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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3. 2023

몸으로 밀고 나가는 기분

Ver. 2.0

ᅠ퇴근하자마자 집 근처 천변으로 향했다. 목요일은 헬스장 대신 신선한 공기를 쐬는 날이다. 개천가에는 곳곳에 철봉과 평행봉이 있어서 우선 턱걸이로 몸을 풀었다. 기분 좋은 흥분이 등허리께에 느껴졌다. 우선 철봉에 몸을 늘어뜨리고 건어물처럼 몸을 스트레칭했다. 다행히 오전부터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퇴근할 무렵에 개었다. 희미한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선선한 게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개천가에는 부지런한 러너들이 벌써 나와서 열심히들 뛰고 있었다. 나도 걷는 듯 천천히 유럽의 운하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슬슬 몸을 풀기 시작했다. 에어팟으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틀었다. 날렵한 제1 바이올린이 적막을 깨고 완만한 선율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야흐로 막 장마가 끝난 무렵이라 일 년 중 어느 철보다 가장 뛰기 좋은 시기였다. 하루살이와 초파리가 많았지만, 새옹지마라고 마스크를 쓰니 신선한 공기만 코와 입으로 들락거렸다. 나는 마치 배우처럼 잘 배워온 행복에 겨운 대사를 내뱉었다. ‘체육관, 잔디밭, 그리고 달리는 어린아이, 초록 초록 자란 잔디밭까지. 저 애들을 봐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네요!’


 개천 다리 밑에서 열리는 러닝크루 정기 모임 장소에 시간 맞춰 도착했다. 백 명도 넘는 회원 수를 자랑하는 러닝크루답게 벌써 수십 명이 나와 있었다. 내가 러닝크루에 참여한 지는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약속한 장소에서 몸을 풀고 뛰고 음료수 한잔하고 헤어지는 러닝크루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 일정 정도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클럽을 운영하는 스텝들은 다정하고 친절하며 무엇보다 힘이 넘친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 나로서는 무뚝뚝한 나와 기꺼이 뛰어주는 그들의 다정함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러닝크루 덕에 사막 같은 한 주에 목요일만큼은 비가 내린 후의 숲과 같은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크루원이 다 모이기가 무섭게 몸을 풀고 달릴 준비를 했다. 나는 맨 뒷줄에서 나이키 러닝 앱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보로 시작해서 조금씩 스퍼트를 올렸다. 얼굴만 몇 번 봐서 아는 옆 사람에게 요즘 근황을 묻기도 하고, 나라 돌아가는 꼴에 관한 얘기도 나눴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개천에서 보는 사이지만 신변잡기에 가까운 말로 생활감을 공유하다 보니 무척 즐거웠다. 아마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알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런 느슨한 거리감이야말로 러닝크루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러닝크루의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감은 복닥거리는 사무실에서 치여 사는 내게 적절한 안정감을 준다. 난 사람과 너무 오래 밀접하게 시간을 보내면 냉랭하고 무뚝뚝해지며 혼자 있고 싶어 안달이 나는 타입인데, 크루 활동은 어느 정도의 익명성과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천천히 뛰기 시작해서 어느새 사 킬로 부근에서 반환점을 돌며 스퍼트를 좀 올렸다. 숨이 가빠지고 맥박이 팔딱였다. 개천 공원 잔디밭을 뒹구는 레트리버 옆으로 훤하게 뚫린 러닝 코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리더가 구호를 내리자, 우리는 소리를 지르고 좀 더 내달리기 시작했다. 난 구호가 잘 들리지 않아서 대뜸 고릴라 고함으로 화답했다. ‘우어어어!’ 속도가 붙나, 발정기의 오랑우탄처럼 신이 났다. 무거운 몸을 무릅쓰고 뛰러 나온 내가 무척 어여뻤다. 주말로 다가서는 목요일 저녁인데 술 약속도 마다하고 이렇게 뛰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한가. 사실 별 약속도 없었지만, 뛸 약속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이처럼 러닝은 여러모로 자긍심을 갖게 하는 확실하고도 드문 기쁨이다.


 사위가 어둑해지면서 밤안개로 자욱한 공기와 부드러운 땅의 숨결이 내 코로 들락거렸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둔해진 정신이 점점 더 명료해졌다. 난 몇 년 전만 해도 오직 헬스만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유산소 안 하냐고 물어보면 근손실 난다고 손사래 쳤다. 그냥 스쿼트를 가벼운 무게로 횟수를 늘리면 유산소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우겼다. 내심 속으로 러닝을 무시했던 것 같다. 텔레비전으로 마라톤을 보면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이 다 말라서 그랬던 것 같다. 왠지 마라톤은 삐쩍 마른 사람들만 하는 운동처럼 보였달까. 그게 아니면 어르신이 목에 수건을 두르고 가볍게 마실 갈 때 하는 운동 정도로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러닝크루에 참석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한 마디로 내달리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몸으로 지면을 밀고 나갈 때 엉덩이에서부터 온몸 구석구석까지 피가 도는 게 다 느껴질 정도로 원초적인 쾌감이 느껴졌다. 이 기분을 모르고 살았다니 억울할 정도였다. 헬스장 러닝머신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직선의 쾌감이랄까. 난 나도 모르는 새 헬스장 아니면 운동을 못 하는 실내형 인간이 되어 있었다. 러닝을 꾸준히 하면서 오히려 헬스의 수행 능력이 더 좋아졌다. 심폐지구력이 좋아지면서 고강도 근력 운동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난 매주 뛰어야 사는 사람이 되었다.


 코스 막바지에 다다르며 차가운 저녁 바람이ᅠ벌겋게 달궈진 이마와 볼을 식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손을 활짝 벌렸다. 에어팟에서 나오는 'I Believe I Can Fly'를 흥얼거렸다. 이제 훨훨 날 수 있다고 울부짖는 R. 켈리의 가사가 위대한 러너를 향한 찬양가처럼 느껴졌다. 19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에 빙의해서 막판 스퍼트를 감행했다. 좀 무리했나 싶더니 늑골 아래가 쿡쿡 쑤셔왔다. 42.195는커녕 10킬로도 채 달리지 않았는데 내 횡격막이 속도를 줄이라고 요동을 쳤다. 내심 ‘러너스 하이’가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러닝을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러너스 하이’에 관한 썰을 들을 수 있다. ‘러너스 하이’는 미국의 심리학자인 A.J.멘델이 1979년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인데, 공원처럼 바깥에서 뛸 때 겪는 신체적인 스트레스가 유발하는 도취감과 행복감을 말한다. 지난주에도 러닝크루에 참가해서 몸을 푸는데 한 유경험자의 간증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내가 지나 대회 하프마라톤 뛰었잖아. 중반까지 진짜 뒤지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 코너 알지? 그 마의 오르막길을 통과하자마자 ‘러너스 하이’가 오더라니까. 진짜 무슨 뽕이라도 맞은 것처럼 쿡쿡 쑤시던 옆구리가 나아지면서 숨이 탁 트이더라고.’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육체의 통증이 쾌감으로 전환되는 그 마조히즘에 가까운 기분을 떠벌였다. 왜 난 '러너스 하이'가 찾아오지 않는 걸까. '하긴 고작 십 킬로 뛰고 무슨 도취감을 느끼겠냐. 기껏해야 러너스 로우 정도겠지.’ 그래서 올가을에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다. 기필코 러너스 하이에 다다르겠다고 다짐했다.


 숨넘어가는 통증을 잊기 위해 더 훌륭한 러너가 되기 위한 쇼핑리스트를 하나씩 채워 넣었다. ‘우선, 육상화도 큰맘 먹고 나이키 '알파플라이'로 바꾸고, 할인판매 기간이니까 언더아머 타이츠랑 머리띠도 사야지.’ 결승점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장바구니가 가득 찼다. 맨 앞줄의 리더가 뒤를 돌아보더니 더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난 허리를 곧추세우고 쇼핑의 기쁨과 슬픔에 관해 생각하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최근 러닝에 투여하는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노화로 인한 체력 고갈을 장비로 어떻게든 메우려는 욕심이 부른 소비였다. 튼튼한 허벅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러닝이 점점 더 고가의 제품들에 에워싸였다. 시즌마다 출시하는 나이키 운동화를 사전 예약하며 승리의 니케 여신에게 십일조를 한다. 그러니까 난 나이키 운동화로 드넓은 동네 천변을 내 것으로 만든 셈이다. 낮이고 밤이고 내 나이키만 있으면 ‘저스트 두 잇’이다. 다른 의미의 ‘러너스 하이’에 고취된 나는 나이키 광고처럼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결승점을 통과했다. 크루원들이 밝은 미소로 날 반겨줬다.


 결승점에 도착해서 숨을 고른 후에 크루에서 나눠준 포카리스웨트를 한 잔 마셨다. 눈앞이 환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내 안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숨 가쁜 헐떡임이 주는 신비로운 열기랄까. 함께 뛴 멤버들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넉 달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훈련소 동기들에게 느꼈던 동지애가 생겨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운동을 꾸준히 했는지 혈색이 좋아 보였다. 직장인 특유의 우울함과 무뚝뚝함은 온데간데없고 두 다리가 솥에 넣은 오골계처럼 날래 보였다. 역시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은 좀처럼 늙지 않는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몸을 말렸다. 아랫배를 만지면서 한참 거울을 봤다. 여드름 난 턱도 유심히 보고, 군살이 접힌 엉덩이도 살폈다. 난 정신적으론 아직 어린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살갗은 벌써 바짝 마른 데가 흠집까지 나 있었다. 미간에도 큰 주름이 잡혔고 팔자 주름은 작년보다 두 배는 더 짙어졌다. 나이트 크림을 듬뿍 퍼서 얼굴에 처발랐다.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니 휴 그랜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습"이라고 말하던데. 하긴 운동하고 관리 안 하면 금세 쭈글쭈글해지고 동안이라는 말도 다 인사치레로 들릴게 뻔하다. 난 와플에 생크림을 얹는 것처럼 크림을 추가로 듬뿍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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