라 하는 거야. 그래서 왜 그러나,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러고 있는데, 감독님이 그러더라?”  

감독이 그에게 한 이야기는 자꾸 음식을 코로 가져가지 말라는 거였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모두가 각자 연기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그냥 얼어 버렸다. ‘음식을 어떻게 먹는 거였더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생각은 꼬인 스텝처럼 머릿속에서 엉켜버리고 그에 따라 행동도 점점 부자연스러웠다. 당황한 그가 자꾸만 숟가락을 코로 가져갔다는 것. 그래서 옛말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어른들이 음식이 왜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고 했겠냐고 말하는 그. 그런데 그 말도 우리가 흔히 옛말이라고 하는 것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그 후에 시간이 흘러 음식을 먹는 연기의 핵심은 바로 음식의 맛을 연기하는 것이라는 걸 깨우쳤지, 나는.”  

먹방 유튜버가 아니라 배우가 될 거라면 남다른 먹성을 보여주거나 화려한 말로 맛표현을 하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거였다,라고 그의 말을 대략적으로다가 대충 넘겨짚어 본다. 음식 맛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음식을 많이 먹을 필요도 음식 앞에 망설일 것도 없다고. 이번에도 그의 말에 묘하게 설득당하는 나. 이건 말이 귀로 들어가는지 뇌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표현 정도가 적절할 텐데.  


“근데 지금 우리는 밥 먹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밥을 먹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밥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낼게 아니라 맛있게 먹어야 한다 이거야.”  

헤벌쭉 웃으며 제육덮밥을 숟가락 하나 가득 담아 입으로 가져가는 그. 음식이 입술에 닿기도 전에 혀가 숟가락을 마중 나와있는 모습이 생활연기에서 한발 나아간 리얼리티 연기라 할만하다. 음식을 씹어 삼키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그라는 사람 자체가 먹음직스럽다. 그전까지 흥미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던 나의 식판에 담긴 음식들도 그새 더 맛있어진 것 같다. 음식도 더 맛있는 음식인 것처럼 연기를 시작한 건가. 

이제 나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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