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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7. 2023

라면을 당해낼 순 없어

VER. 2.0

ᅠ 부엌 찬장에 있는 라면 한 봉지가 문제다. 난 늘 붉은 봉투 안에 담긴 바삭바삭한 면과 불그스름한 액상 수프에 사로잡힌다. 더도 말고 면만 딱 건져 먹으면 깔끔할 것 같다고 타협에 들어갔다. 국물을 마시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날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그건 궤변에 불과했다. 고작 라면 하나 가지고 뭘 그러나 싶겠지만 며칠 전부터 샤워하기 전에 자꾸만 아랫배에 눈이 갔다. 평생 홀쭉하던 배에 묵직한 뭔가가 들어차 있었다. 설마 저게 다 라면인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매일 운동하고 그렇게 신경 써서 먹었는데. 억울했다. 방심한 만큼 억울했다. 억울한 만큼 고달팠고 그만큼 또 배가 고팠다. 근데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가까워졌다. 이 시간에 라면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영유아기 때부터 들어왔다. 식탁 위에 놓인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바닥에 깔고 거기에 라면 냄비를 얹으면 나 스스로를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난 도리질을 치며 도리 없이 다시 넷플릭스로 눈을 돌렸지만 얼마 못 가 허기가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잊어보려고 했지만, 라면 끓는 형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그죽죽한 국물이 환락가의 네온사인 불빛처럼 번쩍거렸다. 멜론 Top 100을 도배한 후크 송처럼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 전두엽 위에서 용암처럼 보글거리는 라면 냄비가 어렸을 때 보던 야동처럼 나를 곧추세웠다. 차가운 마룻바닥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나는 저항도 못 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머릿속으로 물을 끓였다가 싱크대에 부어 버리기를 반복했다. 냉동실에 가득 찬 닭가슴살은 냄새조차 맡기 싫은데 대체 왜 라면은 떨쳐낼 수 없을까.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애초에 왜 사다 놨을까. 이런 안일한 태도가 날 인스턴트 하게 길들였다. 일하거나 글을 쓸 때도 허겁지겁 마감 시간에 맞춰 가까스로 해내지만, 정작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은 놓칠 때가 잦다. 원고를 다 보내고 나서야 자잘한 실수가 눈에 들어온다. 거기에도 내 안일함이 뱀 새끼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어쩌면 라면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 일상 전반에 널리 퍼진 안일함을 암시하는 적색경보.


ᅠ 밤을 습격하는 허기는 지병처럼 날 따라다녔다. 나이를 먹어도 어느 욕구 하나 잠잠해지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식성은 안하무인에 가깝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는 문을 두드리고, 새벽잠을 방해하고 아침 댓바람부터 속을 쓰라리게 만든다. 나는 내 일상에 음식 냄새를 지우고 싶었다. 아침 출근길엔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족하고 저녁이면 사과 반쪽만 먹고도 원고지 스무 매 정도는 야무지게 써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식당에 가면 이성을 잃고 유달리 열심히 먹는 사람이다. 가끔 야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과도하게 먹는 푸드파이터다. 이제 식욕과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ᅠ 며칠 전에도 밤늦게까지 허기에 시달리다가 라면을 원하고 원망했다. 운동의 적은 게으름이 아니라 5분이면 끓여낼 수 있는 라면이다. 유튜브만 틀면 다들 라면 먹방을 하고 있으니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튜브 먹방 콘텐츠는 죄다 농심이 제작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분명히 나는 운동 유튜브 채널에 들어갔는데, 그는 조회수를 위해 운동 대신 라면 먹방을 감행했다. 화면 위에는 제품 협찬을 받았다는 안내 문구가 자그맣게 적혀있었다. 로마 검투사처럼 굵직한 복근을 자랑하는 유튜버는 하루쯤은 라면을 먹어도 괜찮다면서 무려 다섯 봉지나 까서 잡쉈다. 오늘은 기필코 굶고 자려고 결심을 굳힌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난 과감히 구독 취소 버튼을 누르려다가 그 거침없는 젓가락질에 홀려서 영상을 끝까지 다 보고 말았다. 그의 직업이 인플루언서라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바흐의 아다지오를 틀고 이다지도 배가 고픈 이유는 다 끊어낼 수 없는 공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생의 허무가 배때기를 가득 채워서 그렇다.


 ᅠ새벽은 내게 취약한 시간이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전화통을 붙잡고 늘어지는 새벽이야말로 지극한 라면의 시간이다. 내가 방심한 사이 어느새 머릿속에서 라면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엑셀 시트처럼 착착 쌓이는 게 느껴졌다. 마의 새벽 두 시를 넘기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시간의 잔해가 나뒹구는 황량한 벌판에서 라면 국물로 체온을 유지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니까 라면은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 나를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불면증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에게 상담받았어도 처방전에 신라면 한 봉지라고 적어줬을 것이다. 뜬눈 사이로 스며드는 고독을 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탱글탱글한 면발과 벌건 국물을 복용하기로 했다.


 라면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날 재워준 약이다. 그것도 늘 사다 놓는 상비약이다. 다 떨어져도 걱정할 거 없다. 편의점에서 연중무휴 종류별로 팔아대니까. 나약한 나는 불면증이 극심할 때는 라면을 복용해야 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텅 빈 속을 뜨끈한 국물로 다 채우면 다시 잠을 청할 수 있다. 살도 살이지만 심신이라도 편해야 아침에 출근할 거 아닌가. 어떻게든 이 밤을 무사히 넘겨야 살 거 아닌가. 가수 이소라도 'Track 7'에서 이런 가사를 적지 않았나. "지난밤 날 재워준 약 어딨는 거야. 한 움큼 날 재워준 약 어디 둔 거야. 나 몰래 숨기지 마, 말했잖아, 완벽한 너나 참아." 나도 참아보려고 했지만, 라면만 한 위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라면이라면 그래도 건강하게 먹어야 한다. 아니 어쩔 수는 있지만 라면은 불완전한 식품이라서 늘 단백질 함량에 신경을 써야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다. 펄펄 끓는 국물에 달걀 두 개를 풀고 두부에 버섯까지 썰어 넣고 참치통조림 하나까지 투하하니 거의 부대찌개가 됐다. 어떻게든 하루 권장 단백질량을 맞춰내려는 욕심이다. 버거킹에서 와퍼를 더블 패티로 시키면서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하는 꼴이지만 어쩌겠는가. 라면이 불완전한 만큼 나도 불완전한 사람인데.


 라면이 다 끓어서 젓가락을 들었더니 더는 거칠게 없어졌다. 이성을 잃은 내 목구멍은 국물까지 다 받아넘겼다. 라면 면발을 받아내는 그 순간만큼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극도의 쾌감에 젖어서 흘러내리는 땀까지 목구멍으로 받아넘겼다. 공허함은 국물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햇반까지 하나 까서 밥에 담갔다. 디저트로 사과까지 깨물어 먹고 나니 비로소 다자이 오사무가 왜 자기가 정성 들여 쓴 소설에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카톡을 하던 친구는 그거 먹는다고 아무것도 달라질 거 없다고, 뭘 그렇게 애쓰냐고 놀리듯이 얘기했지만 난 믿지 않는다. 나쁜 새끼. 지는 다이어트 도시락 시켜 먹으면서 남 일이라고. 다른 사람 말은 신경 쓸 거 없다. 이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래 나도 안다. 라면 한 그릇 먹는다고 달라질 게 뭐란 말인가. 근데 난 배에 기름이 차면 목숨보다도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무라이처럼 할복할지도 모른다. 벌써 배 나오면 생을 달리할 거라고 여기저기 말해뒀다. 주위에 매일 운동한다고 그렇게 떠들고 다녔는데, 운동에 관한 에세이까지 쓰겠다고 썰을 얼마나 풀었는데 뱃살이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다. 오늘은 라면에 당했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다음에는 절대 지지 않으리라.


ᅠ 결혼한 내 친구 병석이는 매일 야식을 달고 살지만, 난 녀석과 선을 긋고 날렵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 결혼식장에서 탕수육을 산처럼 쌓아놓고 본전이라도 뽑겠다며 기를 쓰고 배를 불리는 녀석과 같아질 순 없는 노릇이다. 난 아직 배 나온 아저씨가 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여기서 더는 물러설 수 없다.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엄연히 작가니까. 배가 나오면 그걸로 끝이라고 여기는 사소설을 쓰니까.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존경하는 작가는 죄다 삐쩍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내게 술 냄새를 풍기며 글을 쓰지만, 결코 끼니는 제때 챙기는 법이 없는 이미지다. 마치 김수영 시인처럼 헐렁한 남방을 입고 김치에 소주를 마시는 게 내가 지닌 병적인 작가상이다. 이런 식이니 난 걸출한 책을 써낼 때까지 절대 고도비만이 될 수 없다.


 ᅠ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작 구백 원짜리 신라면 따위에 굴복한 내가 미웠다. 꼴이 말이 아니다. 내 서른여섯 봄은 이렇게 무너지는가. 이제 곧 셔츠의 계절이 올 것이다. 작년까지 입던 맞춤 셔츠가 작아졌다. 단추가 반만 잠기니 도무지 더는 입을 수가 없었다. 그게 다 얼마짜린데. 헐값에 당근 마켓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초조해졌다. 그래 모든 게 다 정신력 싸움이다. 그래 민진아, 넌 지금 외로워서 먹으려는 거야. 고독을 왜 국물 따위로 달래려 하니. 넌 문학으로 달래야 하잖아. 저기 쌓아놓은 책만 봐도 배부르지 않니. 운동의 주적은 라면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겠니. 난 혼잣말로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ᅠ아무리 생각해도 내 미각은 너무 무디다. 이른 취업으로 혼자 오래 살아서 바깥 음식에 익숙해졌다. 혀가 둔감해졌고, 미식은커녕 끼니를 때우기 바쁘다. 예술을 감상할 때도 미감이 무디면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기 어려워진다. 감식안에 백태가 끼면 자꾸 소금을 치게 마련이다. 그러니 허구한 날 지구를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반복에 익숙해진 나는 뭘 보든 쉽사리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원색으로 처바른 빨간 신라면 봉지는 내 돌덩이 같은 미감을 잘게 깨부수었다. 취향도 신경 써서 관리하지 않으면 군살이 붙는데 미각은 오죽할까.


ᅠ 글을 쓸 때도 독한 어휘에 의지했다. 위악과 냉소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부끄럽게도 끓는 라면처럼 얼얼한 문장을 써먹으면서 섬세함을 놓쳤다.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했다. 읽히고 싶어서 쓴 글이었지만, 읽히면 부끄러워지는 글이기도 했다. 내가 지향하는 바는 미세하게 변하는 하루를 공들여 쓴 글이다. 음식을 예로 들면 화려한 궁중요리보다는 담백한 초밥이 어울린다. 만화 <미스터 초밥왕> 쇼타가 만든 연어알 초밥처럼 밥알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붙어있는 글이라면 좋겠다. 재료 본연의 신선도를 중시하고, 장인의 솜씨에 따라 맛이 미세하게 변하는 그런 경지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신라면부터 줄여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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