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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2. 2023

첨단 헬스장 방문기

Ver. 2.0

 최근 동네에 새로 생긴 헬스장을 방문했다. 긴 시간 다녔던 헬스장 정액권이 만료된 김에 큰맘 먹고 신장개업한 곳을 찾은 것이다. 헬스장 입구에 150개는 훌쩍 넘는 화환이 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보디빌더 선수ᅠ출신 사장님의 ‘인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디빌딩은 고독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운동이라서 지인도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요즘 인스타그램을 보면 그거야말로 편견이었다. 보디빌더는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팔로워 수를 자랑했다. 몸이 좋으면 주변에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니까. 과거에는 몸을 키운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폭력적인 이미지를 연상했지만, 요즘에는 단련한 몸이 올바른 정신과 규칙적인 생활과 결부한다는 인식으로 바뀐 탓도 크다. 그래서 만화 <식객>에서 허영만 화백이 뻑뻑한 닭가슴살을 먹으면서 운동을 하는 보디빌더를 ‘도시의 수도승’으로 칭한 것일 테지.


 금테로 두른 헬스장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장님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팔이 광배근에 걸려서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갑자기 사장님의 인플루언싱은 과연 저 우람한 팔뚝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저 팔뚝 하나로 인간관계의 수많은 갈등과 번민을 손쉽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문 앞에 세워진 저 수많은 화환도 저 팔뚝이 만들어 낸 위엄일까. 그게 무슨 소리냐, 수도승이라니까. 헬스장 ᅠ등록비는 광고보다 비쌌지만, 오픈 기념 할인 중이라서 큰맘 먹고 등록했다. 절대 사장님이 무서워서 결재한 건 아니었다. 고작 사장님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1년짜리 회원권을 오 분 만에 결정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나도 사장님처럼 쫙쫙 갈라지는 하체를 갖고 싶었다. 안 그래도 그간 하체 운동에 부침을 겪고 있어서 낡은 기구 탓을 했었기에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나의 부침이 절대로 게으름과 노화 탓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과거에는 슬럼프가 왔을 때 장비 탓을 하며 열심히 쇼핑했다. 그러면 기분 전환이 되면서 곧잘 좋아지곤 했다. 근데 최근에는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차도가 없었다. 허리를 보호대도 신제품으로 사고, 유명 보디빌더가 주로 쓴다는 무릎 보호대도 찼지만, 별수 없었다. 금융 치료로도 진척이 없으니 다른 핑계가 필요했다. '아 헬스장을 바꿔야 하는구나.' 뒤처진 게 아니라 조금 권태로울 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수년간 다녔던 헬스장은 정말 저렴했다. 일부 기구는 녹이 슬고 스미스 머신이나 파워랙도 한 개뿐이었지만 익숙함에 젖어 계속 이용했다. 진짜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다. 근데 난 고수가 아니라서 그런지 점점 더 지겨워졌다. 구력이 족히 삽 십 년은ᅠ넘어 보이는 ᅠ베테랑 어르신들과 섞여서 극찬과 코칭을 번갈아 받으며 인생을 배우는 것도 ᅠ나쁘진 않았지만, 시설 좋은 곳에서 내 나이보다 어린 회원들의 힘을 받고 싶었다. 거대한 근육을 지닌 청년들 사이에서 운동하면 당연히 더 타이트한 정신적인 자극이 올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개업한 지 한 달도 안 된 헬스장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형형색색 운동복을 입은 회원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 기가 죽었지만 내가 딱 원해 온 분위기였다. 


 ᅠ신장개업한 헬스장의 가장 큰 장점은 최신식 헬스 기구였다. 노 젓는 로잉머신도 독일제라 그런지 벤츠처럼 고급스러웠고, 고정식 자전거 ‘에르고미터’는 내 몸의 바이오리듬을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보여줬다. 심지어 산소호흡기가 달린 러닝머신도 있었다. 심장 모니터 전극과 대형 텔레비전 스크린이 달린 장비였다. 퇴근하고 헬스장에 들른 열 명 안팎의 직장인들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라디오스타 보는 모습을 상상이나 한 적 있던가. 독설가로 유명했던 ‘조지 오웰’이 이 모습을 봤다면 이들이 바로 ‘빅 브라더’의 노예들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러닝머신이 너무 좋아 보여서 나도 생전 안 하던 ‘트레드밀’에 올라탔다. <고등 래퍼> 재방송을 보면서 제자리를 달리니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하는 기분이 휩싸였다. 이게 흔히 말하는 기구 버프(buff)인가.


 헬스장 조명이 완벽해서 단백질 셰이커를 흔들며 어깨에 복압 벨트를 걸친 내 모습이 ‘지큐’는 좀 오버고 ‘머슬&피트니스’나 ‘맨즈헬스' 화보에 등장하는 ᅠ모델처럼 ᅠ근사해 보였다. 의기양양해진 난 몸도 제대로 안 풀고 바로 쇳덩이를 어깨에 얹었다. 쇳덩이라고 부르기에는 딱 봐도 값비싸 보이는 엘리코 바벨이었다. 명품 바벨이라고 더 가벼울 리 없는 데 어쩐지 더 힘이 나서 가뿐하게 한 세트를 마쳤다.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서 강렬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무리 요즘 하체가 약해졌다지만 그래도 고작 140킬로에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니 세월이 야속할 뿐이었다. 그렇다, 한 해 한 해 들어 올리는 무게가 줄어가고 있다. 너무 명백하게 떨어지고 있어서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이제 어디 가서 삼 대 오백 친다고 허풍은 못 치리라. 그때 누가 창문을 열었는지 햇살이 들이치면서 조명이 사라지자, 사면에 붙은 거울이 내 몸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마치 포토샵을 벗겨낸 원본 사진처럼 초라한 몸뚱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성잡지 화보는커녕 나약한 사내의 당혹한 얼굴이 흉측했다. 내가 알던 강인하고 날렵한 몸매는 온데간데없고 굼뜨고 느려 터진 아저씨가 거울 속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난 성급히 눈을 돌렸다. 표정을 가다듬고 단백질 파우더의 달곰씁쓸한 맛을 음미했다.


 누가 볼세라 10킬로 바벨을 빼고 다시 스쿼트를 시작했다. 허벅지에 통증이 차오르면서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아리따운 여성이 있었지만, 힘에 부치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허세가 통하지 않는 나이로구나. 힘이 빠지는 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면서 저 멀리서 GX(Group Exercise)룸에서 몸을 푸는 한 무리를 구경했다. 제발 스판덱스웨어만은 입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은 아저씨들이 우렁찬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거울 위쪽을 보니 일일 피티(personal training) 가격이 무려 한 시간에 십만 원이나 했다. 온갖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젊고 잘생긴 트레이너가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회원들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왠지 나도 더 열심히 노력해서 트레이너로 도전해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느니 운동에 올인했으면 더 몸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안 돌아가는 머리로 책상머리에서 씨름하느니 쇳덩이와 싸우는 게 내 운명이 아니었을까.


 한때 멋모르고 체육인으로 사는 삶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육체의 실감이 세상 모든 문학적인 수사보다 더 현현할 때, 만약 노동이 운동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했다. 랩 하면서 돈을 버는 래퍼들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골을 넣으면서 매주 수억씩 버는 손흥민보다 더 재밌게 살 줄 알았다. 그러면 출근해서 운동하고, 일하면서 운동하고, 퇴근할 때도 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럼, 가책 없이 저녁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다음 날엔 해장으로 임연수어를 흡입할 텐데. 그렇게 해도 내 몸은 점점 더 조각처럼 멀끔해져서 화려한 밤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을 텐데. 문학은 무슨 문학이고, 내 경험상 밤에는 육체만 현현했다. 치솟는 테스토스테론은 사무실 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하다가 쓸데없는 잡념이 끼어드는 걸 보니 이제 운동을 마칠 때가 온 모양이다.


 새로 개업한 곳이라 그런지 샤워실은 물비누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 이런 거대한 바우하우스풍 헬스장을 차릴 수 있는 재력이 부러웠다. 역시 돈은 없는 사람만 없지. 불황이다 뭐다 해도 있는 사람은 척척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낸다. 샤워실 거울을 보니 내 하체가 보기 좋게 부풀어 있었다. 복부는 마음이 아파서 눈여겨보지 않았다. 오늘 밤은 진짜 사과 한쪽만 먹고 자야지. 예전처럼 짝을 이룰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사무실 경찬이, 옆 사무실 원도와 운동이 끝나고 웃고 떠들었던 옛 시절이 그리웠다. 난 요즘 소란이 필요한 시기를 겪고 있다. 이건 대도시의 고독이라고 아무리 우겨대도 별로 나아질 게 없는 외로움이었다. 하체 근력의ᅠ 중요성을 글로 적을 게 아니라 운동 끝나고 맥주 한 잔에 치킨 뻑뻑 살을 뜯으면서 떠들 동료가 필요했다. 내일은 헬스장 대신 천변으로 나가 바깥공기를 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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