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찰랑찰랑 찰랑대는
언제나 술이 먼저였다. 술보다 술자리가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술을 공식적으로 마실 수 있는 구실일 뿐, 술자리의 소란스러움은 늘 낯설고 적응하기 어려웠다. 적응하는 시간을 줄여볼 요량으로 혼자 술 한두 잔을 걸치고 술자리에 간 적도 있었다. 사실, 그런 적이 많았다.
밍밍한 데다 미지근하기까지 한 술로 가장한 물을 연신 마셔댄 나와 동료들이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선다. 촬영을 하는 동안은 마시고, 쉬는 시간은 화장실에 가는 것. 언뜻 술자리와 비슷하다. 술을 마시다 보면 저마다의 이유와 목적으로 화장실에 들락거리게 마련이니까. 술자리와 다른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마셔도 비틀대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려나. 단 한 명 비틀대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좀비 18이다.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설마 진짜 술을 마신 건가 의심을 품을 때쯤 나를 알아본 그가 말한다.
“아. 이건 뭐 분위기에 취한다고 해야 하나.”
바싹 다가온 그에게 코를 킁킁 대봤지만 술 냄새는커녕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마이쭈 냄새가 날 뿐이다. 달콤한 복숭아 냄새. 그럼 정말 분위기에라도 취했단 말인가. 내 옆에 나란히 선 그가 얼굴이 벌게지고 심하면 몸에 발진도 생기는 탓에 술과는 늘 서먹한 사이라고 말한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그가 영원히 친해질 수 없는 존재가 술이라나 뭐라나.
술을 마셔야 할 이유는 술을 그만 마셔야 할 이유보다 늘 많고 늘 그럴듯했다. 오디션에 떨어졌을 때, 사랑이 떠나버렸을 때,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그리고 오디션에 붙었을 때, 사랑을 시작할 때, 아버지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을 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술은 마실수록 늘었다. 맥주 몇 잔이면 채워지던 목마름이 곧 소주 한 병을 넘겨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물과 다르게 술은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졌다.
“넌 앞으로도 쭉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취한 채로 맞이하겠지. 아마 맨 정신으로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을 거야, 그렇지? 넌 그게 뭐 특별한 건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야, 그게 바로 알코올중독이야.”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엉망으로 취해 툭하면 울고 걸핏하면 친척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나를 향한 말. 장례식 내내 군말 없이 곁을 지켜준 애인이 이 말을 했을 때도 나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거 참 말이 된다고, 모르긴 몰라도 너가 사람 하나는 정확히 잘 본다고, 그런 내 옆에 이렇게 붙어있는 너는 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너 덕분에 불쌍한 영혼 하나 살린다는 얘기 듣고 싶어서냐고, 착한 척 뭐라도 되는 척 실컷 하려고 내 옆에 붙어 있냐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에게 다가와 내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을 뺏어 들고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얼굴에 끼얹을 때도 나는 우스워죽겠다는 듯 웃었다.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나고 애인이 떠나고 방안에 혼자 남겨졌을 때도 눈물을 흘려가며 웃었다. 술에 취한 채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우습기만 했다.
남녀 주인공이 술자리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그 배경 역할에 충실히 조용히 술잔을 부딪치고 마시는 것을 반복한다. 얼마 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각자 선호하는 자리를 찾아간다. 내 옆에 자리를 잡는 좀비 18, 그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옆에 부려둔 짐을 치운다.
“스무 살 땐가. 괴로울 때 술을 마신다고 그러길래 나도 그 기분을 한번 느껴보려고 했지.”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그는 소주 한 병을 사서 집 앞 놀이터로 향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진 그를 맞이하는 무대는 텅 빈 놀이터. 그네에 앉은 그는 편의점 봉지에서 소주를 꺼내 병 째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생각보다 쓰지 않았고 생각만큼 맛이 없었다. 이것이 뭐가 어떻다고들 그렇게 마시는 건지 알지 못하겠던 그는 꿀꺽꿀꺽 술을 삼켰다.
“지진이 났나 싶었어 순간. 몸이 막 흔들려서 눈을 떠보니까 경비 아저씨가 나를 빤히 보고 있더라고.” 무턱대고 병나발을 불다가 기절한 거였겠지 아마. 그가 살던 아파트 동 앞까지 그를 부축해서 데려다준 아저씨는 공동현관으로 들어서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서 술은 어른한테 배우라고 하는 거라는 말과 함께.
제일 친한 친구 자리에서 술을 밀어내기까지 족히 일 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 술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술은 그냥 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술로 인해 망쳐버린 인간관계와 한때의 인연을 마법처럼 회복할 수는 없었다. 이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저 예전의 그 애인에게 이제 나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맨 정신으로 마주할 수 있다고, 그걸 알게 된 건 당신 덕분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때 내 곁을 떠나기로 한 당신의 결심도 옳았다고도, 나를 이만치 살게 한 것도 당신의 그 결심 덕분이라고.
촬영이 끝나니 긴 술자리를 마친 듯 진이 빠진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인사를 나누고 좀비 18을 바라보니 그 역시 자신과 종일 술자리 연기를 함께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다음엔 술자리 말고 회의 자리 같은 데서 봬요. 흐흐”
그의 말에 몇몇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기분 좋은 듯 헤벌쭉 웃는 그. 술자리 연기의 끝엔 소란함도 고성도 싸움도 과장된 친밀감도 흐릿한 정신도 없다. 그저 또렷하다. 나는 맨 정신으로 타박타박 그를 향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