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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4. 2023

운동도 문학도 틈틈이 짬짬이

헬스장을 못 가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부모님 댁에 머무는 명절 연휴에는 헬스장을 못 가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사실 못 가기보다는 안 가는 거라서 늘 마음만 어수선하고 불안하다. 한참 고민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소파에 드러누워 배를 긁는 식이다. 고향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정신이 나약해지는 걸까. 꼬리를 무는 생각이 우로보로스처럼 무한 루프에 빠져버린다.

 이 연휴에 오픈하는 헬스장을 어떻게 찾아. 그래, 나도 알아. 찾을 순 있겠지. 요즘 카카오맵이 다 알려주는데. 근데 거기가 운동하기에 적합한 시설을 갖췄는지는 어떻게 알겠어. 그래, 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바벨 하나만 있어도 운동할 수 있지. 요즘 헬스장 다 고만고만한 거 누가 모르냐. 검색만 해도 무슨 기구가 있는지 다 알 수 있는데. 근데 내 말은 다른 게 아니라 너 운동복이랑 스트랩도 안 챙겨 왔잖아. 빈손으로 무슨 운동을 해. 그러다 다친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요즘 기구 잘 나와서 보호장치 없이도 충분한 거 누가 모르냐. 운동복이야 츄리닝 아무거나 주워 입으면 되는 거지. 근데 문제는 그거뿐만이 아니야. 헬스가 끝나고 나서는 어쩔 건데. 너 단백질 쉐이크도 안 챙겨 왔잖아. 운동하고 단백질 안 먹으면 다 도루묵인 거 알아 몰라? 그래, 내 말이 조금 과장된 거 알지. 명절 음식이 다 고기랑 생선이라서 단백질 쉐이크 없이도 충분한 것도 알고. 근데 내가 우려하는 건 네가 고향 집에 일 년에 몇 번이나 온다고, 굳이 명절에까지 헬스장에 가서 부모님과 떨어져야겠냐.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나도 안다고. 거참 너도 참 집요하다. 그래 우리 부모님은 지금 손주 생각밖에 없다는 거 누가 모르냐. 나한테 관심 있는 건 오직 봉투에 얼마나 넣어왔는지 그 액수라는 걸 누가 모르냐. 내가 지금, 이 순간 사라져도 별 관심도 없을 거라는 거 나도 잘 안다고. 그래 너 말 한번 잘했다. 잘났다 이 새끼야. 그래도 나 헬스장 안 가!  왜 안 가냐고? 무슨 명절에 헬스야. 그건 좀 오버 아니냐. 가족이 모이는 날인데 어머니 설음식 만드시는 거나 돕는 게 낫지 않겠어. 아들 된 도리로서 그게 맞는 거지.


 결국 난 이번 연휴에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긍긍했다. 내 속에 자리한 생활체육인과 유교보이가 접전 끝에 명절에만 효를 논하는 아들내미가 승리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돕기라도 했느냐. '엄마, 내가 뭐 좀 도와줄까?' '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어 알았어.' 난 바로 애플TV를 켜고 드라마 파친코를 정주행했다.

 명절에 운동하겠다는 다짐이 무효에 그치는 이유는 다채롭다. 우리 집 소파가 너무 편해서다. 누우면 벗어날 재간이 없다. 내 자취방에서는 볼 수 없는 스마트 텔레비전도 위력적이다. 영롱한 화면이 무지갯빛으로 화면을 수놓는다. 자취하느라 못 먹었던 어머니표 요리도 놓칠 수 없다. 너무 배부르면 배부르다는 이유로 운동을 하러 가기 어렵다. 리모컨을 놓고 밖을 나선다는 건 이 모든 안락함과 영화를 포기하는 행위다. 뱃살은 득을 보겠지만 정서적으로 실이 크다.

 명절만 되면 특히 LA갈비가 날 미치게 한다. 라라랜드는 예술과 로맨스뿐 아니라 갈비도 뛰어난 건가. 궁금해서 검색창에 LA갈비 유래를 찾아보니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갈비를 뼈 방향대로 길게 잘랐는데 미국에서는 통째로 갈비 측면을 자르는 데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측면을 뜻하는 'Lateral Axis'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LA갈비는 로스앤젤레스 갈비 천사가 아니라 미국 코리아타운에서는 갈빗집에서 인건비를 아끼려고 뼈까지 통째로 썰어서 팔았다는 말이다. 모든 어원이나 유래가 그렇듯이 정확한 건 없지만 평생 LA의 화창한 날씨를 생각하며 고기를 뜯다가 갑작스럽게 도축 과정에 들어선 검붉은 소의 갈비뼈를 떠올리게 됐다. 그렇다고 갈비를 덜 먹었다는 말은 아니고.


 측면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측면 방향으로 썬 LA갈비처럼 나는 삶 속 요모조모에서 측면을 사랑한다. 정면 승부보다는 측면 승부를 더 선호한다. 삼국지 게임을 할 때도 조조 군의 요새를 빼앗기 위해서 관우와 장비를 이끌고 돌진할 때도 적진의 측면부를 노렸고, 글을 쓸 때도 하려는 말을 큰 주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숨겨진 이야기나 사소한 지식 따위로 잔재미를 자아내길 즐겨왔다.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도 '엔도 슈사쿠'가 어느 강연에서 한 말처럼 "소설가는 대설가가 아닌 작은 이야기를 하"기에 좋다. 인생이란 도무지 알 수 없고 어떤 결론에 쉽사리 내리기도 어렵지만, 소설은 작디작은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나처럼 측면으로 드나드는 사람을 위한 지침서와 같다. 두 발자국 뒤에서 눈치나 보면서 살아도 십자말풀이처럼 이리 대보고 저리 대보면 어느새 실마리가 잡히곤 한다. 난 내 서가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면서 내가 문학팀에 속한 걸 다행으로 여긴다. 가입신청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끼워준 것도 아니지만 나는 문학팀 뱃지를 달고 산다. 문학 역시 떵떵거리는 이들에게는 쥐구멍이나 다름 없겠지만 나처럼 책을 옆구리에 낀 애들은 그 텅 빈 구멍을 응시하며 살아간다. 나는 우리 팀이 잘했으면 좋겠다.

 지금 사는 작은 방도 정문 대신 옆문으로 드나든다. 출근할 때도 번쩍번쩍한 빌딩 로비가 부담스러워서 지하주차장으로 이어진 쪽문을 애용한다. 흡연 구역이 있는 쪽문은 누구에게도 눈길을 끌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쓸 때 '쥐도 새도 모르게'라는 관용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눈에 띄지 않는 게 속 편하다. 뭐가 꺼려져서 그러는 건 아니고 사람을 마주쳐서 멈춰 선 채 어색하게 얘기하는 걸 피하고 싶다. '오 선배 요즘 어때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침은 공복이라고요. 그럼 맛있는 커피라도 한 잔 드세요. 선배도 좋은 하루 보내시고요.' 눈을 찡긋하며 너스레를 떠는 내가 오그라든다. 의례적인 대화와 안부를 묻는 시추에이션이 왜 그렇게 불편한지 잘 모르겠다. 글에 관용구를 즐겨 쓰면서도 관용적인 만남과 대화를 어렵게 느낀다. 저 멀리서 아는 사람이 보이면 길을 돌아가는 타입이다. 당연하게도 가장 싫어하는 속담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이다.


 명절 첫날인 오늘 난 우리 아파트 측면에 붙은 계단을 이용해서 오르내렸다. 슈퍼마켓에서 사과를 사서 땀이라도 좀 흘릴 겸 16층까지 뛰어 올라가는데, 5층과 6층 계단 중간에 한 러닝셔츠 바람인 아저씨가 담배를 입에 물고 고스톱 게임을 했다. 밀키스 페트병을 재떨이 삼아 맛있게도 태우시더라. 꽁꽁 언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뱃불을 난로 삼아 러닝셔츠 하나로 잘도 화투장을 죄어 보였다. 좁은 통로라서 난 '실례합니다'하고 지나가는데 내가 전혀 실례하는 마음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평생 담배를 피웠고, 대부분 친한 친구도 애연가였으며 상대적으로 남보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지도 않았는데도 흡연자를 미워했다. 추운 날씨에 굳이 측면 계단실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가 짠해 보일 만한데. 심지어 아저씨는 굳이 누군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측면 계단에서 나를 맞닥뜨렸음에도 내가 불편할까 봐 봐 손바닥으로 연기를 쫓아 주셨는데도 그냥 아저씨가 싫었다. 난 흡연자란 자고로 그냥 미워해도 된다는 관념을 어디서 얻었을까. 누가 그를 건물 귀퉁이에서 눈치 보게 만들었을까. 담배는 지금 누가 파는가. 어쩌면 사적인 감정보다 사회 인식이 사람을 달리 보이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보다 사회적 틀이 더 앞선 경우는 이뿐만 아니라 허다하다.


 '언러닝' 상태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에는 백지상태가 될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꾸준히 쌓여온 고정관념과 구태의연한 태도를 말끔히 지우는 게 가능할까. 살을 빼려면 근력운동은 물론이고 유산소도 빼놓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짜여 있는 프로그램을 해체하는 데는 상당한 공력이 들 것이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은 거의 전부 대중문화에 의해 짜졌을 확률이 높다. 난 자라는 내내 텔레비전과 밤을 지새웠고 컴퓨터 게임으로 전투력을 키웠으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악행을 책과 영화로 배웠으니까. 일부러 배우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가 멀리하려던 수많은 괴물들과도 친해졌다. 그렇다면 생각도 매일 하는 운동처럼 덜어내는 운동도 해야 한다. 쌓아내기에 바쁜 와중에도 뭘 버려야 하는지 생각을 벼리지 않으면 내 소중한 골격근에 불필요한 지방찌꺼기가 잔뜩 낄 테니까. 헉헉거리며 벌써 16층에 도착했다.


 어릴 적에 아버지 담배를 몰래 훔쳐서 화장실에서 불을 붙여본 적이 있다. 뻐끔뻐끔하다가 변기통에 넣었는데 그건 아버지가 집에서 하시던 대로였다. 늘 혼자 집을 지키다 보니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놀았다. 그때가 아마 중학교 1, 2학년쯤이었다. 당시 좋아했던 홍콩 영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스파게티 웨스턴과 같은 장르 영화에서 하도 맛있게 담배를 피워대는 통에 나도 영향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담배가 싫지 않은데, 그건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는 과정이 꽤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기심에라도 계속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건 단연 운동능력이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해서였다. 방과 후에 학교 건물 뒤편에 가면 담배를 피우는 좀 노는 애들이 있었는데, 난 종종 걔들 사이에 끼어서 수다를 떨었으면서도 결코 담배를 받아 들지는 않았다. '야, 너도 한 번 피워봐. 그냥 쭉 들이마시면 된다니까.' '우리 형이 개띠라서, 나 피우면 죽어. 우리 형이 개띠거든.' 뭐 이런 식이다. 담배 피우면 일찍 죽는다는 말이나, 까닥하면 내 몸속 송사리가 병드니 조심하라는 말은 하도 얼토당토않아서 웃어넘겼지만, 이상하게 운동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신경 쓰였다. 난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어디서 뭘 읽었는지 난 어린 나이부터 설렁탕에 후추를 넣지 않았고, 고사리무침도 조금씩 집어 먹었다. 술자리에 가는 횟수는 나이를 먹을수록 줄어갔다. '나, 요즘 운동하잖아. 술은 다음에 하자.' 자판기만 보이면 율무차를 뽑아먹던 내가 율무가 남자에게 최악이라는 조선일보 생활 비즈의 한 사설을 읽고는 그 순간부터 자판기에서는 무조건 우유 버튼만 눌렀다. 반면에 부추나 굴은 기를 쓰고 찾아 먹었다. 이것 역시 부정확한 데가 저잣거리의 한량들이 떠드는 걸 필터링 없이 받아들인 부정확한 정보였지만 꽤 긴 시간 신봉해 왔다. 근데 이게 웬걸,  내가 아는 바람둥이는 죄다 흡연자였고, 여자에게 인기가 있다 싶은 친구는 말보로 레드를 사서 피웠다. 잘생긴 놈이 담배를 피우는 건지, 담배를 피우는 게 멋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신감이 들었다. 심지어 프로스포츠선수 중에도 꽤 많은 이가 애연가였다. 바람둥이에 밤만 되면 거리를 쏘다니는 한 선수는 늘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댔다. 물론 담배가 운동 능력에 도움이 될 리야 없겠지만, 뭔가 속았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담배와 술을 제외하고 내가 사랑하는 기호품은 단연 커피다. 다행히도 커피가 운동에 안 좋다는 말은 거의 없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오히려 에스프레소를 샷 추가해서 먹는 고카페인 커피는 운동에 일정 부분 도움을 준다는 얘기가 있다. 뭐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커피를 좋아하니 커피가 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담배와 술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눈총을 자아내지만, 커피는 모두들 무해하게 느껴서 좋다. 특히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가 술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면 이상하게 뭔 일이 터질 것 같고, 주변에 있는 무고한 이에게 해코지할 것처럼 느껴진다. 왠지 제 자식에게도 나쁘게 굴고, 내 여자에게도 가혹할 것만 같은 이미지다. 내 속에 악역이라면 단연 주정을 부리고 골초여야 한다는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한다. 그러니 실제 생활에서 얌전해 보이던 사람도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기 시작하면 타락한 어른으로 보인다. 이런 선입견은 추위에 떨면서 담배를 피우는 무수한 애연가를 상대화한다.


 명절에 운동하는 법에 관한 얘기를 쓰다가 글이 측면으로 빠졌다. 운동에도 측면이 있다. 명절연휴에 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측면운동이다. 폭식의 죄책감을 떨궈내고 과식의 더부룩함을 덜어내는 운동은 사실 운동하는 척에 가깝다. 그렇지만 쏟아져 나오는 설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미약하게나마 몸을 움직이는 게 이롭다.

 난 우선 전을 집어먹으면서도 홈트를 즐겼다. 텔레비전 앞에서 스쿼트를 하고 푸시업을 하면서 심호흡을 한다. 옆에서 형이 '그러게 명절에 유난 떨지 말고 평소에 시간 있을 때 운동을 해뒀어야지'라고 지적했지만 지지 않고 발끈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치고 평소에 운동하는 사람 못 봤네. 왜 이래 이거.' 말로만 떠드는 어중이떠중이의 손가락질 따위는 감수해야 한다. 다 먹고 마시고 즐겁게 명절용 파일럿 예능을 보는데 그 옆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니 창피했지만 어디 운동이 쉬운 적이 있던가. 맨몸 스쿼트를 좀 하다가 강도를 높이고자 근처에 있는 식탁 의자를 들고 중량 스쿼트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효도차 어머니를 무동 태우고 오르락내리락하고 싶었지만 대신 조카를 번쩍번쩍 들어서 스쿼트를 대체했다. 조카카 자지러지게 웃는 걸 보니 세뱃돈을 준비하지 않은 죄악을 씻어낼 수 있었다. 스쿼트는 온몸을 자극하는 전신운동이자 다관절 운동이라서 짧은 시간에 하체를 털어낼 수 있었다. 유산소 운동도 필요해서 집에서 빨래 건조용으로 용이하게 쓰던 사이클을 탔다. 주렁주렁 걸려있는 옷을 치워내고 본연의 기능을 살려주자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다. 내가 이번 명절에 쓰지 않았으면 3주 내에 당근마켓에 올라갈 판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켜서 과연 작동이 될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잘 돌아갔다.

 간간이 심부름을 할 때마다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고층 아파트는 계단이 고요하고 쾌적한 법이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오르락내리락하니 어느새 등허리에 땀이 찼다. 지칠세라 공원 산책을 나가서 철봉으로 턱걸이도 했다. 공원 구석에 있는 철봉에는 동네에 마실 나온 숨은 고수들이 있었지만, 주눅 들지 않고 광배근과 승모근을 자극했다. 그들은 뜨거운 시선을 의식하면서 이를 악물고 오르내렸다. 잔뜩 먹은 LA갈비가 단백질 알갱이로 바뀌어 내 몸속으로 자근자근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비록 운동하는 척에 그쳤지만 괜찮은 기분이었다. 명절은 곧 끝날테니까. 명절이 끝나면 기필코 운동하러 가야지.




https://www.yna.co.kr/view/AKR20170106077600064

* 일부 아파트는 금연구역이죠. 그래도 아저씨가 짠해 보여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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