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엠제이 Feb 05. 2023

엔딩크레딧

06. 얼마나 얼마나 더 구겨져야

창고에서 재고를 분류하고 개수를 센 후 그것을 문서에 입력하는 일. 이것이 나를 포함한 2주 계약직 2명의 업무였다. 창고로 출근해서 창고에서 퇴근하니 정작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는 교류랄 것도 없었는데, 그날은 사무실 전체 정리를 하는 날이라 모두가 짐을 나르고 비품을 정리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나와 같은 계약직처럼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했다. 여럿이 일을 하니 평소엔 경험하기 어려운 동료애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저기 이거 드실래요?” 하면서 건네는 캔커피나, 내가 찾는 물건을 대신 가져다주며 “테이프 여기 있어요.”라고 할 때. 이게 동료가 아님 뭐겠어. 

점심시간,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 도시락을 주문했다. 테이블 위를 치우고 밥을 먹기 위해 둘러앉을 때 두 개의 다른 도시락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크기도 작고 구성도 적은 도시락은 이른바 계약직용 도시락. 거기 앉아 돌 같은 쌀을 입에 물고만 있을 때, 옆자리에 있던 계약직 친구가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도 안 댄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나가서 먹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친구를 따라 일어나는 대신,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밥을 억지로 삼켰다. 

동료는 무슨, 주제를 알아야지.       


“동료가 아닌데 동료 의식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혼잣말치 고는 소리가 좀 컸는지 좀비 18이 김밥을 먹다가 깜짝 놀란 듯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돌이 있다고? 어디 어디?”

돌을 말한 게 아니었다고, 김밥엔 돌이 없으니 안심하고 먹으라고 하니 그제야 안심하며 다시 김밥을 바라보는 그. 

엑스트라를 모아두고 한바탕 잔소리를 한 조감독이 저만치 걸어간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해서는 오늘 안에 촬영을 마치기 어렵다고, 아마추어처럼 굴지 말고 제대로 연기를 좀 해달라고,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ONE TEAM’이라는 생각을 좀 가져달라는 그의 말이 하늘로 나풀나풀 올라가는 중이다. 하여튼 이럴 때만 ‘ONE TEAM’ 이지.  

“큰 틀에서는 뭐 조감독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이럴 때 보면 좀비 18은 참 비위도 좋다. 과연 그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비위가 좋고 먹성도 좋아서 지금 은박지에 쌓인 식어 빠진 김밥도 맛있게 잘 먹는 그의 태평함이 오늘만큼은 마땅찮다. 그래서 말이 평소보다 사납게 나간다.  

“뭐가 안 틀렸어, 다 틀렸지. 기계 부품에 불과한 우리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잖아. 

부품이, 어? 부품으로써 역할만 충실하면 되는 거지, 기계가 잘 돌아가야 하는 거, 기계가 완성도 있어야 하는 거, 기계가 예뻐야 하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신경 써야 하냐 그 말이야.” 

김밥을 감싸고 있던 은박지를 구긴 그가 나를 톡톡 친다. 아마도 찌푸린 얼굴이었을 나를 본 그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며 내 눈을 보고 말한다. 

“저기 말이야, 좀비 세븐세븐. 너님은 몇 살 때부터 그렇게 꼬였나?”  

이 말을 하며 목이 긴 트레이닝복의 상의 지퍼를 턱 끝까지 한 번에 올리는 그. 이건 그러니까 시크릿가든의 실사판 패러디 인 셈인데, 이걸 알아챈 것 자체가 너무 약 올라, 아오.  

“첫째, 조감독은 우리에게 기계부품이라고 한 적이 없다, 

둘째, 우리는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기 모여 함께 연기를 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ONE TEAM, 

셋째, 기계 부품이 고장 나면 결국 기계가 고장 나게 마련이다, 

이상. 내 말 중에 틀린 것이 있나? 길라임 아니 좀비 세븐세븐?”  

이게 다 앞뒤 다 자르고 말을 해서 그런 것이다 싶어서 내가 부품 타령을 한건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설명했다. 물류 창고에서의 일, 계약직 몫으로 주어진 도시락에 대해 두서없이 말을 뱉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꼬인 데는 다 이유가 있어서라는 것 정도 되려나. 내 말을 가만히 듣고 난 후 그가 말한다.  

“도시락 아깝다. 근데.. 반찬이 뭐였어?” 

에이 말을 말자, 말을. 얼굴을 구기고 고개를 팩 하고 돌리는 나를 보더니 그가 서둘러 말을 보탠다.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그건 그냥 도시락일 뿐이잖아.” 

그래 그건 그냥 도시락인 건 맞는데, 그게 그냥 도시락이기만 한건 어쩐지 좀 억울하게 들리는데 말이다. 이것도 내가 꼬인 탓일까.  

“그 회사가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구는 쫌생이들이 그득한 곳이었던 거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회사에 2주 계약직으로만 있어도 됐으니 그거 얼마나 다행이야.” 

아 다르다고 어 다르다고 하더니 이거 아야 다르고 여어 다른 것 정도 되려나.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과연 그런 것도 같고.  

“사실 연기라는 게 그런 거긴 하잖아. 내가 부품이어도 기계의 마음이 되어 보는 것 말이야. 기계가 되어서 부품인 내가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것. 부품 나부랭이에 불과하면서도 나라는 부품을 만든 창조주의 마음도 되어볼 수 있는 거. 그래서 좋던데 나는, 연기가.”  

‘그건 그냥 도시락일 뿐이잖아’

나를 사람이 아닌 부품으로 떠밀었던 그때 그 도시락이 그냥 도시락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 도시락을 받아 들고 밥을 물고만 있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다가가 먹고 싶은 반찬만 골라서 먹고 저녁은 맛있는 거 먹으라고 귓속말을 건넨다. 


“몇 살 때부터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러키 세븐세븐. 꼬인 거 푸는데 즉효인걸 내가 알걸랑.” 말을 마치자마자 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간지럼을 태우는 그. 기습공격에 당한 나는 눈물이 나올 때까지 웃다가 팔다리에 힘을 풀고 드러눕는다. 누워있는 나를 가만 보던 그가 나의 오금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무릎을 세우게 한 후에 나의 다음 행동은 당연히 그것이어야 하지 않느냐며 고갯짓을 한다. 아, 못 당하겠다 정말. 

머리에 깍지 낀 손을 짚어넣고 윗몸일으키기를 준비하는 나. 윗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마주 댄다. 

“럭키 세븐세븐은 언제까지 부품이라고 생각할 건가 그래?”        


작가의 이전글 엔딩크레딧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