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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7. 2023

예기치 않은 산책

은연중에 건강한 몸을 강요받는 기분

갑자기 휴가를 써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에 없던 반차를 내고 부랴부랴 회사 건물을 나섰다. '휴가 올렸네. 무슨 일 있어?' '아 갑자기 죄송해요. 집에 볼일이 좀 생겨서요.' 어떤 볼일도 없었지만, 볼일이 있는 사람인 척 서둘러서 외투를 챙겼다. 외투를 천천히 입기보다는 급해서 들고 간다는 제스처가 중요했다. 연초라서 동료들은 휴가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초반 이미지가 중요하다 보니 다들 묵묵히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그 흔한 외근을 나간 이도 없어 보였다. 나도 분위기 파악 못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분위기 맞추다가 작년처럼 연가보상비를 날리긴 싫었다. 올해 내가 추구하는 사무실 이미지는 휴가를 다 챙겨나가면서도 일은 펑크 안 내는 실속형 얌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몸을 굽신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뭐라도 더 물어볼까 무서워서 미적댐 없이 귀신처럼 빠져나왔다. 누구랑 마주칠세라 계단실로 빠져나갔다. 누가 보면 축지법이라도 쓰는 줄 알았을 거다. 화장실 배수구에 물이 빠져나갈 때처럼 스르륵스르륵 흘러나갔다. 비록 수챗구멍에 지저분한 찜찜한 기분과 눈치가 끼어 있었지만, 막상 회사 밖을 나오니 속이 후라보노 껌이라도 씹는 것처럼 후련해졌다. 나지막한 괴성을 지르고 여자친구에게 카카오톡을 남겼다.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최고야.'

 회사 앞 좁은 골목길에 이르렀지만 딱히 갈 데는 없었다. '어디로 갈 건데?' '몰라.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글도 쓰고 커피도 마시고 그래야지.' '그래도 휴간데 어디 안 가?' '그러게. 어디 가지?' 휴가를 쓰고 나면 어디라도 가고 싶을 줄 알았지만 갈 데가 없는데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날 리 없었다. 매일 가는 스타벅스로 들어가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 갈피를 못 잡고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우선 근처 역으로 내려갔다. 먼저 삼각지를 떠야만 했다. 4호선과 6호선의 갈림길 앞에 놓였다. 놀기 좋은 동네가 많은 황토색을 택했다. 이제 방향을 택할 차례였다. 서쪽과 동쪽. 대충 좌측에는 합정동 우측에는 한남동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망설이는데 서쪽으로 가는 열차가 도착하기에 주저하지 없이 올라탔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자리가 한산했다. 의기양양하게 톡을 남겼다. '나 마포로 간다.'



지하철은 독서하기에 좋은 공간이다


 지하철은 독서하기 딱 좋다. 고개를 너무 숙이면 목 디스크 걸리기 십상이지만, 백팩에 폰을 얹고 '밀리의 서재'를 켜면 온당한 자세가 잡힌다. 난 내심 유튜브로 시간을 죽이는 치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아니 아르노'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누가 보면 유튜브 일절 안 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책 내용은 불륜과 치정의 콜라보로 격정적인데 왜 난 몰입이 안 될까.' 여자친구는 바쁜지 답이 없었다. 어쩌면 소설 속 이야기가 내 삶과 너무 멀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파리의 중심구에 살면서 점차 멀어지는 사랑에 고통받는 여인의 속내는 내겐 그저 픽션이 가져다준 환상일 뿐이었다. 잠을 깨려고 유튜브로 내 삶과 더 무관해 보이는 여당 당대표 선거 유세 영상을 봤다. 네거티브 네거티브. 말이 독하고 셌다. 정책 공약은 물 건너가고 상대를 깎아내려서 상대 이익을 보려는 심보가 다 보였다. '아직도 저런 구태의연한 수법이 통한다니.' 하긴 내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항시 남 눈치 볼 거 없이 자족하는 삶을 찬미하는 글을 써대지만, 늘 피드의 행과 불행을 의식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시간을 탕진하기 싫어서 폰에서 지웠지만 그렇다고 내가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그렇게라도 타인의 삶을 구경하면서 날 뭘 얻고자 하는 걸까. 내가 지인이 불행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면 과장일 테지만 그렇다고 지인이 행복할 때 온전한 축하를 보낸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그건 꽤 복잡한 심경이다. 누구 말마따나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지만 그렇다고 인스타그램 피드를 문지르는 손에 주저함과 망설임을 없앨 수는 없다.

 '역시 휴가는 부족한 수면이나 보충하라고 있는 걸까.' 톡을 쓰고는 잠시 눈을 잠시 감았다가 이번에는 비소설 책을 폈다. 스테판 츠바이크가 전기 형태로 쓴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에 관한 글이었다. 어린 마르셀은 혹독한 질병을 안고서도 사교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사람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그건 방대한 책을 쓰기 위함이었을테다. 나 역시도 지하철에서 사람 구경하면서 이야기를 상상하니까. 왠지 거장의 리추얼이 나와 비슷한 데가 있어서 마음이 갔다.

 마르셀은 불운하게도 불후의 걸작을 쓰고도 사후에야 명성을 얻었다. 그는 현대인이 앓는 각종 질병을 온몸에 품고 살아서 단 한 번도 건강하지 못했다. 그는 사망하기 16년 전부터 자신은 곧 죽는다고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죽음과 가까웠다. 그의 삶은 불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작가는 작가인지 불행마저 문학으로 풀어내서 불세출의 작품을 남겼다. 프루스트는 평소 일이 틀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마음을 키우는 건 슬픔이라며 고통 없는 인생의 허망함을 얘기했다. 그는 통증이 뭔가를 깨우친다고 믿었고, 그 생각을 길고 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포갰다. 소설 속 '나'는 어느 날 홍차에 마들렌을 찍어 먹다가 불현듯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코끝을 간질이는 홍차 향이 잠든 심연을 떠올리게끔 한다. “갑자기 모든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맛은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차에 살짝 담가 내게 건네주던 바로 그 마들렌 맛이었다.” '나도 저녁마다 홍차랑 마들렌 대신 스타벅스 커피랑 생크림 카스텔라 먹는데. 이것도 비슷하네.'



잠과의 투쟁, 케겔운동


 엉따가 작동하는 서울 지하철은 겨울에는 수면실과 다를 바 없다. 말로만 듣던 프루스트 효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들렌 적신 홍차향 대신 퀴퀴한 돼지갈비 냄새뿐이었지만,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취해서 꿈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유년의 기억일랑 떠오르지 않았지만 몸이 노곤해지면서 잃어버린 사람을 떠올렸다. 가만히 보니 다들 약속이나 한듯 건식 사우나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우리 모두 등만 대면 잠이 오는 현대사회 구성원 아닌가. 나도 효창공원역을 통과하지 전에 꾸벅거렸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긴급 케겔 운동을 시작했지만 졸음 앞에는 삼대 오백을 치는 장사도 별거 없었다. '꽉 쥐었다가 5초 지나고 풀고 릴랙스. 쥐었다가 버티다가 풀고 릴릭스.' 꿈나라로 빠져들면서도 벌어진 입을 마스크가 가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살짝 떠보니 방송이 들렸다. '이번 역은 망원 망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디스 스탑 이즈...' 평생을 들어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편안한 잠과 어울리는 안내방송 목소리는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삭막함을 녹여냈다. 비몽사몽간에 급히 내렸다. 캥거루 비슷한 동물한테 쫓기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마침 뒷덜미를 붙잡혀서 의식을 되찾은 참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달렸는지 왼쪽 장딴지가 얼얼했다. '그만 그만!'이라고 소리쳤는데 캥거루는 호주 출신이니 한국어을 모를 것 같아서 '스탑 스탑'하고 외친 기억이 났다. 그래도 캥거루가 덜미를 붙잡아주지 않았으면 내처 은평구까지 갈뻔했다.



우연히 떨어진 망원역 산책


 '나 망원역에 내렸어. 뭘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망원역 1번 출구로 나와서 하늘을 보니 요새 보기 드물게 날씨가 맑았다. 동네가 예뻐서 좀 걷기로 했다. 공기 질이 좋아서인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몸에 열기가 돌면서 이게 휴가의 맛인가 싶었다. 남들 다 일할 때 하는 걷기 운동이야말로 도시 산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닐까.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 보니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옷 속에 돌덩이를 잔뜩 넣고 우즈강에 천천히 스며든 날도 이런 맑은 날씨였다고 한다. 어쩌면 날씨는 그 자체로 문학일지도 모른다. 날씨는 그날의 기분을 달리하는 걸 넘어서서 어떨 때는 한 사람을 인생을 뒤바꿀 수도 있다. 날씨는 모든 걸 차치하고 다 괜찮은 기분으로 둔갑시킨다. 날만 좋으면 서울도 여느 유럽 도시 못지않게 근사해진다. 생의 대리체험이라는 문학이 줄 수 있는 효용과 그럴듯하게 일치한다. 이처럼 카페와 독립서점이 즐비한 망원역 부근 골목길은 기가 막힌 날씨와 협업하며 다소 우중충했던 내 휴가를 살려냈다.

 포털을 확인하니 서울은 백여 일 만에 미세먼지 수준이 ‘좋음’ 단계로 들어선 참이었다. '그동안 공기가 그렇게 나빴다니.' 날씨 핑계로 집에서 엎어져서 코 닿을 곳에 있는 공원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올해에는 윤중로는커녕 서울숲 나들이 한 번 간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한강 둔치에서 자전거도 타고 놀았는데 너무 옛날 일처럼 여겨졌다. 공기가 나쁘니 통창이 뚫린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도 창밖 한 번 보지 않았다. 수십 명이 칸막이 사이에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이놈 저놈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창문을 열고 환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확실히 미세먼지는 야외활동의 적이다. 외출도 제대로 못 하면서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류는 이제 먼지 때문에 산책도 마음대로 못 하는 신세가 된 걸까. 미세먼지는 러닝 불참 핑계를 대기에는 용이해서 간혹 친애하는 적이었지만, 나의 우아한 산책을 막는다는 점에서 다이어트에는 천적이었다. 러닝은 러닝머신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산책은 육체와 정신의 결합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에 이런 문장을 적기도 했다. "길을 걷는 것은 때로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여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만은 아니라 걷는 것에 의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트이고 추억이 해방되기 때문이다."

 하긴 최근에는 산책할 여유도 없었다. 퇴근하면 바로 카페로 가서 글을 써야 했고, 글을 쓰다 보면 바로 수면 시간이었다. 수면의 끝은 출근과 성기게 맞물려있다. 이거, N잡러 하려다가 일상이 조잡해졌다. 새 책에 매달리느라 자주 가던 러닝 크루도 빼먹기 일쑤였다. 요즘에는 날씨와 무관하게 한 시간에 한 번씩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가 부러웠다. 그들이 자체 발산하는 니코틴과 타르가 끓는 연기를 내뿜으며 도시 매연과 미세먼지를 비웃어대는 연기파들의 자기 파괴적인 용기가 호기롭다. 다 사무실에서는 쭈구리지만 짝다리를 짚고 허연 연기를 입에 머금고 킬킬거리는 그들은 내 건강 강박을 비웃는 듯하다. 다음에는 나도 껴달라고 할까. 담배는 안 피우지만 믹스커피가 빚어내는 노가리라면 자신 있는데. 옥상에 팔 굽혀 펴기 기구도 있다는데.



차를 사서 살이 찌는 팔자


 망원동에서 연희동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연희동 부근에 접어들자 신기할 정도로 길이 곱이곱이 나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집 구경 사람 구경하느라 어딘지 살필 마음이 가셨다. 이 부근 부동산 시세가 장난이 아닐 텐데 동네가 무척 소박해 보였다. 소박함도 돈이 많아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서글펐다. 그래도 커피값 정도만 내면 골목길 투어는 가능하니 다행이었다. 어려서부터 걷기 좋은 서촌이나 북촌에서 살고 싶었다. 지금은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인사동부터 통의동까지는 다 느긋한 산책자의 명소였다. 그땐 뭘 몰라서 북촌이니 연희동이니 골목길이 허름하니 비디오 가게 알바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요즘 평당 얼마라고?

 연희동을 지나 한참 걸으니 헬스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청량함이 느껴졌다. 오늘은 다른 생각 말고 나긋한 바람 불고 커피가 향긋한 데 가서 멍하게 놓여날 생각이었다. 한참 걷다 지쳐서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쉬었다. 다리를 꼬고 누가 읽다 버리고 간 한국일보를 읽었다. 미분양 사태에 전세사기라. 온통 부동산 얘기뿐이었다. 먹고 자고 쉬려는 건지, 집으로 제 존재가치라도 증명하려는 건지 통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다 미친 짓이었다. 다리를 풀고 아이들이 그네를 타는 걸 구경했다. 뛰어놀기에는 너무 작은, 지자체가 구색만 맞춘 코딱지만 한 공원이었다. '여기 그래도 공원 하나 있소. 봐봐 잘 보면 공원 맞잖아.' 강남만큼은 아니지만 서울 도심은 쓸만한 공원이 희박하다. 공원을 버스 타고 가야 할 정도다. 그때 바람에 휘날려온 전단에 눈이 갔다. 녀석은 비틀거리다가 머리 위까지 날아오르더니 내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어쩐지 의미심장해진 난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읽었다. "오픈! 초대박 세일! 헬스 등록하면 요가 필라테스 복싱까지 무료! 주차 두 시간 무료!" 난 파격적인 혜택이 가득한 광고 문구보다 공원보다 주차장까지 딸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운동도 차를 몰고 가서 하는 신세라니. 생각해 보니, 내 최근 운동량이 줄어든 이유도 승용차 탓이었다. 어디든 차를 타고 다니니 확실히 살이 더 붙는 기분이다. 물론 내가 살이 찌도록 많이 먹는다는 걸 알지만, 과거에는 어디든 걸어 다녀서 몸이 더 쾌활했다. 요즘에는 집 근처 어딜 잠시 들르더라도 주차장을 먼저 검색하고 나선다. 솔직히 말하면 괜히 차를 사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고 해서 차를 샀는데 막상 나는 차를 잘 쓰지 않는 인간이었다. 차를 사기 전엔 그걸 몰랐을까. 아니, 잘 알았다. 근데 이상하게 차를 살 땐 차를 사야 할 이유가 12만 4천 개쯤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 수 없는 허영심이 돌기 시작했다. 왠지 서른 후반에 접어든 내 나이에 걸맞은 차가 필요해 보였다. 때마침 내가 사려는 차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차라는 얘기도 들렸다. 오 문학적인데! 그리고 황수관 박사 못지않은 말솜씨도 한몫했다. '설득의 심리학'이라도 읽으셨나. 막상 새 차를 받고 알았다. 망할 실수였다. 뼈아픈 오판이었다.

 새 차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편한 지하철을 내버려 두고 굳이 운전대를 잡았다. 자동차 보험에 거리에 따른 마일리지 특약을 걸어놨는데, 내가 주행량이 턱도 없이 적다고 보험비를 꽤 환급해 줬는데 그게 더 날 조바심 나게 했다. '기타노 다케시'의 에세이에서 본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포르셰를 타고 싶었는데, 막상 포르셰를 사서는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포르셰를 타면 포르셰가 보이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고 비싼 차를 자기 차를 친구에게 줘버렸다. 친구가 운전하는 포르셰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따. 진짜 멋지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차를 타면 걷는 량이 줄고, 걷기가 줄면 유산소 운동을 더 해야만 한다.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는데, 비싼 세금을 내고 보험까지 든 차를 그냥 두기도 뭐 했다. 그러면 다시 팔면 그만이지 않냐고. 시세가 떨어져서 꽤 손해 보고 팔아야 한다. 망할 딜러자식. 있어 보이려고 차를 샀는데 막상 차를 타지 않아서 골치가 아프고, 없어 보일까 봐 차를 타면 또 차가 막혀서 골치를 썩이니 이거야말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냥 주차장에 박아두고 인증숏 하나 찍고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애물단지 보듯 한다. 뭐 말이 길어질수록 바보라고 시인하는 꼴이다.



건강한 몸을 강요하는 시대


 쉼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홍제동에 다다랐다. 홍제동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결국 홍제동에 이르러서야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둔 '투두리스트'를 떠올랐다. 카톡으로 현 상황을 보고했다. '이제 어디든 들어가 앉아야겠어. 손도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배도 고파. 어디로 갈까.' 골목마다 카페가 그득하니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난 다수의 선택지 앞에서 피로를 느꼈다. 우선 따질 게 너무 많다. 어디 커피 맛이 좋을지, 어디 주인이 친절할지, 어디 의자가 안락할지, 어디 화장실이 깨끗할지 알 수가 없다. 난 가방을 고쳐 매고 발길을 돌려 한 번 가본 적 있던 연희동 소재의 비좁은 독립서점 겸 카페로 들어갔다.

 한참 미뤄둔 원고 편집을 끝내고서야 책방 귀퉁이에 꽂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뜻밖의 만남에 반가웠다. '박민규 작가는 요즘 뭘 쓰고 계실까.' 소설은 내 기억과 달리 눈 오는 날씨로 시작했다. 새하얀 눈이 내리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추운 날씨에 꼭 붙어서 서로를 쓰다듬어 줄 만도 한데, 두 사람은 짐짓 얌전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유심히 보니 여자는 지독하게 못생겼고 남자는 지나치리만큼 평범하다. 못생기고 평범한 연인은 내 불손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정작 두 사람을 못살게 구는 건 바깥 타자들이다. 나를 비롯한 호사가의 야만스러운 입이 두 사람에게 모멸을 안겼다. 못생기고 뚱뚱해도 압구정 성형수술로 싹 다 뜯어고치면 단숨에 미녀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약을 파는 영화가 명절 영화로 대히트를 기록한 나라 아닌가. 우습게도 난 파반느를 읽으면서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라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삼겹살을 굽던 한 여자가 자기보다 뚱뚱한 상대에게 삼겹살에서 비계나 떼먹으라고 통박을 주는 장면이었다. 그걸 유머랍시고 쓴 천박함에 대해 생각했다.

 난 가끔 내가 헬스장을 빼놓지 않고 다니는 게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몸부림 아닐까 생각한다. 집착에는 뭔가 들러붙은 게 있을 테니까. 좀 더 솔직해지자면 성적 매력을 바탕으로 하는 연애의 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한 싸움을 지속했다. 뭘 하든 늘씬한 몸매를 선호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보기 좋은 몸은 어디서든 호감이니까. 자존심상 어디 가서는 내가 하는 운동이 더 나은 삶을 위한 기반이라고 얘기했지만, 그 '나음'이 오직 정신적인 측면의 고양과 버틸 수 있는 체력의 단련이라고만 할 순 없었다. 파반느가 나온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다르지 않다. 되려 몸뚱이를 노골적으로 계급의 영역으로 다루는 일이 자연스러워졌고, 인스타그램 속 멋진 몸에 조바심이 나서 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도 없이 땀을 흘린다. '요즘에는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애들이 더 마르고 날씬해.' 유튜브에는 다이어트 보조제의 부작용과 스테로이드를 불법 투약을 고발하는 '약투' 운동이 피드로 올라온 지 한참이다. 건강하고 보기 좋은 육체가 미의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안티에이징의 시장에서 인정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고작 헬스장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의문을 주렁주렁 달아놓는 게 오버일 수도 있지만, 운동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무조건 단순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타격 운동


 배가 고파서 근처 기사식당으로 향했다. 당연한 듯 생선 백반이 주문으로 들어갔다. 속으로 그래도 생선이니까 건강한 단백질이라고 위안으로 삼았다. '오늘은 닭가슴살 대신 등 푸른 생선. 내 몸도 푸르게 푸르게.' 손님이 거진 다 기사분이라 그런지 다들 지쳐 보였다. 서울 시내에서 운전한다는 게 어떤 건지 표정이 보여주고 있었다. 테이블이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쪽으로 놓여 있었다. 확실히 혼자 밥을 먹기 편한 식당이었다. 놀랍게도 칠천 원 가격에 고등어와 장조림에 된장찌개까지 나왔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뉴스를 보며 식사했다. 콩나물 무침이 자아내는 참기름 냄새가 고소했다. 뉴스룸에서는 고위층 인사 비리와 향응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튀긴 생선이 기가 기막히게 맛있었다. 그릇을 치우는 아주머니 손놀림이 어찌나 재빠른지 옆자리 손님이 자리를 뜬 지 10초 만에 새 테이블이 생겼다. 기자를 피해 급히 들어가는 유력 인사의 발걸음은 그보다 더 날랬다. 나도 카페에서 하도 날래게 타자를 쳐대서 손이 저렸다. 글쓰기도 엄연히 육체로 밀고 나가는 행위다. 키보드에 열 손가락을 써서 두드리는 건 분명한 타격 행위니까. 두드리고 때려서 글을 완성하면 튼튼한 집을 지은 목수가 된 기분이다. '좀 피곤하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오늘은 헬스장 안 가련다. 산책도 엄연히 운동이니까. '153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에서 갈아타려고.' 톡을 보냈다. 오늘 휴가도 이쯤에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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