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동네 아재 한 명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보면 ‘우지’라고 놀렸다. 어려서 하도 동네를 울면서 누비고 다녀서 울보라는 뜻인 ‘우지’라는 별명이 붙은 거라고 엄마가 그랬다. 온통 깜깜한 새벽 네다섯 시에 밥을 하러 엄마가 몸을 일으키면 곁에서 잘 자던 나는 잠에서 깨서 울었단다. 서럽게 우는 나를 등에 업고 엄마는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준비했다.
새벽뿐만 아니라 엄마가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울어대는 나를 보고 엄마는 무슨 병에 걸린 줄 알고 걱정을 했다. 위로 자식 셋을 키웠어도 나같이 우는 애는 없었던 터라 슬슬 겁이 났나 보다, 엄마도. 그래서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우냐고. 거기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냐면, 엄마가 도망갈까 봐, 였다.
장례식장에 갔다. 결혼이나 출산보다 죽음이 훨씬 익숙한 나이가 되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영정 사진을 보니 희미하게나마 얼굴이 낯이 익다. 고운 꽃으로 둘러싸인 사진 속 얼굴을 마주하며 고인이 바라던 그곳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과 같이 꽃이 가득한 들판에 편안히 계시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평화를 빕니다.’
‘평안을 기원합니다.’
돌아가시기 2주 전인가. 평소보다 상태가 너무 좋아서 몸에 윤기가 다 돌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폐렴으로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그래도 편안한 죽음이었다,라는 말을 선배와 주고받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선배들의 근황 이야기로 이어졌고, 미혼인 선배 대부분 부모 돌봄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 미영 선배는 어머니가 치매라 선배가 집에서 돌봐.”
“아, 영섭 선배는 아버지가 암이라 선배가 돌보고 있어.”
이 선배들이 모두 외동도 아니고, 경제적인 이유로 가정 돌봄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선배들의 공통점은 미혼 자식이라는 것. 아픈 부모의 돌봄은 나와 같은 미혼인 자식들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선배와 나누는 와중에 거의 이십 년 만에 나의 첫사랑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를 마주친다. 첫사랑의 밝은 모습만 쏙쏙 빼다 박은 그의 딸은 달콤함이 느껴질 만큼 사랑스럽다.
병실 문 옆에서 몰래 안을 들여다보는데 엄마가 멍한 눈을 하고 앉아있다. 평소처럼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지만 어쩐지 빛이 덜한 느낌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엄마가 재활병원으로 옮기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많이도 안 바라고 화장실 오갈 수 있을 정도로만 나으면 좋겠다는 엄마를 향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간병인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오늘 화장실에서 물 샤워를 했는데, 변기에 앉혀두니 엄마가 자꾸만 앞으로 그리고 뒤로 미끄러져서 애를 먹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스스로 앉을 수도 없는데, 걷는 걸 바라고 있다, 엄마는. 엄마가 말하는 재활병원은 실상 요양원을 말하는 것이고, 엄마가 말하는 ‘재활 훈련’은 힘겹게나마 걸어서 물리치료실로 갈 수 있는 환자에게 제공하는 치료라는 것과 엄마처럼 걸을 수 없는 환자에게는 찜질 정도의 물리치료만 제공할 뿐이라는 걸 그런 치료로 엄마는 다시 걸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응, 한번 알아볼게 엄마. 그런데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이렇게 답은 하는데 생각이 소용돌이친다. 엄마가 힘겹게 소리 내 말한 희망에 내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금방 죽을 거 같지도 않고.. 그런 병원이 더 저렴하대.”
말끝마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그런 말 하지 말고 나을 거라고 생각해야지라고 감히 희망을 말하면서도, 걷고 싶다는 엄마를 향해서 나는 그게 엄마 마음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자기 몸 그리고 목숨을 두고 벌어지는 일에 대해 희망과 절망을 온전히 말할 수 없고 공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엄마를 더 외롭게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걸 알지만. 엄마의 희망에 마냥 박수를 칠 수도 없고 엄마를 절망에서 그저 건져 올리고만 싶다.
저 멀리 고갯길을 돌아서 파란색 버스가 내려온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마을 어귀에 모여 있던 나, 할머니, 아빠, 엄마는 버스에 실을 짐을 각자의 손에 움켜쥔다. 고등학교가 있는 원주 시내 자취방으로 할머니와 내가 나가는 날이다. 내 언니 둘과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엄마 아빠의 그늘과 정든 이 동네를 떠나 도시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버스 탈 채비를 마치고 가만히 섰는데, 엄마가 슬며시 곁에 다가와 말을 건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엄마가 늘 곁에 있다고 생각해, 알았지?”
고개만 주억거리고 나는 급히 버스에 올라탄다. 짐을 올려다 준 아빠는 기사님을 향해 나와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남부시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가 출발해야 집으로 향할 엄마와 아빠를 향해 나는 그 흔한 손을 흔드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잠깐 쳐다보기만 하다 고개를 돌린다. 나와 할머니 둘만 태운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보자기에 든 반찬통이 서로 부딪치며 덜거덕 소리를 냈다. 동네를 뒤에 두고 앞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시내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나는 고개를 처박고 울었다. 어려서 엄마가 도망갈까 봐 울던 나는 벌써 엄마가 그리워서 울었던 것 같다.
우는 나를 둘러업고 아궁이에 불을 때던 엄마, 몸은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나를 위로했던 엄마. 그랬던 엄마가 지금 마른 몸을 하고 텅 빈 눈으로 어딘지 모를 한 곳을 보면서 생각에 빠져있다. 지금 엄마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어떤 말이 엄마에게 힘이 될까.
어떤 것도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아서 나는 그냥 엄마의 발을, 관절염으로 휘고 끝이 갈라진 그 발을 가만히 만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