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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6. 2023

노동에는 밀크, 헬스에는 무조건 블랙

Ver. 2.0

 ᅠ요즘 부쩍 편의점 커피를 마신다. 아침에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커피를 끓일 생각은 못 하고, 속 끓일 거 없이 오피스텔 1층에 자리한 세븐일레븐 커피를 애용한다. 오늘도 개울가에서 수통을 채우는 병사처럼 고단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졸졸 떨어지는 커피를 받아 나섰다. 병사가 허리에 찬 수통을 달캉이며 산길을 오르듯 나 역시 거칠기로 유명한 여의대방로를 통과해서 가까스로 업무 시작 오 분 전에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잠시 심호흡을 하고 간신히 한 모음을 들이켰다.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다. 포탄이 쏟아지기 전에 혈관에 혈액 대신 카페인을 흘려보냈다. 모르핀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지체할 거 없이 차 문을 열고 나섰다.


ᅠ 금세 커피가 동나서 또 다른 거점인 회사 1층 GS25에서 아메리카노를 하나 더 주문했다. '라지 하나요.' 컵을 하나 뽑아 들고 '아메리카노 핫' 버튼을 눌렀다. 졸졸 커피가 떨어지며 몸이 나른해졌다. 뭉친 어깨를 풀며 전국 어디나 비슷한 편의점 실내를 둘러봤다. 예외 없이 가지런한 코스모스의 세계가 든든했다.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인 편의점은 스타벅스처럼 전국 어디나 비슷하게 생긴 데다가, 이름처럼 웬만한 편의를 다 볼 수 있다 보니 원만하게 필요한 것만 취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심지어 요즘엔 단백질 셰이크와 닭가슴살도 잘 나와서 운동 후에도 애용한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드문 경우다. 내가 편의점에서 제일 많이 사는 건 아몬드 브리즈 음료랑 바나나다. 속에 부담이 없는 아침 메뉴로 애용한다. 그렇게 아침부터 커피를 사러 들어가서 아침 식사까지 해결하는 편의를 도모했다.


ᅠ 회사 점심시간에는 막간을 이용해서 헬스장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셨다. 갈증이 심할 때라 청량감을 느끼기 위해 아이스로 시켰다. 보통 따듯한 커피를 좋아하지만, 운동 후에 땀이 줄줄 흐를 때는 딱히 방도가 없다. 나름 유럽에서 산 세월이 있어서 처음에는 커피에 얼음을 들이붓는 걸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울 때 빨리 마시기 좋은 '아아'의 매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은 오후에 줄줄이 회의가 잡혀 있어서 부러 샷 하나를 더 추가해서 먹었다. 목 넘김이 따가울 정도로 쓴 커피를 마시며 각성을 촉구하니 살만했다. '아아'가 없었다면 난 아마도 오후 업무를 쉽게 버텨내진 못했으리라.


 점심 식사 후에 낮잠을 즐기기도 하지만, 한 번 잠이 들면 깨어나기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간혹가다 점심시간을 쪼개서 헬스장에 드나든다. 파워리프팅은 짧은 시간에 큰 자극을 느낄 수 있는 효율적인 운동이다. 고중량을 어깨에 걸치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면 졸리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잠잠하던 몸뚱이가 깨어나고 욱신거림은 독한 카페인에 누그러진다. 허기는 지우고 오직 그윽한 향만 입가를 메운다. 이 느낌이 좋아서 난 습관처럼 운동 전후로 커피를 마셔왔다. 커피는 내 일상을 감쌌고, 틈만 나면 나타나서 날 안정시켰다. 대한민국이 커피 공화국이라는 사실이 내겐 퍽 다행이다.




 ᅠ난 꽤 어릴 적부터 아침에 커피를 타 마셨다. 어머니가 주말 아침이면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자기 컵에 '둘둘둘'로 타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몸에 안 좋고 밤에 잠도 안 온다며 만류했지만 못 이기는 척 뜨겁게 타 주셨다. 유리통에 든 아마도 맥심 마일드로 짐작되는 인스턴트커피 두 스푼과 프리마와 설탕도 둘씩 퍼 넣었다. 난 특히 프림이라 불리던 식물성 크림인 프리마를 유독 좋아했다. 느끼한 맛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 프리마만 몰래 퍼먹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걸리면 어머니가 그거 다 돼지비계라고 먹지 말라고 고함을 치셨는데, 알고 보니 코코넛 오일과 같은 식물성 유지로 만든다고 하더라. 요즘도 가끔 고소한 카페라테를 마실 때 치명적인 백색 가루 프리마 떠올리곤 한다.


 ᅠ오후에 미팅을 끝내고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서 나서려는데 점원분께서 설탕이나 크림이 필요한지 물어왔다. 난 손사래를 치며 요즘엔 다이어트 때문에 블랙커피만 마신다고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미련 없이 다시 카톡 창으로 돌아갔다. 힐끔 보니 가득 쌓인 대화에 답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창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대화를 나누는 꼴이 퍽 신나 보였다. 저 손바닥만 한 기계가 없었다면 알바 시간이 얼마나 지루했을까. 그의 안색은 무척 피곤해 보였음에도 엄지손가락만큼은 현란했다. 알 수 없는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 티에 통이 큰 연청색 데님과 긴 생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낡고 색이 바랜 흰색 슈퍼스타 운동화를 덜렁덜렁 흔들면서 수다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옆에는 에스프레소 잔이 놓여있었는데, 진한 로마노 향이 날 자극했다. 알바 시간에도 커피를 즐길 줄 아는 그가 시칠리아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요즘은 다들 옷을 크게 입는 추세다. 그게 요즘 유행일 텐데 난 운동한 걸 티 내느라 사시사철 꼭 끼게 입는다. 나로서는 언제쯤 유행이 돌고 돌아 다시 쫄티가 유행할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살이 불어서 지금 입는 옷이 터질 것처럼 조이기 시작했다. 망설이다가 몇몇 옷은 헌 옷 수거함에 넣었다. 어머니 말마따나 미리부터 한두 치수 큰 걸 샀으면 됐건만. 내가 옷을 꽉 끼게 입기 시작한 건 이탈리아 여행 탓이 크다. 유럽에서 학교에 다닐 때 잠시 떠났던 배낭여행에서 난 이탈리아 남자들이 입는 몸에 착 붙는 셔츠에 반해버렸다. 내가 몸을 잘 만들면 저런 옷을 입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딱 붙는 셔츠에 잘 다려진 팬츠를 입고 코리에라 델라 세라 신문 따위를 보면서 작은 잔에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일을 하다가도 동료와 함께 에스프레소 잔을 검지에 끼고 홀짝이면서 화보에 나올법한 사진을 찍어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허무맹랑한 커피의 로망이 있다. 잘 다린 셔츠를 입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도시 남자. 내 와꾸는 이탈리아 남자와 달리 형편없지만 그래도 그들처럼 딱 붙게 입고 에스프레소 바에 가면 남부 시칠리아의 여유 정도는 따라 할 수 있다.


 내가 한창 통이 큰 힙합바지를 입고 작가의 꿈을 키우던 시절에는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긴 시간을 써야 하는 아르바이트보다는 하루짜리 막노동을 선호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는 대학 생활을 버텨낼 수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까르보나라를 사줘야 했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에 분홍색 스푼을 꽂고 달콤한 얘기도 나눠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악어 피케셔츠를 사 입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곧 죽어도 커피는 스타벅스였으며 최신형 맥북으로 작가의 꿈도 키워야 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편의점 알바는 질색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 흔한 극장 아르바이트나 주유소 일도 못 해봤다. 늘 돈이 급했던 나는 하루 뼈 빠지게 고생하더라도 10만 원이 훌쩍 넘는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노역이 좋았다.


 그 무렵 돈이 궁하면 난 새벽같이 인덕원역 앞 오래된 상가에 자리한 인력사무소를 찾아갔다. 개화기 때나 썼을 법한 낡은 소파에 앉아서 소장님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일을 받지 못하고 허탕 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경리 누나에게 이런저런 걸 물어봤지만 반응이 싸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농을 걸어봐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대답이 없었다. 별수 없이 잔뜩 때 낀 정수기로 맥심 모카골드를 타 마시고 우먼센스 같은 여성지를 읽었다. 일찍 온 순서대로 일을 준다는 친구 말과 달리 내 차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전화가 불이 나고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져도 내게는 일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장은 날 흘겨보고는 질문을 퍼부었다. '너 몇 살이냐. 일 경험은 있냐. 이거 키도 작고 삐쩍 골아서 뭘 하겠어?' 그는 나 대신 경리 누나한테 따지듯 물었고, 누나는 노란색 맥심 모카골드를 두 봉지나 타서 소장에게 건넸다. 난 옆에서 나도 모르는 새 가슴을 쫙 펴고 힘 좀 쓰는 청년을 자임했다. '몇 번 해봤어요. 미성년자는 아니에요. 헬스도 해요.' 소장은 날 꼼꼼히 살펴보다가 묻지도 않고 선심 쓰듯 공사장 일거리를 주고 다시 나가버렸다.


 ᅠ난 이왕 고생할 거라면 철거 현장보다는 아파트 신축 현장이나 주택 재건축 공사장을 선호했다. 공사장은 항상 먼지가 많지만 유독 철거 현장은 땡볕에 먼지가 자욱했다. 어느 정도 준공에 다다른 현장은 건물로 인해 그늘이 져 덜 지치고, 현장 분위기도 한결 여유로웠다. 바야흐로 뉴타운과 재개발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개발 광풍이 온 도시를 휩쓸던 때라 나 같은 공사장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덕원역 앞에 가면 한 여름인데도 목에 수건을 걸치고 긴팔에 외투까지 입은 인부들이 있었다. 저게 프로들의 옷차림인가 했다. 나도 일을 하려면 저 군화 같은 워커를 신어야 하나 싶어서 아찔했다. 저렇게 켜켜이 껴입고 여름 땡볕을 버티기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저렇게 입지 않고는 일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운동복 차림에 나이키 로고가 선명한 스니커즈를 신고 서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나를 태워 갈 차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레이스 봉고차가 도착하면 다들 말도 없이 올라타서 현장으로 향했다. 차 안은 적막이 흘렀고, 다 표정이 어두웠던 기억이 난다. 나도 두려움에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하염없이 긴 하루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후드티를 입은 내 나이 또래 녀석도 보였다. 녀석도 마찬가지로 바지에 똥을 지린 표정을 하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ᅠ 초짜인 우린 주로 벽돌이랑 흙을 옮기는 일을 했다. 벽에 나사를 박는 아저씨를 보조하고, 여러 차례 트럭이 물자를 쏟고 가면 실어 나르는 일도 우리 몫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십장이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 일단 멈추고 튀어가야만 했다. 난 잠깐 쉴 때마다 공사장 한편에 마련된 정수기 옆에서 커피믹스를 타 마시며 시계만 살폈다. 분명히 근력을 쓰는 행위였는데, 노동은 단련이 아니라 소진에 가까웠다. 일 근육은 내 패션 근육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였다. 점점 허리가 아파졌고, 얼굴은 선크림을 안 발라서 새까맣게 타버렸다. '에이, 모자라도 쓰고 올걸.' 혼자 중얼거리자 어김없이 바지에 똥을 지린 표정을 한 후드티가 선 스틱을 던져왔다.


ᅠ 공사장 점심시간은 무조건 국밥이다. 점심은 공짜라서 곱빼기에 밥을 두 공기나 말아서 먹었다. 녹초가 되어 밥맛이 없었지만, 아저씨들이 오후에 버티려면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닦달해서 어쩔 수 없이 국물까지 다 들이켰다. 식후에는 당이 모자란다는 말을 실감하며 식당 자판기에서 달곰한 커피를 연거푸 뽑아 마셨다. 거기엔 프리마로 만든 우유 버튼도 있어서 그걸 밀크커피와 섞어 마셨다. 군대 훈련소 때 마셨던 카페오레 맛이 나는 커피였다. 전에는 결코 느껴볼 수 없었던 당을 향한 갈증이 엄습했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도 종이컵을 들고 당을 주입하고 있었다. 오전 내내 벽에 공구리를 치던 아저씨는 내게 담배를 권하며 자판기 커피와 담배를 같이 마시면 인생의 깊은 맛이 난다며 어림도 없는 구라를 쳤다. 커피 타임엔 그동안 말 한마디 없던 아저씨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뜨내기가 많아서인지 뉴페이스의 출현은 그들의 오락거리였던 것 같다. 가장 선임급으로 보이는 인부들은 시시덕거리며 길바닥에라도 몸을 누이고 싶은 날 붙들고 농담을 따먹었다. 난 무시해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러면 또 힘든 일을 받으면 어쩌나 싶어 또박또박 답을 해줬다. 밥을 먹고 현장으로 돌아가니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낮잠을 청했다. 오후 땡볕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체력을 아껴야 했다. 공사장 주위에 널린 박스를 아무렇게나 깔고 그늘에 누웠다. 그렇게 어렵사리 오후 현장을 마무리하면 저녁 7시가 되었다. 해가 질 무렵 기진맥진한 상태로 소장님께 가면 두툼한 돈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소장 아저씨는 다른 데보다 더 많이 주는 거라며 말도 안 되는 생색을 냈다. 나 정도 일하는 애는 쌔고 쌨다면서도 내일 또 오라고 재촉했다. 흙으로 뒤덮인 몰골로 지하철을 타면 일하다 온 티를 팍팍 낼 수 있었다. 땀 냄새에 더러운 옷이니 절로 사람들이 날 피했다. 난 구석빼기에 서서 한강에 내리쬐는 석양빛을 받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입에서 커피믹스 특유의 입 냄새가 폴폴 났다.


ᅠ 며칠 전 늦은 저녁까지 일하고 집에 가다가 도로 공사 현장을 바라봤다. 신호 대기 중이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 쉬고 있는 인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설탕과 프리마가 잔뜩 들은 커피믹스일까. 난 무심코 그의 고된 하루를 상상했다. 노동이 주는 신성한 기쁨에 대해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 몸을 씻고 삼겹살에 김치를 구워 먹는 시간을 상상했다. 식탁에 앉아 오늘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을 만끽하겠지. 난 불현듯 빈 종이컵을 구기며 현장으로 돌아갈 때 느꼈던 아스라한 피로감을 떠올렸다. 그건 확신에 가까운 기쁨이라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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