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 2.0
ᅠ헬스장에서 1시간가량 운동하고 프로틴 가루를 물에 타 마시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스타벅스에 다다랐다. 자주 반복하는 패턴이다. 그런데도 하체 운동은 오늘도 새로웠다. 종아리부터 대퇴사두근과 둔근까지 땀을 철철 흘리면서 자극했는데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힘들었다. 정수기에 물을 뜨러 가다가 다리가 풀려서 휘청였다. 초과 회복이란 근육이 파열한 자리에 근섬유가 자라나면서 아무는 과정을 말한다. 이러니 매일 해도 새로운 근육이 자라나려면 또 새로운 통증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어릴 적에 지점토로 만든 공룡이 건조한 공기와 햇볕에 못 이겨 쫙쫙 갈라지면 거기에 점토를 덧붙여서 보강했다. 난 오늘 하체 운동을 하면서 티라노사우르스의 거대한 허벅지에 초콜릿 맛 단백질 알갱이가 들러붙는 광경을 상상하며 버텼다. 더 찢어야 해. 더 아파야 해. 통증이 근육이야. 아픔이 운동이야. 표정은 비장해지고 복식 호흡에 따른 민망한 숨소리가 터져 나와서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샀다.
ᅠ헬스장 사람들은 친근하다. 멋지고 육감적이다. 그들의 움직임과 육체의 부딪힘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일상의 마법이다. 난 글을 쓰지만 게으르게도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언어가 제 기능이 도달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순간, 정확한 동작을 취하는 근육은 열띤 분위기로 무료한 하루를 압도해 낸다. 끈끈한 육체 간의 움직임, 감정의 보폭이 출렁이는 기합 소리. 살을 도려내고 찌르고 짓이기는 고통의 신음. 그들을 보는 건 확실한 자극이자 관능이다.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눌 수 있다면 무엇이 더 나에 가까울까. 난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신을 믿고 살았다. 유물론자보다는 관념론자에 가까웠다. 사실 그렇게 배워왔다. 플라톤을 위시한 현대철학은 정신의 개념을 무한히 확장했다. 하지만 정신을 받들고 사는 삶은 학교에서 배운 건 실생활에서 영 쓸모가 없다는 통념만 강화할 뿐이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과 같은 허울 좋은 말은 화장실 변기 앞에나 적혀있는 문구에 불과했다. 하나 예를 들면, 치통 앞에서 인간은 정신머리를 논할 수 없다. 어금니가 욱신거리면 세상이 다 치통으로 보인다. 이성이고 뭐고 오직 육체의 통증만이 날 지배한다. 내 거죽이 내 신원을 증명하고, 카프카의 소설처럼 내 몸이 벌레로 변하면 우리 엄마는 두루마리 휴지로 나를 으깨서 변기통에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난 헬스장을 갈 때마다 육체가 내 존재에 더 가깝다는 확신을 얻고 온다. 정신은 그저 뇌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mens sana in corpore sano).” 이는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가 쓴 시의 한 소절인데,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이 이걸 올림픽 슬로건으로 써서 널리 퍼뜨렸다. 스포츠를 통해 범생이처럼 책만 읽던 선비들에게 우선 건강한 몸부터 챙기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무엇보다 육체의 힘을 정신력에 선행하는 가치로 해석했기에 나도 글에 곧잘 인용하는 경구다. 정신의 기반에 육체가 있으며, 이성적인 삶도 육체가 단단할 때 빛을 발한다. 근력이 빠지고 몸이 비실비실하면 삶을 실감하는 바도 무뎌질 것이다. 그렇다면 헬스장이 이 도시의 지성을 지탱하는 도서실과 같다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ᅠ샤워하고 헬스장 거울에 내 몸을 비춰봤다. 아직 사람이 없을 시간이라서 그런지 체중계에도 오르고 이리저리 몸을 점검했다. 조명이 괜찮아서 배에 뭐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스멀스멀 윤곽이 좀 보이는 걸 보니 최근에 덜 먹은 효과를 본 모양이다. 거울에 비친 몸이 절대적으로 내 기분을 좌우한다고 느꼈다. 몸은 운동하고 났을 때 가장 예뻐 보인다. 그러니까 난 거울에 내 몸을 만족스럽게 비추기 위해 운동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말인즉슨 조금만 방심해도 거울은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그럴 때는 눈도 못 마주치고 헬스장을 박차고 나간다. 몸이 무너지면 각양각색의 불안과 실망이 찾아온다. 친구는 뭘 위해 운동을 하냐고 물어보지만, 정확하게 그걸 짚어낼 순 없다. 몸은 너무 다채로운 기쁨과 슬픔을 자아내니 하나를 콕 얘기할 순 없다. 확실한 건 몸은 에두르는 법이 없고 늘 김구라식 직설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방심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ᅠ난 유독 엉덩이와 허벅지 굵기에 연연한다. 이온 음료 광고와 같은 호승심을 자아내는 부위다. 거울 속에서 허벅지와 엉덩이가 늠름해 보이면 만족스럽다. 비친 몸은 그날 하루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결정해 준다. 오늘 출장을 가서 피로를 무릅쓰고 체육관에 와서 몸을 굴렸으니 합격! 주말에 마라탕에 탕수육을 먹을 자격 획득! 어떤 날은, 오늘은 엉덩이가 파전처럼 축 처졌으니 탄수화물 제로! 허벅지가 앙상해 보이니 군것질 금지! 몸이 날 치하해 주면 감격해서 촐랑거리면서 적당히 하다 가고, 몸이 날 배신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중량을 더 끼운다. 오늘은 거울 속 하체가 이상 징후를 나타냈다. 군살이 보이면서 지난주까지 선명했던 라인이 지방에 묻혔다. 그렇다면 더는 주말의 만찬을 누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내 주말은 조건부 행복이고, 조건 충족 여부는 헬스장에서 판가름 난다.
ᅠ 오늘도 성급한 마음에 평소보다 바벨을 더 끼우고 하체를 했더니 야릇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 맛에 운동한다. 계단을 오를 때 다리가 비틀거리더니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 제대로 했다는 생각에 풀린 동공에 세레나데가 흘렀다. 일을 아무리 잘해도 본전이고, 아무리 책을 읽어도 똑똑해지진 않는데 운동은 내게 평온을 가져다준다. 오직 몸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자유이용권 티켓이다. 놓고 온 게 있어서 잠시 사무실에 들르니 퇴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짜장면을 시켜 먹는 동료들이 보였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지방은 고지혈증을 비롯한 혈관계 질환을 유발하기 마련인데, 쯧쯧. 지금 만삭을 하고 짜장이 입에 들어가냐 김 부장. 웃기는 짜장이네. 난 우월감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맛있게들 드시라고 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땀과 암내로 이뤄낸 값진 1승이었다.
올해 가을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예매했다. 하프 코스를 뛰고 광화문 한복판에서 지쳐 쓰러지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허파가 아파서 컥컥거리면서도 끝내 완주해서 소금기 밴 셔츠를 벗고 샤워하러 들어가는 광경이 먼저 떠올랐다. 얼마나 짜릿할까. 그러고 나서 고기를 먹으면 붉은 돼지의 등허리 살이 내 근육으로 탈바꿈하리라. 최근에는 마라톤을 대비하면서 한쪽 다리씩 운동을 하고 있다. 두 발로 딛는 스쿼트보다는 한 발만 쓰는 런지 위주의 운동으로 루틴을 짰다. 무게보다는 횟수와 속도를 늘려가면서 유산소를 겸했다. 헬스인은 심폐지구력을 놓치기 쉬운데 보통 유산소 운동을 하면 근 손실이 난다는 허무맹랑한 편견 탓이다. 아니 내가 강경원이나 황철순 같은 빌더라면 근 손실을 걱정해야 마땅하다. 우선 먼저 생각해야 할 건 내가 그 정도로 잃을 근육이 많은 사람인지에 대한 자각이다. 난 유산소를 좀 한다고 근력이 빠져나갈 만큼 근육질이 아니다. 더군다나 내가 선수도 아니고. 잔고에 0도 몇 개 없는데 거기에 손실이 있어 봤자지. 내 경우에는 오히려 유산소를 보태주면 이자가 더 붙는 경우다. 살 속에 파묻힌 근육이 조금이라도 빛을 볼 테니.
ᅠ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프로틴 음료가 유독 맛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탄산수 한 통을 다 비웠다. 오늘 저녁 구내식당 메뉴는 오삼불고기였는데, 식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밥은 최대한 적게 펐고 고기를 최대한 많이 푸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영양소를 이상적으로 배분해 준 영양사의 눈총을 무시하고 고기 과다 섭취라는 이상 행위를 했더니 어쩌나 노려보시던지. 개의치 않고 심심한 숙주나물과 오이김치도 잔뜩 펐다. 그리고 기특하게도 된장국은 우거지만 건져 먹었다. 누군가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생각할 테지만, 이렇게밖에 할 수 없으니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국밥집에서 곱빼기로 시키면서 밥은 반 공기만 마는 것과 비슷한 마음가짐이다. 할 수 있는 선에서 하고 살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위안이 된다.
살면서 종종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야, 그렇게 관리해서 뭐 하려고 그래. 어차피 다 쭈글쭈글해질 텐데 너무 애쓰지 마.’ 뭘 그렇게 애를 쓰고 뭘 그렇게 아등바등하냐는 질문은 날카롭다. 갑작스럽게 삶의 덧없음과 허무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한 시간씩 쇠와 씨름하고 맛없는 닭가슴살을 씹어대는 내게 이건 기습이다. 화가 나지만 일리가 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관리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럴 때마다 난 터무니없게도 ‘테런스 데 프레’라는 작가가 쓴 <생존자>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폴란드 작센하우젠에 있는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 새로 신참자가 들어왔을 때, 그 무섭고 절망뿐인 밤에 선임 수용자는 벌벌 떠는 신참자에게 다가가서 이런 말을 해주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내가 자네한테 우리들이 겪은 일을 말해주는 것은 자네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 힘을 내게 하기 위해서야…이제 절망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자네가 알아서 결정하게.” 헬스하고 식단 하는데 무슨 강제수용소까지 들먹이냐 할 테지만, 이 책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의 얘기를 듣다 보면 다시 주먹을 꽉 쥔 기분을 되찾을 수 있다. 삶은 황량한 데다 종종 끔찍하고, 세상은 우리가 어떤 고생을 하든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포기는 늘 혓바닥이 긴 사람의 몫이다. 슬램덩크 안 선생님 말씀처럼 포기하는 순간 시합은 그걸로 끝이다. 산 송장이 되기 싫다면 시쳇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몇 년 전에 밥맛 떨어지는 일이 생겨서 살이 쭉쭉 빠졌던 시기가 있다. 삶이 즐겁지 않으니 도무지 헬스장에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음고생하니 체중계도 응답을 시작했다. 근육도 질세라 쭉쭉 빠져나갔다. 운동과 식욕은 오직 몸의 문제라고만 여겼는데 처음으로 몸이 마음과 한통속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운동과 기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닭이야 달걀이냐의 문제처럼 전후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삶에 얼마나 깊은 절망과 슬픔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몸과 마음이 서로 숙제를 미루지 않고 맞잡아 들며 버텨나가는 게 중요할 것이다. 몸이냐 이성이냐 아무리 따져봤자 둘 다 중요하다. 어느 쪽도 무너질 생각은 없다.
ᅠ시원한 카페 1층 널찍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신발을 살짝 벗고 발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열기를 식혔다. 사이렌 오더로 오늘의 커피를 시키고 노트북을 폈다. 몸이 노곤했지만, 할 게 수두룩했다. 군것질하지 않고 오늘 할 일만 딱 끝내고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케이크나 빵은 절대 먹지 말아야지. 근데 왜 가방에서 떡이 나오냐. 이게 무슨 떡이었더라. 하도 오래된 거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딱 봐도 상한 듯 보여서 그냥 버렸다. 떡 외에도 아몬드와 바나나까지 나왔다. 외투 주머니에서는 하루 견과도 한 봉지도 나왔다. 급작스러운 허기를 대비한 군것질 방지용 간식이다. 먹어도 수습할 수 있는 것만 먹으려는 구호 물품이다. 난 정확하게 아몬드 한 주먹을 손아귀로 쥐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아냈다.
며칠 전ᅠ퇴근하기 전에 보고서를 쓰는데 잘 모르는 한 직원이 결혼했다고 떡 선물을 돌렸다. '저 결혼해서 기념품을 좀 드리려고요.' '아 축하드려요. 결혼하셨는지도 몰랐네요. 잘 먹겠습니다' '제가 회사 게시판에 결혼 소식 올려놨는데, 못 보셨나 봐요?' 약간 상기된 목소리에 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제가 경조사 게시판을 잘 보진 않아서요. 죄송해요. 너무너무 축하드려요. 떡 잘 먹을게요.' 난 눈도 못 마주치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경조사 떡 전문'이라고 새겨진 포장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가 사무실 문밖으로 나서자 부장은 불평을 쏟아냈다. '아니 무슨 청첩장도 안 주고 떡만 돌리고 그러냐? 쟤는.' 공짜로 주면 곱게 먹으면 좋을 텐데. 그는 쓸데없이 질문을 해댔다. 누구랑 결혼했는지, 조직 내부 사람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아무도 몰랐다. 저 사람이 누구였지. 전에 본 적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저 건너편 자리에서 그가 김 아무개 직원이라는 말이 들렸다. '와 저분 살 엄청나게 뺐네요. 이제 뼈만 남았네.' 김 아무개? 나랑 맨날 헬스장에서 마주치는 그이? 알고 보니 결혼한다고 살을 하도 많이 빼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째 낯이 익는다고 했더니. 결혼이라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내가 그토록 노력해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던 다이어트를 저리도 단시간에 해낼 수 있게 하다니.
ᅠ난 독한 5월의 신부가 날씬한 몸매로 입장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떡을 가방에 넣었다. 떡을 맘 놓고 먹기가 어려웠다. 인바디 기계는 내 체지방률이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알려왔다. 어렸을 적엔 엄마가 시장에서 인절미 한 팩을 사 오면 가루까지 털어서 먹곤 했는데, 엄마가 내 삶과 멀어지니 떡과도 멀어졌다. 가래떡을 구워 먹는 일도 없어졌고, 명절에 송편을 먹지도 않았다. 떡은 체중 관리에 별로고,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아서 따로 사 먹을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탄수화물을 점점 더 죄악시하는 내 식성 탓이 크다. 탄수화물 강박증에 걸린 난 달곰한 꿀떡을 휴지통에 넣고, 쓰기만 한 커피를 마셨다. 종일 커피를 달고 사는데 커피 덕에 수많은 군것질의 유혹을 참아낼 수 있었다. 너무 썼지만 글 쓸 땐 입이 쓴 게 더 어울린다. 입이 달면 슬픔을 제대로 적을 수 없다. 누워서 떡을 먹는다는 속담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절대 아닌 것처럼,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리라. 오늘따라 커피가 더 써서 무슨 원두인지 확인하니 수프레모였다. 에티오피아의 해발 1,600미터 고산지대에서 딴 원두를 동아시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더 작은 도시에서 먹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고급 원두로 만든 커피는 종일 지끈거렸던 내 스트레스를 잠재워냈다. 교감신경과 집중력을 항진하는 진한 커피는 내가 휴식할 때마다 날 버텨내게끔 도와줬다. 커피에 만취했더니 근육통도 잠잠해지는 기분이다. 종일 일하고 운동까지 열띠게 하고도 키보드를 붙들 수 있는 건 다 이 카페인 덕분 아닌가. 마음이 맨송맨송해지는 야밤이라 더 배가 고팠지만, 커피 덕분에 버틸만했다.
ᅠ니체는 말했다. "어떠한 심오한 철학보다 더 큰 지혜가 육체에 담겨 있다"라고. 내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일은 몸을 움직이는 일뿐이라는 말로 들린다. 글은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내게 뭔가를 보여준 적이 없지만 몸은 항상 정직하고 털털하게 자신을 내보였다.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물 한 잔 마시고,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를 바라보는 것만이 내겐 유일한 확신이다. 이 시간이 없다면 하루는 부유하는 물처럼 썩은 냄새만 가득 찬 곳이 될 것이다. 아득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샤워하고, 허겁지겁 밖 공기를 한숨 들이마실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몸과 정신이 완벽하게 호응하는 순간이다. 난 무한대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 있는 육체의 엄연한 존재감에 괜스레 몸을 떨었다. 난 이 글을 쓰며 몇몇 아름다운 육체의 순간을 떠올렸다. 손흥민의 넓적다리와 르브론 제임스의 길쭉한 팔. 황철순의 흉부와 윤성빈의 대퇴사두근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육체가 자아내는 감흥은 형언하기 어렵고, 그 느낌을 입에 올리는 순간 금세 소멸하고 만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걸 말로 뭉개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비록 너저분하지만 내가 가진 몸에 관한 애틋함을 최대한 정확하게 써내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