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페어웰이라는 영화를 보며 잠들었는데, 오늘 마저 다 보면서 생각했다. 흐름이 끊기고 말았어. 고작 이십 분 남기고 잠들다니. 감상을 이어 붙이려고 했지만 성기고 느슨했다. 페어웰은 좋은 영화였지만, 내 노트북으로 오늘마저 다 본 영화가 연출자가 의도한 대로였는지 의심스럽다. 안타깝게도 난 페어웰의 개봉 시기를 놓쳤고, 넥플릭스는 얼마 따끈따끈한 이 영화를 론칭했다. 넷플릭스는 끊어볼 수 있는 편리한 도구이고, 난 그걸 편히 이용했다.
페어웰은 중국 창춘과 미국 뉴욕의 하늘과 건물, 거리와 사람들을 자주 비추는데 영화관에서 봤다면 그 도시로 쑥 들어간 것만 같은 실감을 줬을 것이다. 그만큼 두 도시의 공기를 잡아내는 게 영화에서 무척 중요했지만, 맥북은 고성능임에도 그 느낌을 완전히 구현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고집일지도 모른다. 페어웰은 마블 영화처럼 상대적으로 특수 효과나 사운드가 중요한 영화는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작은 규모의 영화는 작은 대로 저만의 뉘앙스를 가진다. 작은 영화라고 아무 환경에서나 봐도 괜찮을 리 없다.
넷플릭스다 왓챠다 뭐다 해서 극장에 가는 사람 수가 크게 준 모양이다. 난 큰 텔레비전도 없고 작은 노트북 화면이 싫어서 매주 한 번 이상 영화관에 간다. 극장에 갈 때마다 관객이 줄어든 걸 체감하고 있다. 코로나가 극심할 때는 정도가 심해서 극장 한 관에 여자친구와 단 둘이 있을 때도 잦았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사람 없는 영화관은 쓸쓸했다. 어떨 때는 혼자서 보다가 별 심상한 장면에서 혼자 웃기도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혼자라도 크게 소리를 내봤지만,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는 게 서글펐다. 자고로 극장이란 웃기는 장면에서는 함께 웃고 슬픈 장면에서는 이곳저곳 티슈로 눈물이라도 훔쳐줘야 더 실감 나게 다가오는 법이다. 썰렁한 극장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홈트’를 들 수 있다. 집에서 하는 헬스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나도 당근마켓에서 하프랙 사 온 적이 있다. 누군가의 빨래 건조대로 전락한 걸 큰맘 먹고 구출해 왔다. 중고였지만 헬스기구 특성상 튼튼하고 싸서 합리적인 소비였다. 난 당장 헬스장을 그만두고 홈트를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 3대 운동을 다 할 수 있으니 이참에 헬스장에 가는 시간과 돈이 굳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내 집에 설치한 홈트 기구는 빨래건조대마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헬스장의 필요성만 절감했다. 그건 사람 없는 극장처럼 고요한 기분 때문이었다. 집에서 홀딱 벗고 운동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고 내가 의식할 누군가가 없으니 운동할 맛이 떨어졌다. 헬스장에 사람이 북적거리면 시종 눈치 보면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고 옆에서 깔짝거리면 성가시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막상 내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에서 혼자 운동하려니 이름 모르는 누군가와 맺은 느슨한 유대감이 그리웠다.
영화관의 최대 이점은 첨단 시설이지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권은 부자유다. 앞 좌석에 다리를 올려놓을 수도 없고, 뭘 먹으려면 소리가 날까 두려워 침으로 녹여내야 하지만 그게 바로 순도 백프로로 영화를 접하는 비결이다. OTT로 영화를 보다 보면 스페이스를 치고 화장실에 가고, 물 한 번 마셨다가 생각난 김에 담배도 한 대 피운다. 그럼 흐름이 툭 끊기도 창작자가 만들어낸 리듬도 흩어지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보는 영화는 본 것도 아니다. 쇼트와 쇼트 사이가 빚어내는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 영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환경에서 이놈 저놈 냄새가 나는 걸 참고 끊김 없이 영화를 볼 때 한 편의 작품이 온전히 다가온다. 그런 하나의 리듬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영화관이다. 헬스장 역시 같은 의미에서 다른 데 신경 쓸 거 없이 온전히 헬스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소중하다. 집이 가진 편안함은 집중력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번거로움을 무릅쓰는 자에게서 쇳덩이를 들어 올리겠다는 의지력도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같은 무게도 헬스장에서 더 잘 들 수 있는 것이다. 헬스를 위해 다른 모든 불편을 감수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영화관은 위축될지언정 쉽게 사라질 리 없고, 헬스장 역시 땀 흘리는 자의 피땀 어린 등록비로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별 인연 없어 보이는 시네필과 헬창은 그렇게 같은 위기와 고민 지점에서 만난다.
뉴미디어와 비대면 시대, 스트리밍 시대 등등 온갖 용어가 범람하고 있다. 기술이 불편함을 없애는 과정이다. 영화관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사라질 것이다. 아이패드로 개봉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세상 모든 테크놀로지가 추구한 바와 같이 책도 형태가 사라질 것이고, 헬스 기구도 아주 작게 축소될 것이다. 하지만 욕심을 좀 부려보자면 그렇게 점점 편리해지는 시기를 늦추고 싶다. 질질 끌면서 지연시키고 싶다. 지연 작전의 전략은 호소다. 향수를 자극하고 사라지지 말아야 것도 있다면서 애걸하는 것이다. 한때 분 아날로그 열풍처럼 레트로가 대세라고 불편함의 맛을 느껴보자고 슬쩍 고셔도 본다. 그러면서 수시로 영화관을 들락거리고 헬스장 1년 이용권에 거금을 턱턱 쓰면서 없는 신용에 신용카드도 긁어야 한다. 잘하면 이 전략이 먹힐 수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도 사양산업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살아남지 않았나. 구독자와 청취자는 줄었지만 옛 향수에 기대 유지하고 있다. 영화관과 헬스장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누구 말대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랄까. 이 말을 최초로 한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김혁규(Deft) 선수도 게임이 애들을 망친다는 한 국회의원의 망언과 일반 대중이 가진 게임을 폄하하는 소리를 다 극복하고 세계적인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니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부지런히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영화관과 헬스장을 존속시키리라 믿는다.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