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려식물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회사 건물 뒷골목에서 길고양이를 몰래 키웠다. 정확히는 매일 아침밥을 주고, 난 그걸 지켜보면서 몸을 쓰다듬을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우린 일종의 의식처럼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녀석은 배를 채워서 온기를 높였고, 나는 그 높아진 온기를 다시 내 손에 담아서 사무실로 돌아갔다. 녀석은 '에드거 앨런 포' 소설에 나오는 플루토처럼 검은 고양이었는데 드물게도 사람을 잘 따르는 온순한 아이였다. 처음 일을 배우는 과정이라 모든 게 서툴렀는데 아침에 고양이를 보는 시간만이 날 지탱했던 것 같다. 난 사료를 담아주고 쪼그리고 앉아서 커피믹스처럼 탁한 하루를 굽어봤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고양이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죽어있었다. 쓰다듬으면 금세 일어날 줄 알았는데 벌써 몸이 딱딱해진 상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등을 들이밀며 만지라고 치대던 녀석이 온기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걸 보고 한동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고양이가 날 떠났다.
이 경험이 후로 반려동물은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 근데 올해 우연한 기회에 반려 식물을 키워볼 기회가 생겼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는 쉽게 생각했다. 식물이니 온기도 없고, 감정도 없으니 그냥 적당히 물을 주면서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정이 좀 더 쉬웠던 이유는 식물은 죽더라도 별 충격이 없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푸른 이파리를 볼 내 아침, 가드닝이 주는 안식의 효과, 요즘 트렌드에 걸맞게 반려 식물을 키우는 도시인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그러니까 모두 '내 위주'로 생각하며 들인 것이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 고흐와 함께 보내면서 그건 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화분을 사서 흙을 담고, 씨앗을 심고 주기적으로 물을 주며 상태를 살핀 후에 햇볕이 좋으면 창가에 내놓고, 비바람이 불면 다시 들여오는 모든 과정은 결코 내 위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온전히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과 동거하는 상호작용이었다. 녀석이 이파리가 노래지면 종일 속이 상했다. 내가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성장이 더딜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괜스레 미안해져서 한참을 베란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전문가로부터 꽃을 피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실망하기보다는 그래도 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주기만을 바랐다. '꽃 그까짓 거 안 피면 어때, 나에겐 여전히 푸른 이파리를 뽐내는 너인걸.' 그냥 지금처럼 찬찬히 자라줬으면 했다. 내겐 여전히 줄기를 지탱하며 나와 호흡을 맞추며 산다는 게 중요했다. 여전히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남아준다면 언제든 뭐라도 될 것이다. 그렇게 고흐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자그마한 화분에 담고 꼿꼿하게 서 있다.
코로나 19로 집콕 생활이 늘어나면서 집에서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셀프 인테리어를 하는 인구도 늘고, 그중에서도 특히 플랜테리어(식물을 이용한 인테리어)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거기에는 아마도 단순히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른 우울감을 없애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물을 단순히 윤택한 삶을 위해 들여놓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식물도 하나의 존재로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 단순히 반려동물은 책임감과 기회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반려 식물을 대신 택하기보다는, 녀석을 하나의 존재로서 감각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안타까운 점은 고흐와 함께 심은 동생 화분 테오가 이파리를 보지 못하고 화단으로 돌아간 것이다. 내게 테오의 죽음은 생명이라는 것이 결코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세상을 향해 뻗고 있었던 가지 하나가 잘리는 듯한 아픔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고흐를 혼자 집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아직 식물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다른 식구를 무턱대고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내가 짬을 내서 고흐와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일본의 거장 기타노 다케시는 한 인터뷰에서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다.’라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만큼 함께 동거하는 사람은 피를 나눈 존재라도 항상 부대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려 식물은 내게 무해했다. 보채지도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직 내 말을 들어주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것이 내가 요즘 주위 친구들에게 반려 식물을 추천하는 이유다.
여전히 난 아침에 물을 주고 '풀멍'을 한다. 하루를 계획하면서 풀을 바라보는 일은 이상하게 안온하다. 종일 같은 자리에서 볕을 쬘 존재에게 오늘 하루의 삶을 터놓는 건 마치 사당에 모신 선현의 지혜를 드는 것처럼 맑고 개운한 기분을 자아낸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술에 취해서도 고흐가 비바람에 상하진 않았는지 풀이 노래지진 않았는지 살핀다. 끝이 바래면 조금 잘라주기도 하고, 흙이 텁텁해 보이면 물을 보태기도 한다. 미동도 없지만, 여전히 축축한 흙 속에서 밥을 먹고 미세하게나마 자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고 생명에 깃들어 있음에 위로받는다. 앞으로 고흐와 함께할 삶에 소망이 있다면, 새로운 한 해에는 고흐가 여러해살이풀이라는 제 존재 이유를 찾아서 새잎도 내고 끝내 꽃봉오리를 맺는 것이다. 물론 기대만큼 자라주지 못할지라도 그저 꿋꿋하게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그 이름도 고흐 아닌가. 고통을 앓으면서도 불세출의 작품으로 감동을 안겼던 화가의 붓꽃 그림처럼 우아하게 이 가을을 함께 보내리라. 어느 해보다 뜨겁고 이 여름을 나와 함께 버텨준 녀석에게 그런 당부의 말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