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건 드라마고
#1. 동선의 집 거실, 저녁 7시 30분
거실 가운데 등 하나만 켜져 있어서 조금 어두운 실내. 텔레비전 바로 앞에 깔린 전기장판 위에는 이부자리가 펼쳐있고 미자의 아빠 동선이 누워있다. 소파에는 미자의 큰언니 미선, 큰 형부 성철, 어머니 순희가 앉아있다. 맨 끝 소파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아있는 미자. 성철 앞으로 사과, 배, 귤 등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여있다. 거의 손을 안 댄 듯 가득 담겨있는 모양새. 그런 접시를 한번 본 후 말하는 순희.
“왜 다들 과일을 안 먹어? 맥주 한잔 하지 왜? 안주거리가 없어서 그런가?”
순희의 말에 마지못해 포크를 들고 배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는 성철. 배를 씹으며 말한다.
“저녁 방금 먹었는데요 뭐. 요즘 사람들 그렇게 많이 안 먹어요. 그리고 어머니 그거 아세요? 과일도 많이 먹으면 별로 안 좋대요.”
말을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성철을 마뜩잖게 쳐다보는 미자. 순희는 성철의 말을 듣고 머쓱한 모습이다. 순희의 모습까지 보니 더욱 못마땅함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자, 참지 못하고 말한다.
“형부는 몸을 그렇게 생각하셔서 정말 오-래 오-래 잘 사실 거 같아요. 언니는 좋겠수? 과부 될 걱정은 안 해도 돼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자를 향해 손을 뻗는 순희. 미자의 팔을 툭 친다.
“미자야, 과부라니.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미자 역시 순희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성철 앞에 놓인 접시에서 사과를 포크로 콕 집어서 입으로 가지고 가면서 말한다.
“아 맞다. 형부 백년손님인데. 죄송! 근데 이 사과 되게 맛있네.”
#2. 동선의 집 거실, 저녁 7시 50분
사과를 먹다가 리모컨을 들고 순희를 바라보며 말하는 미자.
“엄마, 8시 드라마 볼 거지? KBS2 틀면 되지?”
미자의 말에 반쯤 누워있던 순희가 심드렁하게 답한다.
“보긴 하는데 꼭 안 봐도 되니까 니들 보고 싶은 거 봐.”
#3. 동선의 집 거실, 저녁 8시 10분
[텔레비전 속 화면]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 사이로 걸어 들어온 남자가 결혼을 발표하고 결혼할 사람을 소개하는 데 가족 모두가 깜짝 놀란다. 결혼할 사람은 다름 아닌 시이모. 즉, 남자의 누나의 남편의 이모와 결혼을 할 예정이고 둘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다고. 남자의 어머니는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가족의 식사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뭔가 헷갈리는 듯 순희에게 묻는 미자.
“그러니까 엄마 저 남자가 결혼한다는 게 시이모야? 저게 근데 안 되는 건가? 겹사돈은 되잖아.”
미자의 말에 눈은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 답하는 순희
“되는지 안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렇게는 안 하겠지 보통.”
#4. 동선의 집 거실, 저녁 8시 30분
[텔레비전 속 화면]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여자(시이모)는 비밀리에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남자는 공항으로 달려가 여자를 만난다. 절대 혼자 보낼 수 없다는 남자의 말에 눈물 흘리는 여자. 남자와 여자는 포옹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핸드폰을 하고 있던 성철이 고개를 들고 말한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누구랑 누가 결혼하다는 건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두 답이 없으니 성철이 미자에게 묻는다.
“처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한다는 거야?”
성철의 질문에 마지못해 답하는 미자.
“예를 들자면 형부가 결혼하려는 사람이 형부 누나의 남편의 이모라는 거예요.”
미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성철.
“나, 누나 없는데?”
성철의 반응이 황당해서 마주 보는 미자를 향해 성철이 웃으며 말한다.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야. 드라마잖아 드라마. 왜들 이렇게 심각하게 보고 그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겠어?”
드라마를 이렇게 실제와 동떨어진 이야기로 만들면 되겠냐고, 요즘은 다 드라마가 이런 식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드라마를 안 본다고 말하는 성철. 성철의 말에 드라마 대사가 묻히기 시작한다. 리모컨으로 볼륨을 높이는 미자.
#5. 동선의 집 거실, 저녁 9시 10분
[텔레비전 속 화면]
며칠 후, 남자는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여자의 가족을 각각 찾아가 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둘의 결혼에 대해 허락을 구한다.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낸 남자가 꽃을 산 후 여자에게 찾아가 청혼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말하는 미자.
“전개가 무지 빠르네. 이거 한편에서 갈등이 생기고 그게 다 풀리기까지 해. 그리고 앞 편을 거의 안 봐도 이해가 되고. 이래서 주말 드라마는 계속 인기가 있나 봐.”
핸드폰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성철이 답한다.
“처제는 이런 드라마가 재밌어? 진짜 뻔하지 않아? 퍽하면 출생의 비밀이다, 기억상실증이다, 알고 보니 형제더라. 아직까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네 드라마는.”
성철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미자는 익숙하다는 듯(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고 있고), 미선은 맥주를 가지러 주방으로 갔다. 자신의 말에 답이 없는 걸 확인하고 성철이 다시 한번 말한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 드라마가 재미있으세요?”
순희가 어쩐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답한다.
“아니, 나도 그냥 그렇지 뭐. 원래도 꼭 챙겨보고 그런 편 아니었어.”
순희의 주눅 든 목소리에 성질이 난 미자는 혼잣말처럼 하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한다.
“현실을 꼭 빼다 박을 거였으면 드라마를 왜 만들겠어, 그냥 뉴스나 주야장천 틀어대면 되는 거지. 그리고 나는 요즘 사람들이 넷플릭스로 해외 드라마는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거여도 웰메이드다 어쩌다 하면서 보면서 한국 드라마 가지고 뭐라 그러는 거 웃기드라?”
미자의 말에 한마디를 보태려고 시동을 거는 성철을 보면서 미자가 서둘러 말을 자른다.
“아, 별로 볼 게 없네. 나는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6. 동선의 집 거실, 저녁 9시 30분
잠자리에 누운 미자와 순희. 동선의 이부자리가 있는 곳 뒤쪽으로 미선과 성철이 이부자리를 깔았다. 거실에서 가장 따뜻한 곳을 찾아 각자 이부자리를 깔고 있는 모양새.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미자와 순희, 동선, 미선과 성철의 이부자리가 놓여있는 모양이 꼭 바다에 떠있는 섬과 같다.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곳으로 미자를 잡아끌고 이불을 덮어주는 순희. 미자는 평소 집에서 쓰는 이불보다 두꺼워서 갑갑하지만 순희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다. 미자가 순희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는 내가 아까 그 사람처럼 결혼한다고 하면 뭐라고 할 거야? 허락할 거야?”
미자의 질문을 이해하려고 하는 듯 대답이 없는 순희, 잠시 후 미자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며 답한다.
“미자야, 저건 그냥 드라마잖아.”
그런 순희의 등에 대고 그러니까 본인이 저 상황이라면 엄마는 어떻게 반응할 거냐고 허락할 거냐고 다시 묻는 미자. 그런 미자 쪽으로 다시 돌아 누운 순희가 말한다.
“그러니까 그게 누가 됐든 데리고 오고 나서 그런 얘기해.”
미자, 눈을 감고 자는 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