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가을>
며칠간 본의 아니게 야간근무를 서면서 시차가 생겼다. 낮에는 졸음이 쏟아지고 저녁때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 한 박쥐가 됐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스탠드 빛에 의지해서 먹방 유튜버를 보며 참을 수 없는 식욕을 감내했다. 아픈 데도 없는데 몸이 피곤하고 계속 면발이 당기는 건 아마도 바이오리듬에 실조가 생겼기 때문이리라. 난 내 뇌가 재즈 프레이즈처럼 불규칙하게 넘실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밤새 모니터에 코를 박고 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어려서부터 밤에 더 활달했는데 그게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바뀌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일몰이 지나고 하늘이 까매지면 그때부터 도파민이 치솟는 걸 어쩌랴. 어쩌면 난 그리운 프랑스의 시간을 사는 걸지도 모른다. 유럽 살 팔잔가 보다.
퀭하고 몽롱한 상태로 아침에 출근했다가 간신히 점심까지 버텼지만 밥을 먹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일하고도 아침에 꾸중을 들은 탓이다. 눈을 꼭 감았지만 서글픈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날 한심하게 보는 눈초리를 떨쳐내려 코어에 힘을 주고 커피 한잔을 받아왔다. 잠을 깨려고 회사 앞 작은 공원을 걷기로 했다. 운동화로 바꿔 신고 폰과 이어폰을 챙겨서 건물 밖을 나섰다. 박 과장 요즘 살 빼? 밥도 안 먹고 운동하는 거야? 난 실실거리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네네 맛있게 드세요.
제법 선선해진 바람과 달리 강렬한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내 눈을 찌그러뜨렸다. 챙 모자를 눌러쓰고 잔디와 쓰레기통, 벤치와 자전거 타는 사람을 구경하며 걸었다. 가을이 어느 틈엔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이현령비현령 만사에 비위만 맞추다가 허송세월 한 사이에 여름은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한 시간 후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게 애석해졌다. 이맘때쯤 설악산이 참 좋은데, 곤드레밥이나 먹고 커피를 쪽쪽 거리며 경포대나 걸었으면 원이 없겠네.
학교가 끝났는지 학생들 몇 명이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걸어갔다. 보라색 이스트팩 가방과 빨간색 빗금이 쳐진 아디다스 슈퍼스타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게 있는 모양이다. 손에는 붉은빛이 도는 음료수가 들려 있었는데, 나도 비슷한 걸 문구점에서 사 먹었던 기억이 났다. 먹고 나면 입이 퍼레져서 변사체 놀이를 하곤 했는데. 녀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초가을의 적막을 깨뜨렸다. 정말 까르르 소리가 나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고작 학원이나 가지는 않기를 빌었다. 학생들은 팔다리가 길고 말라서 걸음걸이가 우아했다. 마치 새처럼 까치발을 들고 걷는 듯 유려했다.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어디선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웃음소리를 전해왔다. 나도 따라 실없는 웃음이 배어 나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우정을 포기했다.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것 같다. 얼마 전 한때 긴밀했던 형과 긴 통화를 했는데 내가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는데 그의 친밀함이 무색하게 낯선 기분이 들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거북한 뭔가가 목에 탁 걸렸다.
"민진아 오랜만이다 진짜. 최근에 내가 좀 바빴어. 애 낳고 이직하고 정신이 없다 야. 내가 동네로 놀러 갈까. 날짜를 언제로 잡지?" 난 서두르는 형의 목소리에 침을 두 번 꿀꺽 삼키고 흔들림 없이 반겼다. "어, 형 진짜 오랜만이네. 요즘 어떻게 지냈어. 가족들은 다 건강하지. 글쎄 우리 언제가 좋을까." "형은 다 괜찮으니까 너 편할 때로 한 번 잡자. 내가 가도 되고, 네가 오면 맛있는 거 사줄게." "요즘 나도 꽤 바쁘긴 한데, 야간근무를 서거든. 잘하면 시간을 낼 수도 있을 거야. 잠시만."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렸지만, 잘 떠오르진 않았다. "형 회사에 코로나 환자가 있어서 이번 주는 어려울 것 같고, 다음 주에 내가 전화를 한 번 줄게. 미안해. 내가 이러고 사네." "그래, 다음 주에 연락 한 번 줘.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 분위기를 눈치챈 형은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난 화면이 꺼진 폰을 꼭 쥐고 미세한 자책에 시달렸다. 이럴 거면 그냥 만나서 차 한잔하면 될 텐데 뭐가 그렇게 어렵나. 난 요즘 생각하느라 바빴다. 아무것도 정리가 된 게 없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지만 그랬다. 난 다시 일하다가 톡을 열고 형의 프로필 사진을 넘겨봤다. 아이를 낳았는지도 몰랐네. 주말을 재밌게 보내라면서 태연한 척 인사를 건넸다. 아이가 예쁘다고 축하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직장에서 휘둘릴 수밖에 없는 처지를 한탄하고, 같이 회포를 풀 날을 그리겠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 주에도 결코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확실히 해둬야 했다.
언젠가는 나를 이 세계로 환대할만한 찐한 우정을 원한 적도 있었다. 내가 아끼던 한 친구는 일하다가 무의미하게 죽었고, 또 다른 친구는 남편과 아버지 역할에 여념이 없어서 도통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 이렇게 마음이 위축됐는지 애써 짐작해볼 뿐이다. 한적진 가을 날씨를 즐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벌써 가을 타나. 추석 전에 이러면 설레발인데. 우정을 통한 왁자지껄한 기운과 연결됨의 기분을 맛본 지가 언제였던가. 우정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지레 도망친 것 같기도 하다. 일하다가 영화를 보고, 책을 읽다가 몸을 만들고, 신간 소설을 고르다가 써둔 글을 퇴고하느라 우정의 가능성을 혼돈 속으로 내쳤다. 그간 나와 시간을 보낸 몇몇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도 잘 모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부지런히 낸 내 축의금은 얼마나 될까. 돌려받지 못할 걸 알고 냈으면서도 아까웠다. 아냐, 훈제연어를 그렇게 먹어댔으니 아쉬울 건 없지. 난 무심함과 초연함으로 보이는 외관을 하고 살지만 어쩌면 온전히 우정에 열정을 바쳤던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별 계산도 없이 거리낌 없이 관계를 위해 노력했던 어느 시절을 말이다.
어릴 때는 참 공부를 안 했다. 아마도 특정한 목적을 가진 공부를 못 못 견뎠기 때문일 것이다. 늘 학교에서 눈 밖에 났다. 말도 적었고 의욕도 없어서 늘 창밖만 보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친구도 거의 없었다. 이어폰을 끼면 전에 없는 고요함을 맛볼 수 있었다. 세상의 존재를 잠시 잊고 공상하며 훌륭한 수업을 흘려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불량 학생이었던 내가 지금은 책 읽기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한다. 아마도 친구를 더는 원하지 않게 된 후로 생긴 변화인 것 같다. 아닌가. 책을 좋아하면서 친구를 원하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생생하고 날렵한 시기가 다 지나갔지만 이제야 공부하며 산다. 무관심을 삶의 일부로 품고서는 집과 카페로 오간다. 다가오는 친구를 곤혹스러워하며 기피하고,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을 흉내 내면서 산다. 배신하지 않을 공간과 시간을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합리적이고 어두운 힘에 시간을 무익하게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내가 존경하는 분도 번듯한 생활을 위해 애쓰다가 서서히 절망을 향해 스러져가는 걸 지켜본 바 있다. 얼마 전 마주친 그 형은 전화통을 붙잡고 깨진 유리 조각처럼 공허한 눈으로 누군가에게 호통을 쳤다. 우리 나이 때가 다 그런 거란다. 지금도 화장실 거울을 보면 누군가의 입에 오를 내 모습을 살피곤 한다. 싸구려 소설 속의 등장인물처럼 비열해 보이진 않겠지. 현실에 순응하지만 마치 예술가라도 된 듯이 다른 이들과는 거리를 두는 외톨이 정도일까. 이해받지 못한다는 유치한 마음과 거리의 젊음을 시기하는 비루한 아저씨는 어떤가.
아침 지하철에서 내릴 때 여러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누군가의 내치지 못한 술기운과 미세한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다. 미세한 두통이 역한 기운을 불러낸다. 잠이 부족한 내 아침은 확실히 밤보다 어두컴컴하다. 오늘 밤은 꼭 일찍 자야지 다짐하지만 늘 매한가지다. 그래도 난 내 삶을 높이 평가한다. 자존심이나 야망 같은 번쩍번쩍한 것과는 거리가 먼 기운이다. 아마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방식의 자신감일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비참함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나의 감내를 기억한다. 단단한 표정으로 근면하게 버텨나가는 나. 주먹을 꽉 쥔 기분으로 너끈하게 헤쳐 나가 고대하던 밤의 평온을 기다리는 나. 어렸을 때는 마음과 몸이 별개라고,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로 알았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의 총체가 물질적인 것의 집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난 유물론의 총아로서 더 건강한 세포를 가지고 살고자 한다. 그건 결국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이 감싼 상태다. 자세히는 닭가슴살과 쇳내가 내 척주 기립근을 지탱하는 모양새다. 난 누구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어떤 완전함을 공들여 상상하고 있다. 이제 정말 사무실로 복귀할 시간이다. 난데없는 공상을 하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