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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7. 2023

맨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해

Ver. 2.0

ᅠ 레이먼드 카버,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존 치버의 공통점은 술이다. 이들은 흔히 위대한 작품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우길 때 거론하는 작가들이다. 어느 정도냐면 문장마다 술 냄새가 풀풀 난다. 몽롱하게 취한 상태가 창작에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환상은 홍상수의 대사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이들뿐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인 작가 여섯 명 중 네 명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게 술과 알코올의 상관관계를 증명해 낸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소설은 실제 그들 삶을 망가뜨렸고, 재정 상태를 파탄 냈으며 평생 따라다닐 사고를 쳐서 나무위키 여담 코너를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어디 그뿐인가. 과음으로 친구를 잃고, 건강이 악화됐으며, 결혼 생활은 파탄 났고, 아이를 학대한 혐의로 잡혀가기까지 했다. 당연한 수순대로 직장에서 해고됨에 따라 오직 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과음과 파국은 일맥상통하니까.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파국과 소설 사이에도 샛강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작가들은 술병이 나뒹구는 비극의 레퍼토리를 앞세워서 작디작은 실패담을 지었다.


ᅠ 난 술을 마시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작가를 생각하며 소설을 읽는다. 술김에 만든 비극은 덩달아 나까지 취하게 만든다. 가령,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는 밤만 되면 술을 마시는 인간형이 자꾸만 일을 그르친다. 취기가 어처구니없게 인생을 뒤바뀐다. 술 마시느라 붙잡아야 마땅한 사람을 놓치고, 술김에 평생 후회할 짓을 저지른다. 어쩌겠는가 취했는데. 난, 마치 주취감형을 일삼는 판사처럼 만취한 이를 싸고돈다. 조이스 캐럴 오츠나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이 평생 공무원처럼 건실하게 써낸 작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술 냄새가 진득하게 밴 작업실에서 냄새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위태로운 생계와 밀린 양육비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화통을 붙잡고 출판사와 실랑이를 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핏대 오른 눈과 벌건 코, 그 아래 노기를 품은 듯한 덥수룩한 입매, 남은 술이 없나 냉장고를 뒤적이는 다급한 손까지. 이들은 술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는 뻔한 속삭임을 견뎌내지 못한다. 내겐 이 모든 게 위대한 문학이 남긴 풍경이다.


ᅠ 난 취한 작가의 글을 읽을 때 덩달아 술을 마시고 싶다. 소주와 찌개를 소반에 차려놓고 거나하게 판을 벌이고 싶다. 술 냄새가 밴 문장을 쓰고 싶다. 라면 국물은 벌컥벌컥 잘도 마시면서 몸이 망가질까 맥주 한 잔에도 벌벌 기는 내가 싫다. 단조롭다 못해 한 치의 엇나감도 없는 일과가 오히려 날 더 초조하게 한다. 무슨 초조함인가. 그건 내가 뭘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다. 취한 눈으로 보는 세상을 알지 못하고,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마법 같은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허튼 생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난 정말로 취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도 생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 "술을 마시면 감정이 고양되고 나는 그런 감정을 이야기로 담아내지. 맨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해. 그건 감정 없이 이성으로만 쓴 글이니까." 이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맨정신으로 사는 게 오히려 손해 보는 기분이다. 매일 헬스장이나 들락거리는 무명작가 박 아무개는 정말 이성으로만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 일류 작가는 밤의 밑바닥에 떨어진 회한을 안주 삼아 술잔 채우는 속도를 높여가는데, 난 고작 카페에 앉아 눈알을 굴리면서 전락의 스펙터클을 상상하며 취기를 흉내 낸다. 왠지 술이 없으니 가짜 몰락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술 한 잔만 들어가도 점심때 먹은 밥이 자동으로 똠얌꿍이 돼버리는 나로서는 술잔이 빚어내는 드라마를 흉내 내서 써볼 뿐이다.


 내가 술을 싫어하는 건 순전히 운동 때문이다. 술과 보디빌딩은 함께 갈 수 없다. 특히 몸을 만들겠다면서 술을 마신다는 건 헬스장에서 두 배로 고생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술은 컨디션을 무너뜨리고 근육을 앗아가며 무엇보다 하루 루틴을 망가뜨린다. 술 먹고 헬스장에 가면 고중량을 다루기가 버거워진다. 신경이 둔화하니 자칫하면 삐끗하기 십상이다. 헬스는 무조건 똑바로 선 자세가 기본인데, 술은 세상을 비스름하게 기울인다. 술잔을 기울일 때 몸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꼿꼿하게 선 나를 비정상으로 치부한다. 이러다 보니 운동 시간을 늘려가면서 술 모임이 하나씩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몇 년 사이에 술을 마시면서까지 챙겨야 할 인간관계가 확연히 줄었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더는 술을 권하지 않는다. 회식을 종용하는 분위기도 자취만 남고 사라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사가 술잔을 채우면서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기본이 술이라면서 적어도 먹는 연습이라도 하라면서 내게 눈을 부라렸는데, 이제는 회사에서도 떳떳하게 술 마시지 않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새 술기운 없이 얘기할 수 있는 관계만 내 곁에 남았다. 술병 없이도 너끈히 서너 시간은 떠들 수 있는 사이다. 술 없이도 노래방에서 잘만 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게라도 술자리가 생기면 나가려고 한다. 술 마시는 건 싫어하지만 술 마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좋아하니까. 취한 사람은 골치가 아프지만 취기에 나오는 말은 확실히 귀에 감긴다. 


 그 재미 때문에 어릴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자리에 끼는 걸 좋아했다. 난 헬스장을 다녀와서도 프로틴 음료를 마시면서 술 마시는 애들 옆에서 놀았다. 안주발을 세우면서 뻔한 얘기와 비틀린 웃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리저리 치우치는 사람들의 가엾은 모습을 관찰했다. 난 술자리에서 종종 삶의 비밀을 발견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내 앞에서 웃고 떠들던 그들은 조금 취했다 싶으면 멀쩡할 때는 하지 않았던 비밀 얘기를 털어놨다. 아무 이유 없이 목소리가 커지고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다가 킬킬거리는 사람 사이에 앉아서 난 시종 맞장구를 쳤다. 삶에 녹아든 얘기를 더 듣고 싶었기에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 얘기 좀 더 해보라는 식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다가 보면 가끔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기분을 맛봤다. 친구 중에 술을 마시면 엄숙주의자가 되어 목소리가 커지는 거의 칸트급 성인군자가 되는 현철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녀석은 우리 사이에서 사회를 개도하는 마틴 루터 킹이었다. 녀석은 술만 마시면 자기는 세상을 바꿀 꿈이 있다고 외쳤는데, 한 놈씩 지적하면서 명령을 해댔다. '너 걔랑 헤어져. 딱 봐도 바람기가 많이 보이니까!' 악담에 가까운 말도 많았지만 꼴이 우스워서 우린 그냥 웃어넘겼다. 녀석은 어쩔 때 보면 헤밍웨이처럼 마초가 돼 있었고, 취기가 더 올라오면 무르팍 도사처럼 고민을 해결하겠다고 강호동처럼 소리를 빽 질렀다. 테이블을 손으로 쳐가면서까지 삶의 진리를 일갈하고 친구들이 가진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가 품은 통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녀석 덕분에 불확실한 세상에서 인간이 뭘 믿고 사는지 들어보려면 술자리에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은 내가 술을 안 먹는다고 통박을 주곤 했는데 그런데도 술자리가 생기면 꼬박꼬박 날 불러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강냉이인지 뻥튀기인지 모를 과자만 먹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 취중에 기적처럼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길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알았다. 새벽, 네 시쯤 되면 갈 놈은 다 가고 진짜 액기스 같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속에 없는 악담을 퍼붓기도 했지만, 한 잔 두 잔 비워지는 술잔이 오가다 보면 진실에 가닿는 말이 터져 나왔다.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으나 말하기는 남사스럽고 쑥스러워서 지나쳤던 감정을 못 이긴 척 꺼내 놓았다. 새벽녘 술판은 술이 가진 망각이라는 효능을 앞세워서 사람을 대범하고 과감하게 만들었다. 난 녀석들이 망각을 믿고 꺼낸 얘기를 자주 글에 옮겨 썼다.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먹태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뇌리에 박아둔 얘기가 내 사연으로 둔갑해서 올렸다. 다들 우르르 일어나 집으로 가도 끝까지 버티면서 묻고 답했던 노동 대가였다. 술자리 대화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알맹이는 없고 결국은 무의미하게 꼬라 박히던 말이었지만, 어쩌면 도돌이표에 불과한 허풍에 불과했지만 내겐 삶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유머였다. 후회, 회한, 치기, 원망과 같이 매캐한 감정도 글로 써보면 근사하게 보였다. 헬스 때문에 술을 멀리해도 브런치스토리에는 술 관련 에피소드가 착착 쌓여갔다. 5촉 백열등처럼 은은한 연민이 담긴 러브레터였다. 빈 술잔을 채워주고 등을 두드려주며 고된 하루를 이겨내고 온 그들의 등허리에 고운 말을 얹어놓았다.


ᅠ 술은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 코너에 몰린 인간에게도 술을 마실 때만큼은 틈이 보인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도 유머를 던지는 사람은 취한 이들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시간은 마시던 술이 다 떨어져서 편의점에 냉동만두를 사러 가는 새벽이다. 눈 쌓인 거리와 술집 간판이 자아내는 따스한 기운은 가히 겨울의 환상과 같다. 그땐 다들 아이라도 된 듯 유치하지만 때 묻지 않은 말을 쏟아낸다. 취기가 주는 흥분 상태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존 치버도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나. "내 음주벽과 글쓰기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술이 주는 흥분과 상상이 주는 흥분은 아주 흡사한 면이 있다.” 이런 귀여운 흥분 상태는 내가 지향하는 글의 분위기와 가깝다. 취한 사람처럼 실없는 말을 툭툭 뱉듯이 내 글도 가벼운 농담처럼 내렸으면 좋겠다.


ᅠ 우리 가족도 나 빼고는 다 술을 즐겼다. 아버지는 항상 술을 많이 드셨다. 주사도 심해서 집에 와서 뭔가를 부술 때도 있었다. 무선 전화기는 고치면 부서지고 고치면 또 박살이 났다. 형은 중학생 때부터 동네 공원에서 소주를 마셨다. 담임한테 걸려서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가기도 했다. 술을 일절 안 하던 어머니도 억울했는지 어느 날부턴가 얼굴이 벌게져서 들어왔다. 집이 무너지는 신호가 보이니 다들 술병에 의지해서 밤을 견뎠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에 널브러진 술병과 함께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빠져들지 모르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우리 집은 겉보기에는 중산층의 전형으로 비쳤지만, 술만 마시면 썩은 환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후회와 분노가 삐죽거리는 게 눈에 다 보였다. 서로를 원망하고 어떨 때는 저주하는 게 다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난 꼴 보기 싫어서 수영장에 가고 운동장에서 축구하며 시간을 소진했다. 속이 시끄러우면 무조건 이어폰으로 도피했다. 꽝꽝거리는 음악을 귀에 박고 낯선 동네를 배회하다가 들어왔다. 내게 술은 인생의 꿈이 가망 없는 나락으로 추락했음을 의미했다. 서른 후반에 다다른 지금, 난 술은커녕 이제 콜라도 잘 마시지 않는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와인을 마셔라, 시를 마셔라, 순수를 마시"라고 외쳤다지만, 난 술을 마시면 시는커녕 잠들기 바쁜 '알쓰'다.


 테네시 윌리엄스 희곡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에코 스프링(Echo Spring)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려고요." 에코 스프링은 버번위스키 브랜드명에서 따온 단어로 작은 술 진열장의 별칭으로 사용된다. 취기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술을 마시며 잠시나마 골치 아픈 생각을 잊고 고요하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걸 의미한다. 작가들은 치열한 '창작의 고통' 속에서 술을 통해 에코 스프링과 같은 작은 위안을 얻었다. 그 반면 나는 글이 안 풀릴 때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갔다. 근육이 찢어지고 늘어나면서 느껴지는 통각이 약한 현기증으로 올라올 때 나는 에코 스프링에 와 있었다. 정신이 나른해지고 다리가 휘청이면서 프로틴 한 모금에 취해버렸다. 그러니까 내 에코 스프링은 고중량 스쿼트고, 바벨을 잔뜩 낀 쇳덩이는 숙취가 없는 버번위스키와 다름없다.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땐 술을 즐겼다. 장기 여행이라 낮에 거리를 쏘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갈 수 있는 곳이 호텔 방이랑 지하에 있는 위스키 바뿐이었다. 난 바에 들고 다니던 책을 가져가서 이름 모를 위스키를 하나 시키고 자정까지 시간을 보냈다. 술은 말도 못 하게 독하고 썼지만, 음악도 좋고 취기가 살짝 올라오니 웃음이 실실 배어 나왔다. 난 바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을 구경했다. 피아노 재즈 넘버가 방 안 가득 울려대며 옆에서는 바텐더가 술을 따르고 주방에서는 감자를 튀겼다. 손님은 퇴근 후에 혼자 위스킨 한잔을 걸치기 위해 들른 사람이 대다수였다. 어제와 전혀 다르지 않은 내일을 사는 이들은 여행자인 나완 다르게 술을 빠른 속도로 마셔댔다.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들 말을 엿듣고 주크박스가 돌아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놀았다. 내가 앉은자리 맞은편 바에는 술을 마시면서 독서하는 남자가 보였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검은 옷에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그 옆에서 바텐더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술을 마시는 인간 군상을 바라보면서 점차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달콤한 위스키 그리고 머리를 긁는 고양이, 프란츠 리스트의 현란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는 술집이야말로 완전한 세계라고 여겼다. 나는 술을 잘 못하지만, 술이 나오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그건 바로 스코틀랜드의 추억 때문이다. 아무래도 쨍하고 환하고 시끄럽고 격양된 헬스장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드물다. 내가 잘 써봐야지. 술에 관한 소회를 잔뜩 적고 나니 정말 술이 당긴다. 그래봤자 술 먹을 일도 없지만 군침이 돌긴 한다. 술을 잔에 받아만 놓고 알탕과 닭발, 오돌뼈를 먹고 싶다. 은은한 불빛 아래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람 사는 얘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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